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투자자가 줄을 이었다. 이익을 내지 못했음에도 증권거래소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신대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미래의 부를 보고 주가는 올랐다. 영국인과 프랑스인 등 외국인들도 투자했다. 유럽의 자금이 네덜란드로 모여들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투자 자금이 몰려 들어오자 아시아로 운행하는 배는 50척이나 되었다. 이 배들이 10년 뒤부터는 진귀한 향신료, 도자기, 비단 등을 가득 싣고 암스테르담 항으로 돌아오곤 했다. 동인도회사는 이를 팔아 엄청난 이익을 올렸다. 1620년 동인도회사는 주주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 유대인의 재능과 상술 그리고 현지 유대인 커뮤니티를 통한 정보력이 다른 경쟁국들을 압도한 결과였다. 암스테르담에는 신흥 부자의 수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당시 이 도시의 1인당 소득은 유럽 최고였다. 이러한 역동적인 시장은 모든 방면에 영향을 끼쳐 경제는 물론 문화 예술 활동도 활발해졌다. 심지어 투기도 활발해졌다. 튤립 투기가 그 대표적 예이다.

◇투기적 모험의 주식시장이 해상무역을 빠르게 키워내다

이렇듯 주식투자는 큰 위험과 엄청난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는 투기적 모험에서 출발했다. 투기가 위험을 이겨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든 것이다. 이렇게 증권투자의 역사는 네덜란드의 해상무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세계 경제사에 한 획을 긋는 대규모 발전에는 늘 많은 위험 부담이 따랐다. 은행의 대출만으로는 그렇게 빠른 발전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위험 부담이 너무 커 대출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업가 또한 리스크가 큰 사업에서 거액의 빚을 지기를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주식투자자들이 부푼 기대감으로 많은 돈을 투자했기 때문에 투기적 모험의 주식시장이 해상무역을 급속도로 키워냈다. 자본주의는 이렇듯 리스크 감수를 속성으로 태동했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는 사전을 보면, 투자는 이익을 얻기 위해 어떤 사업에 자본을 대거나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으로 정의된다. 반면 투기는 기회를 틈타 큰 이익을 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투자와 투기를 무 자르듯 구분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투기를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인 효율적 시장론자들은 투기가 기업에게 자본을 공급하고,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경제성장과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촉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샤프는 “1990년대 미국인들이 주식시장의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경제가 다이내믹한 성장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연준의 그린스펀 역시 “위험을 감수하려는 태도가 자유시장경제의 성장 원동력이다”라는 데 동의했다. 이들의 위험 감수론은 21세기 들어 금융위기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하지만 위험 감수를 불사하는 투기가 경제사에서 결과론적으로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례는 많았다.

◇주식회사의 유래

사실 인류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는 기원전 2세기경 로마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마는 국가기능 가운데 조세 징수에서 신전 건립까지 상당 부분을 ‘퍼블리카니’(Publicani)라는 조직에 대행시켰다. 퍼블리카니는 단순히 징수업무를 대행한 것이 아니라 조세를 징수하여 이윤을 남기는 사업자로, 로마 의회에서 입찰을 통해 조세징수권을 부여받았으며 수시로 재무제표를 공개해야 했다.

퍼블리카니는 현재의 주식회사처럼 ‘파르테스’(partes)라는 주식을 발행했으며 이를 통해 소유권이 다수에게 분산된 개념의 법인체였다. 주식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당대의 부자들로 구성된 대주주 임원들 몫(socii)과 일반인들로 구성된 소액주주 몫(particules)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개인 간 양도가 가능하여 가격이 형성되고 투자의 대상이 되었다. 임원들이 조직의 업무를 수행했으며 주주총회도 정기적으로 열었다. 키케로는 자신의 기록에 ‘고가주’라는 단어를 쓰면서 “부실한 퍼블리카니의 주식을 사는 것은 보수적인 사람이면 피하는 도박과 같다.”고 말했다. 이를 주식회사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증권거래소의 유래

13세기 중반 이탈리아 도시국가 시대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채권 발행과 유통시장이 등장했다. 이후 14~15세기 플로렌스, 피사, 베로나, 제노바까지 확산되어, 도시국가 중심으로 채권과 주식이 발행되어 중세 상업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이후 15세기 독일 라이프치히 장외시장에서 광산 주식이 거래되었다.

토머스 그레셤 경. /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의 원형은 앤트워프 거래소였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던 앤트워프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주식과 채권이 거래되었었다. 이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을 남긴 토머스 그레셤 당시 네덜란드 주재 영국 대사가 앤트워프 거래소를 유심히 관찰했다. 부유한 포목상 겸 무역 상인이며 런던 시장을 지낸 리처드 그레셤 경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니면서 삼촌 밑에서 무역업을 배웠다. 그레셤은 젊은 시절부터 가업인 왕실 자금관리까지 맡았다.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재무관이었던 그는 유대인들이 주도하던 앤트워프의 금융시장에 관심이 많았다. 앤트워프에서 주식과 채권이 활발하게 매매되는 광경을 지켜본 그레셤은 귀국 후 개인 돈으로 1565년 런던에 증권거래소를 세웠다. 이렇게 외교관이자 무역상, 왕실 재산관리인으로 일하며 영국 최고 갑부로 올라선 그레셤이 만든 거래소의 원형은 앤트워프 거래소였다. 1571년 1월, 엘리자베스 1세가 증권거래소를 방문해 국왕의 허가증을 내려줬다. 런던 왕립증권거래소(Royal Exchange)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그럼에도 경제사에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와 증권거래소를 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의 효시로 보는 것은 이때를 기준으로 ‘자본조달 시장’으로서의 기능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나 증권거래소가 네덜란드보다 더 일찍 시작되었음에도 제대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다가, 크롬웰의 항해조례 이후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영국으로 건너가서야 활성화되었다.

◇유료 정보지가 발간 되다

17세기 당시 활발했던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내부 모습.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증권거래소는 주요 도시마다 설립되었다. 각 도시에서 실물 상품과 주식뿐 아니라 외환, 해상보험까지 거래되었다. 그 무렵 해상보험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큰돈을 번 상인들이 늙으면 직접 상거래를 하는 수고를 피해 보험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증권거래소가 설립 초기부터 자본조달 시장으로써 활발하게 운용될 수 있었던 것은 상품 가격과 무역 정보 등이 상인들에게 상세히 공개되고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유대인들이 강한 것이 정보의 수집과 교환이었다. 1585년부터 상품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가격 정보가 출판되어 판매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205개 상품 가격이 그 대상이었다. 상인들은 이 정보지를 정기 구독할 수 있었다. 정보가 워낙 귀중하여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네덜란드] 228쪽, 주경철)

게다가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끔 거래소가 운영되었다. 우선 거래소 건물 한가운데는 커다란 중정이 있고, 그 가장자리에 42개의 기둥이 건물을 받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둥에 1부터 42까지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 숫자는 각 상품을 의미했다. 소금 상인들이 모이는 기둥, 가죽 상인들이 모이는 기둥, 동인도회사 지분 거래 기둥 등으로 나누어져 있어 해당 거래를 하는 상인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리고 거래시간도 처음에는 오전에 한 시간, 오후에 1시간 반으로 제한을 두어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이도록 했다.([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171쪽, 로데베이크 페트람)

◇높은 주주 배당률, 시중금리보다 2~3배 높아

증권거래소의 활황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공로가 컸다. 그 무렵 동인도회사 주식은 선망의 대상으로 주식 붐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초기 10년 재투자하느라 배당을 안했음에도 주가는 올랐다. 그만큼 미래 가치가 컸기 때문이다. 동인도회사는 1610년 4월 첫 배당을 시행했다. 각 주주에게 명목 지분가치의 약 75%에 해당하는 메이스가 현물로 지급됐다. 주주들은 오래 기다려온 배당을 환영했다.([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95쪽, 로데베이크 페트람)

이때부터 현물 또는 현금 배당을 시작한 동인도회사는 이익 대부분을 주주들에게 환원시켰다. 1632년의 경우, 주주 배당률을 12.5%로 정하면서 주주 만족도를 높였다. 이는 당시 채권 수익률이나 동인도회사의 차입 이자율보다 2~3배 이상 높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수익률이 좋아지자 주가는 뛰기 시작했다. 1633년 6월 186이었던 주가가 10년 후인 1964년 3월엔 470까지 올랐다. 250% 이상의 상승률이었다.([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179쪽, 로데베이크 페트람)

이후 동인도회사의 흑자 폭이 커지자 덩달아 배당률도 더 높아졌다. 1650년까지 총배당금은 원 투자금의 8배 곧 800%에 달했고, 연수익률은 27%나 되었다. 동인도회사의 총운영 기간 중 평균 배당률은 약 16.5%였다. 같은 기간 동인도회사의 주가 역시 8배로 뛰었다. 그 무렵은 인플레이션이 거의 없던 시기로 배당률 800%와 순수한 주가 차익 800%의 수익은 대단한 것이었다.

◇동인도회사, 증자 대신 채권 발행을 택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채권. /위키피디아

이렇게 동인도회사의 주가가 꾸준히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금이 필요한 경우 증자를 하지 않고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기 때문이다. 곧 주식 수를 희석시키지 않았다. 놀랍게도 동인도회사 운영기간 동안 자본금에 본질적인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주가를 항상 높게 떠받칠 수 있었다. 기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동인도회사에 대한 자기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증권거래소가 생긴 이후에도 네덜란드 경제는 연이어 터지는 호재들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