◇네덜란드 염장 청어가 인기인 이유

생청어를 먹는 모습. /위키피디아

청어는 지방질이 많아 빨리 상했다. 그래서 상하기 전에 염장 처리하려면 만선이 안되더라도 빨리 항구로 돌아와야 했다. 네덜란드 어부들은 14세기 중엽부터 청어를 배 위에서 작은 칼로 내장과 가시를 처리하여 바닷물을 85% 증발시킨 함수(鹹水)에 염장하는 ‘선상 염장’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이제는 항구에 자주 돌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주변 경쟁국들을 따돌리고 청어 어획고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함수로 염장한 청어는 소금에 절인 청어에 비해 짜지 않아 생선 식감이 훨씬 좋았다. 함수로 염장한 청어가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생청어’(Dutch Herring)이다. 여기에 식초를 부어 절이면 ‘식초 절임 청어’, 연기에 말리면 ‘훈제 청어’, 소금으로 2차 염장하면 1년 이상 유통할 수 있는 ‘염장 청어’가 된다. 이로써 경쟁국에 비해 맛이 좋은 네덜란드 염장 청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청어 산업은 국가 산업이 되었다.

◇청어잡이 배의 진화

청어잡이 전용선 ‘헤링버스’와 보급선. /위키피디아

이제 네덜란드 어부들은 북해 앞 바다뿐 아니라 청어 떼를 쫓아 스코틀랜드와 아이슬란드 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작은 고기잡이배로서는 원양 항해가 무리였다. 그래서 15세기 중반부터 청어잡이 전용 선박 ‘헤링버스’(Herring Buss)가 개발되었다.

네덜란드 저지대 원주민들은 8~11세기에 이주한 바이킹 후손들이 많았다. 바이킹 배는 길쭉하고 물에 얕게 잠기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들은 청어잡이 배를 기동성 좋은 바이킹 롱쉽(long-ship)을 토대로 선상 작업에 편리한 형태로 개량했다. 우선 선상에서 청어 내장과 가시를 처리한 후 통에 담는 작업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갑판 넓이를 라운드쉽(round-ship) 모양으로 키웠다.

그리고 어업 방식도 진화했다. 청어잡이 배가 항구로 회항하는 대신 보급선들이 식량과 함수, 소금을 싣고 와서 청어를 가져가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청어 잡는 어부들이 바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청어잡이 배 또한 더 많은 청어와 소금, 그리고 더 많은 선원들을 태워야 했기에 헤링버스 크기는 지속적으로 커져 16세기 말에는 140~200톤 규모에 달했다. 이렇게 커진 배는 청어잡이 시즌(5~9월)이 끝나면 청어 관련 무역선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배 만드는 기술을 비밀에 부쳐 설계도의 외부 유출을 엄격히 금했다.

◇유대인, 3차례에 걸쳐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오다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에 몰려든 시기는 크게 3차례이다. 1차 이주는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된 1492년과 포르투갈에서마저 추방된 1497년, 2차 이주는 앤트워프 학살 사건에서 탈출한 1567년, 3차 이주는 앤트워프가 스페인에 정복당한 1585년이었다.

유대인들이 1차 이주하여 활발히 활동하던 1514년의 암스테르담 인구는 1만여 명에 불과한 작은 항구도시였다. 그 뒤 2차례에 걸쳐 유대인들의 이주가 더 이루어져 암스테르담 인구가 급격히 불어났음에도 1590년 암스테르담 인구는 4만 명 남짓이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의 항구 기능을 정비하고, 대대적으로 간척사업을 벌이고, 운하를 파서 세계적인 항구로 발전시켰다. 이에 힘입어 인구도 급격히 불어나 1620년에 10만, 1670년에 20만 명의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된다. 그 무렵 암스테르담 인구의 11%가 유대인이었다.

◇청어 산업 호황이 조선업 발전을 이끌다

1차 이주 때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해 몰려온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에 정착하면서 스페인 천일염을 수입해 소금 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한자 상인들을 몰아내고 자연스레 청어 산업과 조선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표준화와 분업화’로 청어잡이가 호황을 누리다 보니 고기잡이 배가 많이 필요했다. 이는 조선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또 조선업이 발전하다 보니 화물선 제작 능력이 좋아졌다. 네덜란드 산업은 이처럼 수산업에서 시작하여 배를 건조하는 조선업과 해운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발트해 무역이 네덜란드 무역의 어머니

조선업이 발달하니 목재업이 호황을 누렸다. 100톤이 넘는 청어잡이 배를 대량 건조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목재가 필요했다. 선박용 목재는 땔감용 나무보다 재질이 우수해야 했다. 대형 선박 한 척 건조하는데 약 2,000그루의 참나무가 필요했다. 6만 평 숲에서 100년 동안 키워야 확보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런데 저지대는 소금기가 남아 있어 큰 나무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 라인강을 이용해 강 주변의 독일 내륙 숲에서 자른 통나무들로 뗏목을 만들어 암스테르담까지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유대 무역상들은 삼림이 풍부한 스칸디나비아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배 밑바닥이 평편한 배로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수심이 낮고 물살이 빠른 ‘외레순 해협’을 지나는 경로를 개척해 발트해 무역을 주도하게 된다. 이후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통나무를 대량 수입해 목재 제재소와 조선소를 확장했다. 1497년부터 1503년 사이에 발트해를 드나들면서 통관세를 지불한 선박의 70%가 네덜란드 배였으며 그중 78%가 유대인이 많이 사는 홀란트 주의 배들이었다.

어업과 무역의 성장은 더욱 조선업 발전을 촉진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목재 수입을 위해 빈 배로 발트해까지 갈 수는 없어 배에 뭐라도 실어야 했다. 그들은 소금과 절임 청어 그리고 플랑드르 모직물, 프랑스 포도주, 독일 아마와 맥주 등을 발트해 지역에 수출하고 목재와 곡물 그리고 조선업에 필요한 자재들을 수입했다. 이 중 일부를 자체 소비하고 나머지를 서유럽과 지중해 도시에 내다 팔고, 돌아오는 길에 정제되지 않은 소금과 기타 제조업 제품들을 수입하는 중계무역을 발전시켰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청어 절임에 필요한 질 좋은 소금을 추출하는 정제업이 크게 발전했다.

발트해 무역의 백미는 곡물 중계무역이었다. 16세기에 유럽 인구가 크게 늘어나 식량이 모자랐다. 1500년경 8,100만 명이었던 인구가 1600년경에 1억 400만 명으로 28%나 늘어났다. 식량 생산성이 낮았던 근세에 인구가 크게 느니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지중해 도시들이 기근에 허덕였다. 네덜란드 무역상들이 당시 유럽 최대의 곡창 폴란드에서 수입한 식량은 중계무역을 통해 지중해 지역에 비싸게 수출했다. 특히 1550~1650년까지 폴란드 곡물은 서유럽인과 지중해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식량이었다. 결국 네덜란드의 발트해 무역이 지중해까지 삼켜버린 셈이다. 네덜란드 무역선은 지중해 곳곳에 진출했다.

◇앤트워프 반란과 네덜란드 독립전쟁

16세기 중반까지 네덜란드의 약진은 놀라웠다. 하지만 이는 스페인 제국의 향신료 중계무역을 독점한 앤트워프의 성장에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그 무렵 앤트워프가 유럽 무역의 중심이었으며 암스테르담은 앤트워프의 외항 역할에 불과했다. 단적인 예로, 1543~1545년 암스테르담은 저지대 수출의 4%에 불과했고 앤트워프는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1567년 앤트워프 용병 반란으로 시민 7천 명이 학살당하면서 유대 무역상들이 대거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오면서 두 도시의 상황은 역전을 맞이하게 된다. 앤트워프의 무역 네트워크가 고스란히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진 결과였다. 앤트워프 학살 사건을 계기로 1568년 스페인 지배를 거부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 곧 ‘8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유럽 곳곳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자본을 끌어들여 전쟁 채권시장을 발전시켰다.

◇유대인, 동방 상품의 유통과 설탕 산업으로 부를 일구다

네덜란드는 청어 산업 호황과 더불어 한자 상인을 물리치고 이렇게 북유럽과 발트해의 무역 주도권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 덕분에 베네치아로부터 포르투갈 그리로 앤트워프로 이어졌던 동방 상품의 유럽 유통권을 인계받았다. 이후 본격적인 네덜란드 시대가 전개된다.

16세기 앤트워프 설탕 정제소. /위키피디아

그 무렵 소금도 비쌌지만 그 보다 더 비싼 것이 설탕이었다. 유대인이 떠난 앤트워프의 설탕 정제산업도 1585년 이후 자연스럽게 암스테르담으로 넘어왔다. 암스테르담이 앤트워프를 대신하여 브라질, 카나리아 제도 등지에서 온 원당의 집산지가 되었다. 당시로선 설탕 산업이 가장 돈 많이 버는 첨단산업이었다. 이로써 암스테르담이 당대 최대의 상업 도시가 된다. 나중에는 중상층까지 값비싼 설탕을 애호하자 암스테르담 시정부는 1602년 ‘사치품 사용 제한령’을 내려 설탕의 국내 소비를 막았다.

◇해상무역 증대와 비례해 커지는 상선들

네덜란드의 해상무역이 증대하자 상선의 크기도 커졌다. 그 과정을 보자. 13세기 삼각돛을 활용해 맞바람을 이겨내는 ‘자이빙’이라는 기술이 개발되자 종래 인간 근육의 힘으로 노를 저어 움직이던 갤리선은 그 역사를 마감하고 범선에 자리를 내주었다. 1450년경 역풍에 유리한 삼각돛과 순풍에 유리한 사각범의 장점을 혼용해 강한 계절풍을 타고 큰 바다를 항해하는데 적합한 캐랙선이 등장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배가 바로 캐랙선이다. 그 뒤 해상무역이 증대하자 상선의 크기도 커졌다. 캐랙선의 크기는 점차 늘어나 15세기 400톤 정도였던 것이 16세기에는 1,000톤 이상이 되었다.

갤리온선. /위키피디아

이후 해적의 출몰이 잦아지자 16세기에 등장한 군선이 갤리온선이다. 캐랙선과 갤리온선은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으나 갤리온선은 처음부터 군용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배로서 적을 제압하기 위해 크게 만들었다. 16세기 말엽의 갤리온선은 크기가 더 커졌다. 보통 1,000톤에서 2,000톤 규모로 거대한 몸집에 비해 길이를 늘리고 폭을 줄여, 물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옆으로 대포를 일렬로 장착하고도 속도가 빨랐다. 또한 적재 용량을 늘리기 위해 선체의 폭이 수면 부근에서 넓어지는 둥근 형태를 취하는 동시에 높이는 줄여 안정성을 향상시켰다. 빠르고 강한 갤리온선의 등장은 해상무역을 확산시켰고 많은 식민지에 유대인 커뮤니티인 디아스포라들을 탄생시켰다.

원래 유대인들은 중세 해양국가 제노바와 베네치아 때부터 선박 제조와 항해에 대한 남다른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 기술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전해져 대항해 시대를 여는 원천기술이 된다. 이후 사각돛과 삼각돛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갤리온선의 덕을 톡톡히 본 곳은 네덜란드였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유대인들 덕분에 해상무역뿐 아니라 조선업 경쟁력도 세계 최강이었다.

◇네덜란드 국가경쟁력, 대형 수송선의 대량 건조기술

대형 수송선. /위키피디아

해상무역이 급증하면서 조선업은 대형화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부터 조선업은 유대인들의 주도로 ‘경량화’와 ‘표준화’에 승부를 걸었다. 그래야 배가 가벼워 빨리 달릴 수 있고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배의 크기를 키워 화물 적재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경쟁국인 영국 배들이 중무장한 채 사람을 많이 태울 목적으로 튼튼하게 건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네덜란드 선박들은 최소의 선원으로 최대의 경제효과를 얻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게다가 조선 기술자들에 의해 조선소용 밧줄, 목재 제재용 톱과 조선소용 기중기와 같은 첨단 장비와 기계가 발명되어 근대식 조선소가 탄생했다. 이로써 네덜란드에서는 가볍고 표준화된 ‘보급품 수송함’의 대량 건조기술이 1570년에 개발되었다.

복합 도르래. /위키피디아

가장 큰 특징은 처음으로 중간 돛대(topmast)가 사용되어 수직으로 두 개의 돛을 연속 끌어내려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 돛대에 장착된 ‘복합도르래’로 인해 이전에 만들어진 배에 비해 5분의 1 정도의 인원만으로 돛 관리가 가능해졌다. 한마디로 선박의 속도는 크게 향상되었으며 관리 인원은 최소화되었다. 이는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대단한 기술이었다.

게다가 선박 기자재 ‘표준화’로 선박 건조 비용이 영국의 60%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곧 화물 유통 경쟁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화물 운송 운임을 경쟁국 대비 절반 이하로 낮출 수 있었다. 이로써 네덜란드 조선업은 당대의 최고 산업이 된다. 또한 네덜란드가 진출한 해외 항구에서도 네덜란드식 선박 기자재 표준화가 정착되어 네덜란드 선박의 수리는 해외에서도 손쉽게 처리되었다.

훗날 선박 기자재 표준화로 선박 건조를 빠르게 하기로 유명한 ‘자르담’ 조선소에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의 부국강병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100여 명의 사절단에 끼어서 목수로 일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