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회사 설립을 위해 준비했던 자금을 그대로 투입해 꾸민 선단을 아시아로 보내는 데 썼다. 이 선단은 성공리에 귀환하여 265%의 이익을 냈다. 첫 번째 항해는 이전과 같은 ‘모험 사업’ 방식을 택했다. 투자자들은 1회 출항을 위해 자금을 투자했고, 배가 귀환하자 정산 과정을 거쳐서 모임을 해산했다.
그런데 다음 항해부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업을 조직했다. 일회성 항해가 아닌 여러 항해의 장기적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배당금 개념의 주식을 도입했다. 투자자들이 투자한 금액을 1항차 이후 곧바로 찾지 못하고 10년 후 정산하기로 했다. 따라서 자본이 보존되므로 회사가 해체되지 않고 항구적으로 존립하게 된 것이다. 10년 단위로 1612년과 1622년에 각각 정산하기로 했다. 그것도 10년을 다 기다린 다음에 배당하는 것이 아니고 5% 이익이 날 때마다 배당하는 것으로 규정을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낯선 제도였다. 이처럼 초기 동인도회사의 제도는 이전 방식과 새로운 방식이 혼재해 있었다. 그럼에도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라고 할 만한 새로운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대항해시대] 91쪽, 주경철)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영구 자본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컸음을 의미한다. 또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경영과 투자가 분리된 분업 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주식회사는 많은 주주에게서 출자받기 때문에 위험이 분산되는 효과가 있어 그만큼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향신료 무역으로 얻은 이익 대부분을 해외 무역 네트워크 건설과 해외 무역관 설립에 재투자했다.
◇정향과 육두구 향신료를 독점해 가격을 대폭 올리다
당시 수입 향신료는 후추, 정향(clove), 육두구(nutmeg)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향(丁香)나무는 분홍 꽃이 피는데, 꽃이 피기 직전에 따서 말린 꽃봉오리가 못[丁]을 닮았다고 해서 정향이라 불렸다. 이를 그대로 또는 가루 형태로 파는데,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특징이다. 육두구(肉荳蔲)는 ‘사향 냄새가 나는 호두’라는 뜻으로 씨를 말려 가루 낸 향신료이다. 정향이나 후추보다 향이 자극적이지 않지만 묘하게 고급스러운 향미가 있다. 육두구는 씨앗을 감싼 붉은 껍질 역시 향신료로 사용한다. 이를 따로 메이스(mace)라고 부르는데, 처음 서구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오히려 육두구보다 인기가 많았다.
후추는 자바섬 이외에 말레이반도, 인도 등에서 생산되었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인도네시아 몰루카 열도에서만 자랐다. 네덜란드 모험 상인들이 일찍이 1599년 포르투갈 상인들을 몰아내고 몰루카 향신료를 독점하게 되자 가격을 3배 이상 올렸다. 이로써 정향과 육두구는 후추보다 10배 정도 비싸졌다. 이 고급 향신료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독점한 것이다. 초창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교역품 절반 이상이 향신료였다.
◇향신료 시장을 독점하다
유대인들의 사업 특징 중 하나가 유통의 독점화이다. 이윤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향신료 시장을 독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영구 기지를 아시아에 세울 필요가 있었다. 1606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믈라카의 포르투갈 기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동쪽의 향신료 재배지인 몰루카 열도와 자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 무렵 마닐라에 진출한 스페인 세력은 1606년 몰루카 열도의 테르나테섬을 공격했다. 당시 테르나테섬의 술탄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도움을 요청하자 군대를 파견해 보호해주었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몰루카 열도의 반다 제도를 장악하고 아시아 교역의 교두보로 삼았다. 반다 제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육두구가 자라는 섬이었다. 유대인들은 반다 제도의 육두구와 북부 인접 지역의 정향을 3200㎞ 떨어진 믈라카로 운반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무역의 세계사] 350쪽, 윌리엄 번스타인)
이후 161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9척의 전함을 이끌고 자바를 점령해 도시 이름을 네덜란드 도시 이름인 ‘바타비아’로 바꾸고 본부를 이주시켰다. 바타비아가 지금의 자카르타이다. 그리고 원거리 항해 중간 거점인 페르시아, 스리랑카, 믈라카에 상관(무역관)을 세우고, 일본 나가사키(데지마), 타이완, 중국 광저우로 무역관 설립을 넓혀나갔다. 특히 일본에서는 은과 구리가 많이 나서 네덜란드의 무역 적자 상당 부분을 해소해 주었다. 그 무렵 동인도회사가 보급항으로 건설한 아프리카 남단의 무역관은 인도양 항로를 보호하기 위해 케이프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이후에 이 식민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출항 자금 모금 위해 주식을 발행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설립 뒤에도 선박들을 출항시킬 막대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주식을 발행했다. 여기에 누구나 투자할 수 있었다. 일반 평민과 외국인도 투자할 수 있었다. 주 정부도 주주로 참여하여 회사의 신뢰도를 높여 주었다. 이미 상인들이 귀족과 영주들로부터 조세권을 사들여 도시의 자치권을 확보한 상태여서 모든 시민도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상인들과 정부가 주도적으로 투자에 나섰으며, 일반 시민들까지 너도나도 주식에 투자했다. 현재 가치로 4억 6000만달러에 해당하는 거대 자금이 모였다.
이렇게 당초 주식투자란 유럽인들이 멀리 아시아로 교역을 떠나면서 자금을 모으기 위해 등장한 제도이다. 머나먼 미지의 세계인 동양으로 떠나는 데 필요한 자본이 선주나 선장에게 있을 리 없었다. 그 때문에 항해 경비를 조달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주식투자의 시초가 되었다. 이때 돈을 투자한 사람들은 몇 년을 기다려 상선이 돌아와야 비로소 투자한 돈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배가 돌아오기 전에 개별적인 사정으로 이 투자 지분을 환불받으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동인도회사는 1605년 주식의 환불은 안 되며 필요한 경우 주식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라고 발표했다.
그러자 주식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양도의 기회를 주기 위해 부둣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몇몇 브로커가 중개 기능을 맡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주식시장의 효시이다. 그러자 동인도회사 주식이 최초의 증권투자 대상이 되었다. 손바뀜도 활발했다. 실제로 1607년 무렵 동인도회사 주식 1/3의 주인이 바뀌었다. 이때 내부 정보에 밝은 기존 유대인 대주주들이 이 주식들을 대거 사들여 지분을 늘렸다.
이렇듯 주식 투자는 동양의 진귀한 후추와 보물을 위험한 항해를 통해 배에 싣고 와서 물자가 귀한 서양에 팔아 막대한 부를 얻는 데서 출발했다. 항해 중의 태풍과 각종 질병, 해적선의 약탈 등을 극복하고 귀항에 성공하면 엄청난 부가 보장되었다. 주주에게는 고율의 현금과 채권이 배당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후추와 계피가 배분되기도 했다. 그러지 못하고 해적선에 약탈당하거나 파선된 경우에는 투자한 돈을 한 푼도 건질 수 없었다.
◇유대인 네트워크 무역을 활용하여 동인도회사 지분율을 높여가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온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중상주의 물결에 힘입어 해외 유대인 공동체 디아스포라들과 무역 네트워크를 만들어 해상무역을 활성화했다. 그들이 살았던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에는 많은 개종 유대인(콘베르소)들이 남아 있었고, 유럽 각국과 북아프리카·오스만제국·인도·신대륙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공동체들이 퍼져 있었다. 각 지역에 퍼져 동일한 언어와 동일한 종교, 동일한 전통 등 민족적 동질성을 공유하면서 상업과 금융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은 무역 경쟁력 면에서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월등한 비교우위를 갖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 사회의 문맹률이 98% 이상이었을 때 유대인 남자들은 모두 의무교육을 받아 글을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상업과 무역, 대부업은 글을 알고 정보를 교환해야 수행할 수 있는 분야였다. 게다가 그들의 경전 ‘탈무드’는 멀리 떨어진 디아스포라 간 유대 상인들을 규율하는 상법과 국제법 역할을 하여 신뢰와 신용이 필요한 먼 거리 교역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여기에 무역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을 주식 형태로 거래할 수 있게 된 것은 유대인에게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이를테면, 암스테르담 유대인이 프랑스 향신료 유대 상인으로부터 상품 주문을 받으면, 그는 인도의 유대 상인에게 현지 시세 정보를 입수하는 한편, 다른 도시 유대 상인들로부터 상품 일부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투자받거나, 암스테르담에서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해당 거래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민족 상인들의 신용 확인이 어려웠던 당시 환경에서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유대 상인들 간의 네트워크는 엄청난 경제적 자산이었다. 유대인이 디아스포라 간 거래에서 신용을 잃는다는 것은 공동체로부터 퇴출을 의미했으며 이는 곧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세계 각지의 유대인 네트워크는 신용을 토대로 무역과 금융 네트워크가 빠르게 형성되었고 증권화 덕분에 유대인 네트워크 간 무역 효용성은 더욱 빛을 발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이점을 토대로 동인도회사 지분율을 빠르게 높여갔다.
◇중상주의와 금융 시스템으로 성공한 네덜란드
1600년대 들어 모든 교역은 네덜란드로 통했다. 네덜란드는 국토가 포르투갈보다 작고 인구는 150만명 남짓으로 약간 더 많았으나 최초로 세계 무역 체계를 갖춘 나라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독립전쟁 중이었다. 유대인들은 독립전쟁 자금 지원을 위해 막대한 전쟁 채권을 사들여, 채권시장의 유동성이 풍부해짐으로써 시중 금리를 낮추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경제 사학자들에 의하면, 1600년경 네덜란드의 1인당 GDP는 오늘날 가치로 $2175인 반면 영국 $1440, 스페인 $1370, 포르투갈 $1175였다고 한다. 이는 중상주의와 식민지 경쟁이 시작된 이래 네덜란드와 여타국의 상업적 격차와 금융 시스템 차이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신용 좋은 채무자 이자율이 10%인 데 비해 네덜란드는 4%에 불과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이보다 더 싼 이자율로 자금을 융통했다. 반면 영국 왕실은 채무 이행을 거부하기 일쑤여서 채권자들은 왕실에 일반인들보다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는 실정이었다. ([무역의 세계사] 345쪽, 윌리엄 번스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