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콥 제독. /위키피디아

1607년 무렵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거의 40년 동안 독립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양국은 지쳐갔다. 1588년 칼레 해전과 1602년 도버해협에서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전쟁은 교착 상태에 접어들었다. 오랜 전쟁으로 스페인은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였다. 양국의 휴전 논의가 시작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네덜란드는 휴전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승리가 필요했다. 네덜란드 지도자들은 이 임무를 ‘야콥 반 힘스커스’ 제독에게 맡겼다. 야콥(야곱) 제독은 원래는 유능한 선장이자 탐험가이자 상인이었다.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유대인으로 추정된다.

야콥이 바렌츠와 함께 북극 탐험 경로를 협의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야콥 선장은 1596년 바렌츠와 함께 북극 항로를 개척하다 바렌츠해의 곰 섬을 발견한 뒤 유빙에 갇혔다가 생환한 인물로 당시 네덜란드 국민들의 영웅이었다. 그가 발견한 북극의 곰 섬 주변은 뜻밖에도 고래 무리가 번성한 바다였다. 이후 바렌츠해의 곰 섬은 네덜란드 포경산업의 전초기지로 이어져 오랫동안 네덜란드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 뒤 그는 1598년 아시아로 가는 항해를 지휘하여 인도네시아 여러 섬에 교역소를 세웠다. 당시 아시아 왕복 항해에 정확히 2년 걸렸다. 그러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장이 되어 1603년 상선단 3척을 지휘하여 아시아로 향하다 싱가포르 동부 해안에서 1,500톤급 포르투갈 대형상선 산타 카타리나호를 나포하여 동인도회사 자본금 확충에 크게 기여했다.

야콥은 나중에 해군 제독으로 근무하며 중국과 ‘네덜란드 동인도령’(인도네시아)으로 항해하는 동인도회사 상선단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 그에게 네덜란드 지도자들은 스페인 무적함대의 명줄을 끊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분수령, 1607년 지브롤터 해전

1607년 지브롤터 해전, 암스테르담미술관. /위키피디아

당시까지 스페인과 네덜란드 해전은 도버해협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네덜란드는 수세적 입장에서 싸웠다. 하지만 야콥은 작전을 바꾸어 이번에는 무적함대의 본거지를 초토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이끄는 26척의 함대가 1607년 4월 25일 스페인의 최남단 지브롤터 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스페인의 안 마당까지 치고 들어간 것이다. 이들은 지브롤터 만에 정박하고 있던 24척의 스페인 함대를 공격했다. 스페인 함대는 500톤 규모의 유선형 첨저선인데 비해 네덜란드 함선은 200~300톤 규모로 경량화한 날렵한 전함으로 배 밑바닥이 비교적 평편한 평저선이었다. 네덜란드 앞 바다는 드넓은 바덴 갯벌이 펼쳐져 있어 평저선이라야 했다. 네덜란드 함선은 스페인 함선에 비해 크기는 작았으나 기동성과 빠른 물살에서 회전력이 뛰어났다.

지브롤터 해협. /위키피디아

지브롤터 해협은 폭이 14㎞에 불과하고, 지중해의 증발량이 많아, 대서양에서 지중해 쪽으로 강물처럼 흐르는 해류가 특징이다. 고대 지중해 사람들은 지중해의 유일한 관문인 지브롤터 해협을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이라 부르며 세상의 끝이라 생각했다.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그 물살을 거스르고 열린 바다로 나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야콥 제독 기념 메달. /위키피디아

이렇게 물살이 빠른 지브롤터 해협에서 양국은 4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네덜란드 함대는 스페인 함대 대부분을 격멸하고 스페인 해군 4000명을 수장시켰다. 율돌목의 빠른 물살을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명랑해전을 연상시키는 해전이었다. 네덜란드 해군은 100명 미만의 사상자에 불과해 완벽한 승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야콥 제독은 이 전투를 지휘하던 중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결국 이 해전에서 치명상을 입은 스페인 왕실은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607년 11월에 국가 파산을 선언하게 된다.

◇스페인과 12년간 휴전, 사실상 독립국으로 인정받고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가

이 전투에서 네덜란드가 승리하면서 재해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해외 곳곳에서 부딪히는 양국 간의 갈등에서 네덜란드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로써 양국은 12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해외 개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 협정으로 네덜란드는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네덜란드는 휴전 기간에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며 식민제국을 세웠고, 암스테르담은 국제적인 상업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스페인령 플랑드르 지역 곧 지금의 벨기에에서는 개신교가, 북부 저지대 곧 지금의 네덜란드에선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 휴전 기간에 플랑드르 개신교 신자는 네덜란드로, 북부 저지대 가톨릭 신자는 플랑드르 지역으로 대거 이동했다.

◇유대인, 대규모 자본 조달 위해 증권거래소를 설립하다

암스테르담의 증권거래소. /위키피디아

설립 후 10년 동안 동인도회사는 이익금을 선박 건조와 아시아 거점 확보 등에 투자하느라 전혀 배당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인도 항로는 워낙 장거리 항로인데다 위험 요소도 많아 막대한 선투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사세를 확장할 투자금은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이때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또다시 획기적인 발상을 하게 된다. 동인도회사의 주식이 거래가 잘 되자 새로운 주식을 발행하여 대규모의 자본을 끌어들일 구상을 했다. 그러려면 주식 거래를 길거리 카페에 맡겨둘 게 아니라 아예 본격적인 주식거래를 위해 ‘상설’ 증권거래소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원래 증권거래소의 모태는 중세 유럽의 견본시에서 유대인들 간에 지불명령서․환어음 등의 신용이 거래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했던 개념이다. 이로써 이 주식을 거래할 근대적 의미의 증권거래소인 ‘암스테르담 보르스’(Amsterdam Bourse)가 1608년에 설립되었다. 본격적인 자본주의의 자금 조달시장이 선을 보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가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최초 증권거래소의 거래 방식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를 쓴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로데베이크 페트람에 따르면, 최초의 증권거래소는 현재 주식 제도와는 몇 가지 면에서 달랐다.

첫째,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에서는 주식증권이란 개념이 없었다. 주주들의 이름과 지분을 기록한 장부가 있었을 뿐이다. 주식의 소유권을 이전할 때도 종이로 된 증서를 주고받은 게 아니라 회계담당자가 보유하고 있는 장부를 고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증권이라는 종이 형태의 물건이 나타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둘째, 주식회사의 초창기에는 주주가 회사의 주인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동인도회사의 어떤 주주도 경영권을 요구하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주주는 몇 년에 한 번씩 배당금을 받는 투자자에 불과했다. 주주가 회사의 주인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이다.

셋째, 초기 주식투자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현물이 아닌 선물, 곧 파생상품 거래가 주를 이루었다. 흔히 파생상품 거래는 현대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일찍이 선물, 옵션, 공매도와 같은 복잡한 금융기법의 거래들이 최초의 증권거래소 시절부터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거래를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전문 투자자는 물론 소량의 주식을 모아 거래가 가능한 규모로 만들어 사고파는 시장조성자(마켓메이커)도 등장했다.

넷째, 증권 거래는 법이 아니라 상인들 간의 신뢰에 기초해 이루어졌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현물을 담보로 하지 않는 선물 거래는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상인들은 현물 없이 자신들의 신용을 바탕으로 선물 거래를 계속했다.”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15~16쪽, 로데베이크 페트람 저, 조진서 옮김)

윗글은 이 책을 번역한 조진서씨가 ‘책 소개글’에서 쓴 내용이다. 이러한 거래 형태는 ‘계약의 민족’이라 불리는 유대 상인들 사이에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계약의 민족답게 상업적 계약도 목숨 바쳐 지켰다. 이를 어길 경우, 그들은 공동체에서 축출되었다. 또 그들이 이슬람 사회와 중세 유럽에서 오랜 기간 발전시켜온 금융기법들이 축적되어 있었기에 네덜란드 증권거래소가 설립 초기부터 파생상품 거래를 활발히 중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