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후반 금괴 기근 현상으로 무역 대금이 모자라자 무역량이 급감하면서 장기간 경기 불황이 지속되어 유럽 전역에서 은행 파산이 늘어났다. 당시 일반 상거래에는 주로 은괴가 쓰였고 무역 거래에는 금괴가 사용되었다.

오만가지 불량 주화가 난무하다

게다가 16세기 중엽 네덜란드는 발트해, 북해, 지중해 등과 연결되는 교통과 통상요충지에 위치하여 유럽 화물의 집산지 역할을 하면서 경제가 발달하고 교역이 급증하자 거래되는 돈의 유통량이 많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무렵 저지대 각 주에서 유통되던 다양한 통화가 상인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당시 북부 저지대에는 오늘날 조폐국 격인 서로 다른 주조업체만 14개였다. 그리고 외국 주화도 많이 유통되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에 흘러 들어온 각종 유럽의 주화들은 800~1000종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유럽의 각 왕실별, 공국별로 발행하는 주화의 무게도 함량도 제각각이었다. 한마디로 백가쟁명식 주화가 난무했다.

특히 저질 주화와 위조 화폐의 범람이 큰 문제였다. 금화의 주변을 살짝 깎아내는 클리핑(clipping)과 금화를 가죽 부대에 넣고 마구 비벼대어 금가루를 얻는 땀내기(sweating)를 통해 금을 얻어내려는 시도가 기승을 부렸다. 게다가 네덜란드 지역에서 환전업자와 은행과 비슷한 역할을 하던 민간 금융업자와 금 세공인들은 주화 변조를 묵인하고 주조차익을 나누어 가지는 등 주화 유통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 같은 화폐 시스템의 혼란은 국제금융 중심지로서 암스테르담의 지위에 심각한 위협 요인으로 작용했다.

암스테르담 은행의 설립 초기 모습/위키피디아

◇ 암스테르담 은행의 설립, ‘은행화폐’의 개념을 도입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암스테르담시 의회는 상인들을 보호할 필요를 느꼈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표준 통화를 만들어 교환가치를 통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독립전쟁 중으로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한 채권시장 등 금융시장은 효율적인 통화 제도를 필요로 했다. 이로써 공공 기능을 가진 ‘공적’ 은행이라는 기관이 설립된다. 국책은행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당연히 민간 기업으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시의회가 지급보증을 했을 뿐 아니라 여러 규정을 통해 지급결제업무에서 독점권을 갖는 등 암스테르담 은행의 영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이로써 증권거래소가 설립된 이듬해인 1609년 시의회의 지급보증과 지급결제 업무에 독점권을 갖는 암스테르담 은행이 탄생했다. 당시 은행들의 파산이 빈번했는데 암스테르담 시의회의 지급보증이야말로 암스테르담 은행이 공신력 있는 세계 일류 은행으로 빠르게 발전하는 데 일등 공신이었다.

게다가 암스테르담 은행에서는 계좌를 가진 상인으로부터 금은을 예치 받고 이를 근거로 계좌 주인이 금은을 주고받지 않고도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계좌이체 방식의 결제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른바 ‘은행화폐’라는 개념으로 오늘날의 수표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이는 거래에 있어서 효율성뿐 아니라 도둑과 화재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에 은행은 더욱 빠르게 발전했다.

사실 이러한 계좌이체 방식 은행업의 효시는 12~13세기 무렵 이탈리아 주요 상업 도시에서 활동하던 환전업자들이다. 그들은 주화를 예치 받고 계좌이체 방식의 지급결제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당시 환전업자 또는 초기 은행은 계좌를 보유한 예금주들에게 장부상 소유권 이전(book transfer) 방식으로 지급결제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주화를 이용하지 않고도 효율적인 대금결제가 가능해졌다. 이후 1587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유대인이 세운 리알토 은행이 이러한 지급결제 서비스를 제공하여 프랑스 상파뉴 정기시장과 이슬람권과 무역하던 유대 무역상들을 지원했다.

◇ 암스테르담 은행, 국제금융거래를 장악하다

피렌체 금화 플로린/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 은행이 그들과 다른 점은, 600플로린(길더) 이상의 거래는 반드시 은행화폐를 통해 거래하도록 하는 의무 규정이 도입되면서, 대규모 상인들은 반드시 암스테르담 은행에 계좌를 개설해야만 했다. 이는 암스테르담 은행의 발달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참고로 길더라는 이름의 유래는 신성로마제국이 발행한 금화로 피렌체에서 최초로 발행된 플로린(Florin)을 말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길더는 플로린과 동의어로 통용되었다.

지급결제 업무에 독점권을 갖는 암스테르담 은행은 상인들이 암스테르담 은행화폐로만 예금 계좌를 개설토록 함으로써 화폐가 신뢰를 얻고, 난해한 환전으로 인한 비효율을 제거했다. 사실 근대적 은행업 출현 이전부터 만성적인 주화 부족과 주화 결제의 번거로움 등을 피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대부분의 상거래는 신용거래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발행된 약속어음과 제3자 채무승계를 통한 상계 결제가 가능한 환어음이 지급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암스테르담 은행에 의해 통화가 표준화되자 환어음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주화의 적정 여부나 함량 검사 등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상인들끼리 거래할 때는 실물 주화의 거래 없이도 서로 계좌 간 결제를 통해 쉽게 거래할 수 있었다. 이는 수표와 자동이체 시스템 등 오늘날 당연시되는 제도의 선구자인 셈이었다. 이로써 금융이 선진화되었고 국제화되었다. 이 배경에는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넘어오면서 그들의 금융기법도 같이 따라온 영향도 컸다.

은행이 처음 생긴 곳은 11세기 이탈리아였으나 금융업에서 중요한 개척자 역할을 한 곳이 암스테르담 은행이라는 점에서는 모든 역사가의 의견이 일치한다. 베네치아 은행을 본떠 만든 암스테르담 은행은 이후 독일 등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본보기 은행이 되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나중에 영란은행의 모델이 되고 이는 훗날 미국 연방은행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 암스테르담 은행이 성공한 이유, 수수료 없이 주화를 만들어주다

가게 안의 금세공인/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암스테르담 은행이 성공한 이유의 하나는 고객들이 가져온 금괴와 은괴를 수수료 없이 전액 동등한 무게의 길더 주화로 바꾸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무렵 일반인들은 은괴를 잘라내어 주화 대신 지불하거나, 국영 주조기관이나 금세공인에게 은괴를 가져가 주화로 주조해 사용했다. 그들은 은괴를 은화로 주조를 해주는 대신 비용을 챙겼다. 예를 들어 10킬로그램짜리 은괴를 갖다주면 9.5 킬로그램을 은화로 만들어 주고 0.5 킬로그램은 수수료로 그들이 갖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은괴를 수수료 없이 양질의 은화로 바꾸어 주다 보니 네덜란드 인근의 거의 모든 은괴와 금괴들이 암스테르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고객들은 일부만 주화로 바꾸어 가고 나머지는 은행화폐로 받아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써보니 무거운 주화보다 은행화폐가 훨씬 편했다. 그 뒤에는 보유하고 있는 주화도 가져 와 은행에 맡기고 편리한 은행화폐로 바꾸어 갔다. 이렇게 해서 은행화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 근대 최초의 기축통화 탄생

그 뒤부터 암스테르담 은행은 당시 화폐인 경화 예금자들에게 무게를 재고 함량을 분석해 그에 따라 ‘은행화폐’를 지급해 경화의 예금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해 주었다. 이로써 신뢰가 쌓이자 은행화폐가 경화에 비해 오히려 프리미엄을 누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함량이 부족한 악화의 폐습을 종결시켰다. 아담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암스테르담 은행의 성공 사례를 극찬했다.

암스테르담 시의회는 1621년 민간 금융업자들을 허가하면서 이들이 예금을 수취하며 받은 주화를 24시간 내 암스테르담 은행에 예치할 의무를 부여했디. 이후 암스테르담 은행으로 물밀듯이 밀려드는 유입 자금은 특히 30년 전쟁 기간 중인 163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전쟁 중에 무겁고 위험한 경화를 갖고 다니는 것보다는 은행권이 안전하고 편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돈을 은행에 맡기면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관 수수료를 물어야 했음에도 예금은 날로 늘어갔다.

이후 네덜란드가 세계 무역과 금융에서 패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서구 최초로 은행화폐를 대량 유통시켰기 때문이다. 이로써 길더가 근대 최초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 신용창조의 시작

암스테르담 은행은 초기에는 예금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암스테르담시와 동인도회사에만 대출해 주었다. 초기 은행들은 대출을 본업이 아닌 예금수취와 지급결제의 부수 업무로 취급했다. 그 뒤 한참 후에 일반인 대출로도 확대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돈을 맡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빌리기도 했다.

이렇게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해주는 과정에서 대출로 이자 수입이 생겼다. 게다가 예금으로 받은 주화는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도 화폐라는 ‘신용’이 창조되었다. 이리하여 화폐 창조는 매우 이윤이 높은 업무가 되었다. 이후 로테르담 등 네덜란드 다른 도시들과 독일로 은행이 급격히 퍼져나갔다. 이 무렵 대부분 은행들은 유대인이 주도했다.

◇ 주식시장의 신용거래 시작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 전역에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들어섰다. 느슨한 연방구조 아래 독립된 8개 주마다 은행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행은 동인도회사 주식을 담보로 대출해 주기 시작했다. 이로써 은행과 주식시장의 신용 공급의 유대 관계가 맺어졌다. 그다음 단계로는 거래 실적과 능력을 지켜보고 선별된 사람들에게 주식을 신용 구매할 수 있도록 은행이 담보 없이 신용만 믿고 대출해 주었다. 주식시장 신용거래의 시작이었다.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 그리고 은행, 이 세 곳을 축으로 새로운 경제 형태가 등장했다. 그 뒤 은행에서는 “신용거래”의 개념을 처음 도입하여, 신용도에 따라 이자율을 달리 적용했다. 그 결과 신용 있는 사람이나 회사들이 저리로 대출받을 수 있었다.

◇ 저금리가 대규모의 투자와 무역을 가능케 하다

그 무렵 네덜란드 금리가 경쟁국의 반에도 미치지 않았다. 금융산업의 발전은 네덜란드의 경쟁력을 한층 더 높여줬다. 이런 저금리 자금은 영국 등 다른 나라의 상인들에 비해 유리하게 작용하여 대규모의 투자와 무역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신용이 좋은 사람이래야 이자율이 연10%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자금이 많다 보니 4%면 족했다. 결국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외환 거래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후 자본 조달시장인 주식시장에 몰려드는 자금과 채권시장의 저금리 대출을 활용해 해외시장 개척과 해외투자에 나서 세계적인 무역 네트워크를 완성할 수 있었다.

◇ 시뇨리지 효과

은행은 외환 관리와 환어음 결제 기능을 맡았다. 암스테르담시는 600 플로린이 넘는 환어음의 지불은 반드시 은행을 통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암스테르담 은행은 환은행으로 알려졌다. 은행은 나중에 예금액이 증가함에 따라 대출도 늘어남으로써 유동성이 확대되었다. 암스테르담은 외환과 금, 은 거래에서 유럽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대출받은 사람이 이 가운데 일부만 쓰고 나머지를 다시 은행에 맡겨 놓으면 이를 기초로 또 대출이 늘어났다. 이러한 신용창조로 별다른 노력 없이 그저 대출만 해주어도 이자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른바 ‘시뇨리지 효과’였다.

◇ ‘누가 화폐 발행권을 갖느냐’에 대한 치열한 암투가 시작되다

이처럼 훌륭한 돈벌이에 정부가 유혹을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고대부터 소금 등 독점적 이익이 발생하는 사업은 곧바로 국가가 독점해서 ‘전매사업’으로 운영했다. 이러한 유혹 때문에 생겨난 곳이 바로 중앙은행이다. 중앙은행은 은행권 발행 독점권 등 다양한 특권을 가지고 태어났다. 중앙은행이 경화를 획득하면 이를 국고에 보관하고 이를 담보로 지폐를 발행했다. 그리고 국가는 전쟁 등 필요시에는 증세로 재정을 맞추어 나가기보다는 금 보유 등 담보가액보다 많은 지폐를 발행하여 부족액을 메우려는 유혹이 늘 있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지폐 발행이 담보가액을 크게 웃돌았다. 이후 서구 역사는 정부와 금융권 사이의 화폐발행권을 둘러싼 치열한 암투와 대립의 길을 걷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