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이라는 이름은 원래 ‘암스텔강의 둑’이란 뜻이다. 13세기에 어민들이 암스텔강에 둑을 설치하고 정착한 데서 유래했다. 그 뒤 14세기에는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함부르크의 맥주 수출항으로 번창했다. 16세기 중엽부터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앤트워프나 브뤼헤보다 스페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다. 이는 종교적 관용을 베푼 네덜란드의 유대인 수용정책 덕분이었다. 네덜란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들하고 결혼하거나 국교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다. 이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원하는 바였다.
◇ 간척사업에 풍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다
‘수면보다 낮은 땅’이라는 뜻의 네덜란드는 전 국토의 25%가 바다보다 낮은 탓에 수시로 바닷물이 들어왔고, 비가 내릴 때마다 강물이 넘쳤다. 비가 오고 나면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사람들은 나무 신발을 신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범람하는 물과 싸우며 살아야 했기에 물을 다스리는 치수 시설이 발달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해 물을 퍼내는 풍차가 그중 하나이다.
네덜란드는 산이 거의 없고 전 국토가 평평했기 때문에 일 년 내내 북해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바람의 나라였다. 이 바람을 이용해 풍차를 돌렸다. 풍차 날개의 최대 회전속도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1분에 평균 24회 정도 회전한다. 이를 이용해 바닷가에 뚝을 쌓고 풍차로 바닷물을 빼내어 간척지를 개발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중계무역이 늘어나자 16세기 말에 암스테르담 항구 기능을 확대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른바 ‘새로운 항구도시 건설 프로젝트’였다. 이는 부채꼴 형태의 운하 체계를 이용하여 습지의 물을 빼내고, 군데군데 늪지를 매립하여 항구를 확장하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이 간척사업에 풍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 풍차 동력 활용해 목재업과 조선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다
그런데 풍차가 물 빼내는 용도 이외에도 유용한 용도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594년 네덜란드의 한 발명가는 풍차 날개의 움직임에 맞추어 수직으로 톱질을 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최초의 풍력 활용 제재소를 발명했다. 네덜란드에서 16세기 말 목재 제재소가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게 때맞추어 풍차 동력을 활용한 ‘목재 제재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풍차는 증기기관 등장 이전 좋은 동력원이었다.
덕분에 목재 제재업과 조선업에 표준화와 분업화를 도입하여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잔(Zaan) 강 유역에 600개가 넘는 풍차가 세워져 최초의 공업단지가 만들어졌다. 풍차 제재소들이 생산한 목재는 네덜란드 내부 수요뿐 아니라 여러 국가로 수출되었다. 그 뒤 풍차의 동력을 활용해 방직 등 직물업도 발전했다. 유대 무역상들은 영국과 스페인에서 양모를 들여와 직조하고 염색까지 해서 이를 유럽 전역에 팔았다. 대표적 직물업 중심지 레이덴은 17세기 유럽 최대 직물공업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풍차 동력으로 제당업, 염료가공, 제지, 도자기 제조 등 제조업과 출판, 운송, 상업 등 서비스산업까지 다양한 분야가 균형 있게 발전했다.
◇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꾼 플류트선
목재업이 발전하자 이는 즉시 조선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95년 홀란트 주 암스테르담 북부 호흔(Hoorn)의 조선소에서 갑판이 좁고 선복이 큰 형태의 배가 개발되었다. 이른바 플류트(Fluyt)선이다. 배불뚝이 배 또는 뚱보선이라 불릴 만큼 앞뒤가 둥글둥글하고 갑판은 좁고 상품 싣는 선복이 넓은 배다.
이 배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자. 16세기 중반 베네치아에 게토가 생기자 그곳에서 해상무역과 조선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게토에 갇히지 않으려고 대거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왔다. 그 뒤 목재 가격이 올라 선박 건조 비용이 상승했을 때, 베네치아는 16세기 식 표준을 고수한 반면,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기존의 갤리온선보다도 좀 더 가볍고 조종하기 쉬운 배를 개발했다. 이것이 베네치아와 네덜란드 간 조선업과 해운업의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 게다가 이탈리아와 그 인근 나라들에는 배 만들 큰 나무들이 대부분 벌채되어 희귀해졌다. 반면 네덜란드는 핀란드 등에서 배 만드는 큰 원목을 얼마든지 수입할 수 있었다. 이후 조선업과 해운업은 네덜란드의 독보적인 산업이 되었다.
영국도 이에 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네덜란드 유대인의 과감한 모험정신 앞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발트해를 지나려면 통행세를 물어야 했다. 그런데 통행세 부과 기준이 갑판의 넓이였다. 당시는 해적들의 출몰이 빈번하여 대부분 배에는 양옆으로 수많은 대포를 장착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단하고 굵은 목재를 써서 갑판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대포를 장착하지 않거나 12~15문 정도의 대포만 설치하여 무장을 최소화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값싼 나무로 화물칸을 배불뚝이로 만들고 갑판은 좁게 만들어, 제작 경비와 함께 통행세도 절감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곧 플류트선은 흘수선(waterline)에서 갑판으로 올라갈수록 선폭이 좁아졌다. 그래서 네덜란드 선박은 양옆은 통통하고 둥글지만, 갑판은 매우 좁았다.
오늘날의 컨테이너선인 셈이다. 이 배는 갑판이 좁고 긴 대신 선창이 넓어서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돛이 매우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선박이 가벼워 속도도 빨랐다. 플류트선의 설계는 초기 갤리온선의 설계와 유사해 그리 크지 않았다. 보통 플류트선 한 척의 적재 용량은 약 250t~500t에 길이는 25미터 내외였다. 게다가 배불뚝이 저중심 설계라 출발 및 정지가 쉽고 폭풍우 같은 악천후에도 잘 견뎠다.
발트해의 통관세에 대해서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플류트선이 통행료를 줄이기 위해 갑판을 좁게 개발했다는 것은 끈질긴 신화라는 이야기이다. 1562년부터 1632년까지 70년 동안 통행료 기록부에 의하면, 징수관이 선하증권을 사용하여 선박의 선적 용량 곧 배의 너비, 길이, 깊이를 평가한 다음 이에 따라 통행세를 매겼다는 것이다.
◇ 플류트선 건조비가 적게 든 이유
네덜란드 앞 바덴 갯벌은 우리 서해 갯벌과 함께 세계 5대 갯벌의 하나이다. 곧 밀물과 썰물의 차가 큰 갯벌에서는 썰물 시에도 배가 안정적으로 정박해 있으려면 밑바닥이 뾰족한 유선형의 배 곧 ‘첨저선’이 아닌 밑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라야 한다.
즉 플류트선은 용골(선박 바닥의 중앙을 받치는 길고 큰 재목)을 먼저 만들어 그 속에서 제작하는 첨저선과는 달리 배 밑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라 땅 위에서 직접 건조할 수 있어 선박 건조비가 싸게 먹혔다. 영국에 비해 60% 수준이면 족했다.
게다가 배의 크기도 마음대로 키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배의 용적이 최대치가 되도록 설계되어 적재 화물도 첨저선에 비해 두 배 이상 실을 수 있었다.
◇ 네덜란드 해상운임, 다른 나라의 1/3
이런 이점 이외에도 발트해에서 다른 나라 선박이 1번 왕복할 동안, 항해 속도가 빠른 플류트선은 2번 왕복할 수 있었다. 플류트선은 2-3개의 마스트(돛을 달기 위하여 배 바닥에 세운 기둥)에 가로돛을 달았고, 마스트 높이는 갤리온의 마스트 높이보다는 높았는데 이는 빠른 속도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돛 줄을 조작하는 복합 도르래(block and tackle)를 돛대에 최대한 많이 달아 승선 인원이 보통 9~10명으로 영국 동급선박의 30명에 비해 저렴하게 운행할 수 있었다.
플류트선은 보통 12문의 대포를 장착했는데 때로는 더 많은 화물을 운반하기 위해 대포를 떼어내어 해변에 남겨두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목숨을 담보로 화물 운송비를 1/3까지 낮추었다. 이로써 네덜란드가 세계 해운업계를 평정했다. 그런데 대포를 장착하지 않은 배는 가벼워 해적선으로부터 빨리 도망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이로써 네덜란드인은 “바다의 마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해상운송 물량이 폭증하자 이런 장점을 가진 배를 대량 건조했다. 이를 위해 조선소의 설비와 자재, 계측장비 등을 표준화했다. ‘표준화’ 또한 유대인 장기였다. 청어 산업에 이은 표준화가 조선업에서도 위력을 발했다. 이로써 배를 저렴하고 빠르게 건조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중엽에 이미 북방무역의 70%를 장악했다. 보유 상선 수도 나머지 전 유럽의 상선 수보다도 많은 1800척이나 되었다. 1602년 동인도회사 출범 이후 상선 건조는 대폭 늘어났으며 특히 1625년부터는 약 1만 명의 조선소 노동자들이 매년 400~500척의 선박을 건조해 네덜란드 상선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497년부터 1660년까지 외레순 해협을 통과한 선박이 약 40만 척이었는데 이 중 60%가 네덜란드 선박이었다. 1670년 네덜란드 상선은 총 56만8000톤의 운송량을 기록했으며 이는 유럽 전체의 절반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