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양 회사들이 수년 사이에 14개로 늘어나 지나친 경쟁이 문제가 되었다. 선단 이익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영국 등 열강과 경쟁하려면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상공업이 가장 발달한 홀란트주와 제일란트주 총독인 오라녀공 마우리츠와 네덜란드 연합 전국 회의 의장 요한 반 올덴바르네벌트가 나서서 상인들과 협상하며 회사 통합을 유도했다. 한 회사로 합치면 후추 무역 독점권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의회 역시 “외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자”며 상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당시 공화정을 표방한 네덜란드에서는 전국 회의가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전국 회의와 주 정부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대부분 상인 가문 사람이었다. 그 무렵 주요 상인 가문 200여 곳이 북부 저지대를 다스렸다.
◇1602년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 설립
그 결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탄생했다. VOC는 네덜란드어로 ‘하나로 통합된 동인도회사’라는 뜻의 이니셜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것은 영국보다 2년 늦은 1602년이었다.
그 무렵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 냈다.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6개 항구도시 무역상들과 시민들의 투자로 충당했다. 선주나 상인뿐 아니라 중산층도 아시아 무역에 투자할 수 있었다. 약 650만길더가 모였다. 당시 총 1143명이 투자했는데, 그중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81명이 투자 자본의 절반 이상을 투자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17세기 세계 최대 회사였다. 과거 중세 베네치아에서도 상인들이 합자회사 형태를 만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다른 점은 기업공개(IPO·Initial Public Offering)를 정식으로 했다는 점이다.
기업의 전반적인 경영 내용을 알리는 기업공개(IPO)와 주식회사를 통해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여러 사람에게서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이들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상상이 모태가 되어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8배가 넘는 대규모의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 일컫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유대인, 동인도회사를 장악하다
당시 투자자 81명의 반 이상이 유대인이었다. 특히 1585년 이후 앤트워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온 유대 무역상과 금융인들이 주축이었다. 동인도회사는 투자 지분이 많은 81명 가운데 일부와 기존 원양 상사(프리컴퍼니)14곳의 이사 60인으로 처음 ‘주주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다 그 수를 점점 줄여 나중에는 ‘17인 주주 위원회’로 귀결되었다. 여기서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을 내렸다.
지역별로는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자본이 57.4%를 차지하여 17인 가운데 과반수 이상을 배정받아야 했으나 다른 도시 5곳의 견제로 8인 자리만을 배정받았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회사를 좌지우지 못 하게 막은 것이다. 하지만 둘째로 많은 4인 자리를 배정받은 로테르담에도 유대인들이 있어 지분이 많은 유대인들의 발언권이 가장 셌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자금 조달자는 유대인 ‘이사크 르메르(Isaac le Maire)’이고 경영진의 대다수는 유대인이다.”
동인도회사가 주력으로 진출했던 인도네시아 유대인 공동체 서류에 있는 말이다.
◇동인도회사가 급격히 성장한 또 다른 이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급격히 성장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성장세에 따른 경영진 인센티브 제도가 법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 동인도회사 이사들은 주주로서의 수익뿐 아니라, 경영자 인센티브로 총수익의 1%을 추가로 받게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 의회는 VOC의 설립을 승인하면서 면허장에 경영진에 대한 보상 제도를 만들어 선박의 운항 횟수를 늘리도록 유도했다. 운항 횟수가 늘면 세입이 많아져 정부로서도 무역 증가와 세수 확보라는 1석2조의 효과를 얻는 셈이었다.
◇동인도회사의 특권
향후 또 나타날지 모를 출혈경쟁을 방지하려 동인도회사에 동양 무역 독점권과 식민지 개척 권한을 부여했다. 또 동양으로 떠난 배와 교신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리는 점을 고려해, 현지에서 판단해 조치할 수 있도록 ‘조약 체결 및 협상권, 식민 정착지 건설, 화폐 주조권, 사법권, 전쟁 발동권’을 주어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하게 해주었다.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는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국가가 부여하는 이러한 각종 특권에 대한 조건으로 2만5000길더를 지불했다. 의회는 이 돈을 한 푼도 유용하지 않고 다시 동인도회사에 재투자했다. 곧 의회가 동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된 셈이었다. 의회는 처음 동인도회사에 21년짜리 특허장을 발급했는데, 그 뒤 10년마다 1번씩 자산 평가를 해 투자 기간을 연장했다.
◇해적질로 동인도회사 자본금을 50% 늘리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한 것은 첫째, 상선대를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함이 호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먼 거리 항해에 필요한 중간 보급항을 지키기 위한 요새에도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무역을 금지하는 나라에 함포 위협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하는 데 필요했다. 넷째,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면 통치하는 데 군대는 필수였다.
그런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보유한 군대로 처음으로 한 일은 해적질이었다. 설립 이듬해인 1603년 2월, 그들은 말라카 해협에서 포르투갈 상선 ‘산타카타리나’호를 공격해 나포했다. 배 안에는 엄청난 화물이 실려 있었다. 포르투갈은 불법을 이유로 약탈 물품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네덜란드는 양국이 교전 상태에 있었음을 들어 거부했다.
약탈된 물품들은 경매에 부쳐졌다. 중국 비단 등 고급 직물 60톤과 청화백자 16톤 등 각종 장식품, 설탕, 향신료, 면화 등이었다. 경매에는 유럽의 부호와 귀족 그리고 상인들이 대거 참여해 대단한 호응을 보였다. 당시 포르투갈 상선이 운반하던 이 물품들은 아시아 역내 교역품이었기 때문에 유럽인이 처음 보는 상품이 많았다. 도자기는 동일한 무게의 은 가격 이상의 고가에 낙찰되었다. 나포선에서 약탈한 재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본금을 50%나 불렸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박들은 포르투갈 선박 나포에 혈안이 되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의 해상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동양의 도자기가 유럽인들의 식사 문화를 바꾸다
그때까지 유럽에서 생산하는 도기 그릇들은 저온에서 만들어져 강도가 약했을 뿐 아니라 표면에 바른 유약도 뜨거운 물에 닿으면 녹아내리기 일쑤였다. 이후 중국 도자기는 유럽인의 최고 기호품이 되어 유럽 귀족과 부호들의 생활 방식을 바꾼다. 곧 유럽인들이 쇠 그릇 등에 음식을 담아 손으로 먹던 야만적 방식에서 도자기 식기를 갖추고 품위 있는 식사를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럽 왕족과 귀족들은 중국 도자기를 경쟁적으로 수집해 궁전이나 집을 장식했다. 오늘날 유럽 궁전에 가면 도자기 방이 있는 이유다.
당시 중국 고급 도자기 가격이 계속 치솟았다. 흑인 노예 7명 또는 중산층 주택 한 채를 살 수 있는 가격에도 거래되었다. 유럽에선 중국 도자기가 단순한 식기가 아니라 부유함과 교양의 척도가 되었다. 유럽 내 도자기 열풍의 영향으로 17~18세기 유럽에선 바로크·로코코 양식에 중국풍 예술이 결합한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미술 사조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조선 도자기 수입 위해 코레아호를 만들다
그 무렵 유럽은 700~800도에서 굽는 토기와 800~1000도에서 굽는 도기까지는 생산할 수 있었지만 1300도 이상으로 열을 끌어올리는 가마를 만드는 기술은 없어 자기는 생산하지 못했다. 당시 1300도가 넘는 고온의 가마를 만들어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이 유일했다. 도자기 재료인 고령토 또한 구하기 힘들어 한동안 동양 도자기에 의존해야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년에 10만점 넘는 중국 도자기를 수입했다. 이후 중국이 해금령을 내려 도자기 수출이 중단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의 자기를 직수입하려고 ‘코레아’라는 상선을 건조했으나 일본의 결사반대로 조선 자기 수입은 불발되었다.
대신 일본이 임진왜란 때 납치한 조선 도공들이 1616년 아리타 자기를 개발하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를 대량 수입해 일본은 큰 부를 쌓는다. 70년 동안 아리타 자기 700만점이 유럽으로 팔려 나갔고, 찻잔 받침과 찻주전자를 만든 것은 아리타 자기가 처음으로, 유럽 귀족들의 차 문화가 아리타 자기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까지 도자기 2천만점이 수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