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년 한 해에 네덜란드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사건 4가지가 함께 발생했다. 이해에 독립 전쟁 중인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휴전협정을 맺어 유대인들이 맘 놓고 해외시장 개척에 매진할 수 있었다. 또 같은 해 네덜란드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 결과 주변국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항구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같은 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북극 항로 탐사 중에 맨해튼섬을 발견해 뉴암스테르담(뉴욕) 건설과 신대륙 진출의 계기를 잡았다. 또한 이해에 중앙은행의 모태인 암스테르담 은행이 설립되었다. 1609년은 네덜란드가 ‘주식회사, 주식거래소, 중앙은행의 모태 암스테르담 은행’ 등 자본주의의 기틀을 완성하고 해외 무역 네트워크 완성을 향한 도약을 시작한 해이다.
◇암스테르담 은행의 공개시장 조작, 궁정 유대인의 토대를 마련하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유럽 전체의 유대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암스테르담 은행에 유럽의 금괴와 은괴가 몰리다 보니 유럽 내 독보적인 자금 시장의 위상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 무렵 일반 상업 거래에는 은이 사용되고 큰돈이 오가는 무역 거래에는 금이 사용되었다. 당시 유럽의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1대12 내외였다. 곧 금 1㎏을 은 12㎏과 바꿀 수 있었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중계무역의 중심지로 무역에 쓰이는 금이 많이 유통되었다. 게다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중국에서 금을 많이 들여왔다. 중국은 1581년 ‘일조편법’ 이후 조세의 근본이 은이라 서구보다 금이 많이 저평가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암스테르담에서는 다른 유럽 도시들보다 금 유통이 많아 금이 저평가되고 은이 고평가되었다.
공적 은행 기능을 하는 암스테르담 은행은 플로린(길더)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시중의 은 가격이 너무 오르면 보유하고 있는 은을 팔아 은 가격을 안정시키고 시중 은 가격이 너무 낮으면 이를 사들여 적정한 은 가격을 유지하는 이른바 ‘공개시장 조작’을 시행하곤 했다. 이런 연유로 암스테르담 은행은 금에 비해 고평가된 은 가격 안정을 위해 때때로 은을 시중가 보다 싸게 매도했다. 여기에 참여하는 금융인들이 주로 유대인이었다. 이렇게 은을 싸게 사들이는 유럽 각국의 유대 금융인들이 궁정 유대인으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다.
◇궁정 유대인(Court Jew) 시대의 도래
더구나 당시 네덜란드는 주식시장과 독립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한 채권시장 등의 자본 시장이 발달해 시중금리가 여타국보다 현저하게 낮았다. 영국의 연이율이 10%였을 때 네덜란드는 4%면 족했다. 이러한 네덜란드의 저리의 금융 환경은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 각국 왕실과 공국은 네덜란드 유대 금융인과 줄이 닿아야 저리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각국 재무 담당 장관은 모두 유대인의 몫이 되었다. 이른바 ‘궁정 유대인’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후 유럽 각국은 유대 금융인을 궁정 유대인으로 고용하는 게 일반적 관행이 되었다. 이들은 금융뿐 아니라 각국의 유대 디아스포라 네트워크를 통해 군수품과 섬유, 곡물 등 정부 조달업자로서의 경쟁력도 높았다. 독일 지방의 경우, 궁정 유대인은 게토 밖에서 살 권리 등 사회적 보장을 얻는다. 그들 중 일부는 점차 특권을 누리며 거대한 재력을 토대로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30년 전쟁
30년 전쟁(1618~1648)은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이자 네덜란드와 스페인 왕국 간의 휴전 기간이 끝나고 재개된 독립 전쟁의 연장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는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년)를 무시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삼으려 했다.
이에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가 반발했고 주변 국가들이 개입했다. 가톨릭을 지지하는 합스부르크 측에 스페인, 헝가리가 가담하고,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반(反)합스부르크 측에 덴마크, 사보이 공국,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이 개입한 국제전이 되었다. 처음엔 종교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날이 갈수록 영토 확보 전쟁으로 변질되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북부, 보헤미아, 스위스 칸톤 등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나라들과 360여 자유도시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력은 갈수록 약해지는 반면에 제국을 구성하는 나라와 제후국들의 힘은 점점 강해지는 바람에 종교 문제로 시작된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을 유지하려는 나라들과 독립을 추구하는 나라들 사이의 싸움으로 번졌다.
전쟁은 참혹했다. 특히 독일 지역은 초토화되었다. 인구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 심한 곳은 3분의 2가 줄었다. 그리고 종교 개혁 이전에는 왕의 권력이 귀족들에 의해 지탱되었지만 이후에는 상인과 중산층에 의해 지탱되다 보니 30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국가 개념이 형성되어 종교보다는 국가에 더 충성했다. 이를 기점으로 교회보다 국가가 우위에 서게 되어 근대 국가 체제를 형성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가들은 30년 전쟁을 종교 중심의 봉건 국가에서 영토 중심의 근대 국민 국가로의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
◇주보상인(酒保商人)의 존재
중세 시대의 정규군이라 할 수 있는 기사 계급이 몰락하면서, 그 무렵 남부 독일 지역 군대들은 여러 용병 부대의 연합체로 구성되었다. 상비군이 아닌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용병 부대에 전쟁을 외주 준 것이다. 그들에 지급되는 식량과 보급품 역시 외주로 해결했다. 곧 보급을 군대가 직접 챙기지 않고 대신 이를 하청 업자들에게 맡기는 형태였다. 그리하여 식량 조달은 민간 업자인 주보상인들이 맡았다. 주보상인은 식량 보급뿐 아니라 무기, 탄약, 갑옷 등 군수품과 함께 생활 잡화도 취급했다. 그리고 각종 약탈품을 싸게 매입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전쟁터는 절호의 비즈니스 장소였다.
전투가 끝나면 죽음의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에게 주점이나 도박장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요리, 세탁, 제봉, 간호를 담당할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필요시는 병사들에게 위안부까지 제공했다. 먹거리가 모자라 생존 자체가 절박했던 시절이라 위험한 전쟁터 일거리에 사람들이 몰렸다. 일종의 병참 부대인 이 주보상인들과 그들에게 딸린 일꾼과 여자, 예능인 등의 숫자는 군인 숫자와 거의 같았다고 한다. 그 규모가 커져 30년 전쟁 당시는 군대의 1.5배 규모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군대의 조직적인 병참 지급은 근대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유용원의 군사세계, 15세기 독일 군대와 란츠크네히트, 2011).
◇30년 전쟁, 유대인들에게는 도약의 기회
유대인은 새로운 상황과 기회를 활용하는 데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30년 전쟁은 프로이센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유럽 경제의 중심으로 올라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쟁 내내 대규모의 군대가 몇 년씩이나 전장에 주둔해야 했기 때문에 전장의 군대에 음식과 보급품을 공급하는 일을 대부분 유대인들이 도맡아 했다. 그들이 위험한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일하는 이유는 위험에 비례해 그만큼 이윤이 크기 때문이다.
전쟁이 길어지자 그들은 유대인 커뮤니티 간의 공급망을 만들어 식량과 식기 등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이를 위해 방앗간과 주물 공장을 세웠다. 그리고 군대를 찾아 유럽 각지를 돌아다녔다. 유대인들은 그들 디아스포라 간의 정보 수송망을 통해 유럽과 멀리 동방까지 가서 무기를 사 모아 부족한 군수 물자를 각 전장에 공급하는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 뒤 그들이 직접 무기와 화약 제조 공장을 세웠다. 이것이 근대 군수 산업의 효시이다.
유대인들은 전쟁 당사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떠올랐다. 전쟁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자 전 유럽의 유대인들이 보급품과 군수품 공급에 참여했다. 전쟁 기간 독일 지역 영주들은 군수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관리해 주고 나라의 살림도 챙겨 줄 유대인을 궁중에 채용하기 시작했다. 30년 전쟁 동안 유대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에서 다른 주민들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
◇궁정 유대인의 발흥
30년 전쟁 중에 보인 유대인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유대인들이 아주 유용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30년 전쟁이 끝난 뒤, 독일 지역 영주들은 귀족과 상류 계급에 의존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절대 주권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나라 경제가 부강해져 재정 자립을 꾀해야 귀족들의 경제력에 휘둘리지 않고 중앙 집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상주의가 추진되었고, 상업과 제조업의 장려가 국가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당시 유럽은 중세 길드 제도로 인해 너무 폐쇄적이고 봉건적이었기 때문에 경제 회생 능력을 상실했다. 네덜란드만이 구태를 벗어나 나라의 부를 증대시키고 있었다.
이 시기에 프로이센 공작이자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경제 개혁을 가로막는 길드 제도를 없애고 새롭게 경제를 개혁할 필요성을 느꼈다. ‘선제후’란 신성로마제국의 작위 중 최고 지위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투표로 선출되었는데 황제 선거권을 가진 영주가 선제후였다.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에서 교육받았던 프리드리히는 네덜란드 발전상을 직접 목격하면서 유대인의 활동상과 능력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종교적 관용과 국가 권력의 상업적 기반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브란덴부르크 공국의 경제 개혁 방법 중 하나로 유대인을 이용키로 했다. 그는 이제까지 유대인에게 가해졌던 규제를 풀고 그들에게 상권을 허용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방안이었다. 이로써 17세기 후반 독일 유대인들은 경제 재건에 공헌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빌헬름은 사무엘 오펜하이머라는 비엔나에서 추방당한 유대인을 기용하여 재정 관리를, 유대인 레이만 곰페르츠와 솔로몬 엘리아스를 기용해 대포와 화약을 조달하는 등 유대인들을 경제 재건과 군사력 강화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 유대 금융인들 도움으로 거액의 현금을 조달해서 나라 살림을 운용하는 데 남다른 경쟁력이 있었다.
이들은 재정을 맡아 군주가 경제적으로 귀족들에게 휘둘리지 않게 해주었고 상비군을 조직해 절대군주제의 발판을 만들었다. 1685년에는 프랑스에서 탄압받아 쫓겨난 위그노들을 받아들여 독일 베를린 인구가 6천명에서 2만명으로 늘어났다. 위그노 중에는 상공업자가 많아 국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독일 지역 다른 영주들도 유대인을 유능한 납세자이자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겨 주요 도시에서 받아들여졌다. 유대인들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여러 분야에 투자하며 양모, 가죽, 비단, 장식품 등의 유통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그들은 수입 식료품, 보석 거래와 같이 길드나 조합의 규정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유대인들은 제후들에게 유대 금융 조직을 활용해 상당한 재원을 마련해 주어 제후들은 도시 건설 계획을 주도했으며,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비엔나의 카를 성당과 합스부르크가의 쇤브룬 궁전이 이런 식으로 완성되었다. 유대인들은 독일 제후의 수석 장관으로 활동하면서 그들에게 정치·경제적인 권력이 집중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자신들도 혜택을 누렸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궁정 유대인과 함께 국가 기틀을 확고히 다진 덕분에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는 공국을 왕국으로 승격시켜 프로이센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그 뒤 유럽 각국의 왕과 제후들이 유대인들에게 재정을 맡기는 게 일종의 관습처럼 되었다. 이를 ‘궁정 유대인’이라 부르는데, 유럽 각국에서 약 150년 동안 성행했다. 이것이 19~20세기 초의 독일을 유럽 최강의 나라로 만든 기초였다.
궁정 유대인은 오늘날 재무 장관의 원형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군대의 보급, 왕의 재정 대리인, 조폐소의 책임자. 재원 확보, 차관 교섭, 채권 발행, 새로운 세제의 고안 등이었다. 곧 궁정 유대인은 근대적 재정 수단으로 통치자를 귀족들의 올가미에서 해방시키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30년 전쟁 뒤 신성로마제국의 200개나 되는 주요 공국과 영주들 대부분이 궁정 유대인을 거느렸다.
◇궁정 유대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책 ‘유대인의 역사’를 쓴 폴 존슨은 그의 책에서 궁정 유대인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30년 전쟁 막바지까지 궁정 유대인들은 군에 식량을 공급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전시뿐 아니라 평시에도 유용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들은 제후들에게 상당한 재원을 마련해 주어 도시 건설을 가능케 해주었으며 중상주의 정책에 돛을 달아주었다. 비엔나의 카를 성당, 합스부르크가의 쇤브룬 궁전 등이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들은 독일 공국들의 수석 장관으로 대를 이어 봉직했다. 그리고 독일계 유대인들이 스칸디나비아 왕실과 폴란드에서도 활동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도 궁정 유대인들이 요직을 맡았다. 큰 자금을 마련하고 이를 배분할 줄 알았던 유대인들은 17세기 후반 유럽을 휩쓸었던 군사적 대치 상황 곧 유럽을 공략한 오스만제국에 대한 합스부르크가의 성공적인 저항과 역공 그리고 프랑스 루이 14세의 야망을 실패로 만든 연합국 승리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특히 오스트리아 왕실의 궁정 유대인 사무엘 오펜하이머가 두 사건 모두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궁정 유대인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는데, 왕실 유대인, 궁정 중개인, 왕실 조달자, 왕실 대리인, 상공업 고문관 등으로 불렸다.
베르너 좀바르트는 그의 책 ‘유대인과 근대 자본주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근대 국가의 통치자에 대해 말할 때는 유대인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과 통치자는 손을 맞잡고 역사가들이 근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살아왔다. 그들의 관심은 일치되고 공명했다. 유대인은 근대 자본주의의 실현자이다. 통치자는 이들과 결탁하여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고 유지했다. (중략) 나는 유대인이 두각을 나타낸 국가에 대해 그 국가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물질적인 수단과 군대를 그들이 지원하고 있었던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새 국가의 토대는 군대라는 보루에 있었다.
◇유대 대상인의 2차 시기
이 과정에서 유대 무역상과 금융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과 손잡고 무역과 금융 네트워크를 완성하여 네덜란드를 세계 무역과 금융 중심지로 만들었다. 30년 전쟁과 겹치는 이 시기 곧 1621년에서 1650년 사이의 30년간이 이른바 ‘유대 대상인의 2차 시기’라 불린다. 네덜란드는 1648년 스페인에서 독립하여 군사적 위협도 사라지고, 직물과 염색 산업도 ‘30년 전쟁’의 여파로 보헤미아와 체코 등 경쟁국들의 직물 산업이 붕괴되어 독점 속에 호황을 구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