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년 유대 자본으로 대규모 운하 건설이 시작되다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에게 1609년은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난 해였다. 그들은 교역이 발달하여 기존 운하와 항구의 기능이 한계치에 다다르자 1609년 ‘도시확장계획’을 결정했다. 이후 암스테르담 서남쪽 중심지에는 3개의 새로운 운하들 ‘헤렌그라흐트(Herengracht, 귀족의 운하), 카이저르그라흐르트(Keizersgracht, 황제의 운하), 프린센그라흐트(Prinsengracht, 왕자의 운하)’가 건설되었다. 이 운하들은 도시 주위를 동심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도시의 서쪽에는 ‘요르단’(Jordaan)이라는 새로운 지역이 생겨났다. 요르단 지역 도로는 새로운 3개의 운하들과 대각선으로 교차하고 있다. 1620년대 초에 운하가 만들어졌고, 바둑판 모양의 블록들도 이때 만들어졌다. 도시확장계획은 20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다.
상인들은 새로운 동심원의 운하를 따라 위치한 반면에 운하의 물을 오염시키는 수공업자들은 외곽으로 쫓겨났다. 부유한 상인들을 위한 신도시가 건설된 셈이었다. 오늘날의 암스테르담은 이때 만들어졌다. 총길이 100㎞가 넘는 암스테르담 운하는 90개 섬과 1500여 개의 다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후 유대인들은 바닷길을 아예 내륙 깊숙이 연결키로 하고 몇 갈래의 대규모 운하 건설에 착수했다. 그들은 거의 자연적인 기존의 수운 시스템에 주요 해안 도시들을 연계한 견인통로식 운하를 건설한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에는 거대 자본이 필요했다. 당시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으로 정정이 불안했음에도 이를 유대 자본이 4~5%의 저리로 지원했다. 1610년부터 1640년 사이에 1천만 길더가 배수 프로젝트에 투자되었다. 유대인들이 동인도회사에 투자한 자금 645만 길더보다도 훨씬 더 큰돈이었다. 1618~1648년 스페인과의 30년 전쟁 중에도 공사는 강행되었다. (책 ‘부의 탄생’ 290쪽, 윌리엄 번스타인)
◇암스테르담 인구가 5만에서 20만 명으로 급격히 불어나다
네덜란드에 수로와 운하들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깔렸다. 물길은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육상 운송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 수로와 운하를 이용한 수운은 육로 운송에 비해 값이 쌀뿐 아니라 운반 기간도 단축했다. 처음에 네덜란드 운하 수송은 통행세를 징수했는데 1631년 주요 도시들이 일종의 자유무역협정을 맺어 통행세를 폐지해 운하 운송 붐이 일어나 네덜란드 경제가 급격히 발전했다. 암스테르담 인구는 1610년 5만 명에서 운하가 거의 완성된 1650년에는 20만 명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이후에도 광범위한 운하망이 건설되어 1665년에 거의 640㎞에 달하는 견인통로 식 운하가 완성되었다. 이로써 당시 유럽에서 제일 발달한 수상 교통망을 갖게 되어 네덜란드가 유럽의 새로운 상품집산지로서의 여건을 갖추었다. 현재 총연장 6800㎞의 운하를 가진 네덜란드는 지금의 중요 운하 대부분이 그때 뼈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자부심이 ‘지구는 신이 창조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이 창조했다’라는 유명한 말에 잘 담겨져 있다.
그 뒤 운하를 따라 대형선박의 운송이 가능해졌다. 그러자 대형 물류창고를 이용해 발트해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을 모아 독점 수출했다. 이어 설탕, 목재, 담배, 프랑스산 와인 등으로 교역 품목을 넓혀 나갔다. 이후에도 벌크선을 통한 각종 화물교역을 점차 증대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네덜란드는 내륙으로 통하는 수로의 길목과 북해로 통하는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중계무역과 더불어 운송업의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저지대, 토탄 채취하다 만들어져
이러한 대규모 운하 건설 이전의 수로와 운하 역시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여기에도 생존을 위해 네덜란드 사람들이 물과 싸운 역사가 있었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25% 이상이 해수면과 강의 수위보다 낮다. 네덜란드(Nether+Land)라는 이름 자체도 ‘낮은 땅’ 곧 바다보다 낮은 저지대라는 뜻이다. 그래서 네덜란드 국가가 생기기 전에는 이 지역을 보통 저지대(Low Country)라 불렀다. 그러니 실제로 저지대나 네덜란드는 의미상 같은 말이다. 해수면보다 낮은 저지대는 항상 물과 싸워야 했다.
왜 사람들이 이런 힘든 땅에 구태여 살면서 물과의 억척스러운 싸움을 계속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토탄이었다. 옛날에 연료는 무척 귀한 존재였다. 음식을 요리하고 집안 보온을 통해 겨울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나무와 석탄 그리고 토탄이 있어서 가능했다. 네덜란드의 해수면보다 낮은 땅들은 대부분 토탄을 채취하다 만들어진 땅이다. 옛날부터 네덜란드인들은 늪지 바닥에서 연료로 이용될 토탄을 얻기 위해 늪지의 땅을 깊이 파냈다. 이때 얻어진 토사로 저지대 늪지를 매립해 농토를 얻었다. 또 이때 땅을 제방으로 둘러싼 후 고인 물을 빼기 위해 배수 시설용으로 만든 운하는 이후 시민과 상인의 중요한 교통로가 됐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수로와 운하가 만들어졌다.
◇갑문을 탄생시켜 견인통로식 운하 건설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운하를 만드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뱃길로는 바다와 내륙 운하를 연결하기 힘든 곳도 많았다. 네덜란드 면적의 13%는 해수면과 1m 이상 차이가 난다. 네덜란드는 이런 핸디캡을 이겨 낼 기술을 개발했다. 1373년경 네덜란드인은 운하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적인 장치인 ‘갑문’을 탄생시켰다. 갑문을 닫고 갑실의 물을 채우거나 빼면 그 안에 있는 배는 올라가거나 내려가 수면의 높이가 서로 다른 두 수역 사이를 통과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이전에는 높이나 기울기가 서로 달라 운하 건설이 어려웠거나 불가능했던 지형에도 갑문을 설치하여 ‘견인통로식’ 운하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견인통로식’이란 배를 갑실 통로에 가두고 양옆에서 줄을 매달아 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기술은 훗날 파나마 운하 건설에 사용되었다. 놀랍게도 해수면은 지구 전체가 일정한 것은 아니다. 파나마 운하의 경우, 태평양은 대서양보다 약 30㎝ 높다. 게다가 산 중턱의 호수를 관통해야 했다. 그래서 파나마 운하도 일부 구간은 견인통로식이다. 배가 갑실에 들어가면 수위를 맞춘 후 양옆에서 대형 크레인이 선박을 끌어 준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작은 나라임에도 수로와 운하들이 서로 연결되어 그물처럼 촘촘하게 깔렸다.
◇네덜란드, 생존과 번영을 위해 물과 싸우다
토탄을 캐내고 물을 빼내면 문제도 있었다. 땅이 가라앉아 해수면 보다 낮은 저지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방을 더 높이 쌓아 올리고 물도 더 퍼내야 했다. 북부 저지대 사람들은 이렇게 자연과 끝없는 싸움을 하면서 자연스레 힘을 합치는 과정에서 ‘물관리위원회’와 같은 지역 공동체 조직들이 생겨나 공동체가 개간한 땅은 소속 개인들에게 분배되어 자기 소유의 땅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영주나 주교의 봉건제 사회 곧 수직적 사회 구조가 아닌 수평적 사회의 자유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문제는 900년대부터 진흙과 토탄으로 구성된 저지대의 지반이 꾸준히 내려앉아 유대인들이 이주해 온 1500년대부터는 아예 육지가 해수면보다 낮아졌다. 또한 라인강 등 3개의 강과 하천의 하류에 있다 보니 육지가 하천 수위보다도 낮아져 계속 제방의 높이를 올려 쌓아야 했다. 이러니 저지대 사람들은 홍수에 대한 우려를 항상 안고 살았다. 이렇게 홍수와 북해의 폭풍과 해수의 범람이 끊임없이 생존을 위협해, 살기 위해서는 물을 밖으로 밀어내고 넘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러니 수시로 땅에 스며든 물을 빼내야 하는데 그 장치가 바로 풍차였다.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풍차를 돌려 그 힘으로 물을 퍼내는 일종의 펌프 장치다. 원래 풍차는 처음에 방앗간에서 밀을 빻는 데 쓰였지만 1414년부터는 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로 사용되었다.
15세기 중반에 유럽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 증에서도 곡물 가격이 가장 많이 올랐다. 곡물 가격이 오르다 보니 곡물을 생산하는 농지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했다. 이로 인해 농지를 개간하는 토목 기술이 발전했다. 바닷가에 둑을 쌓아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다음 풍차를 이용해 둑 안의 물을 빼내 땅을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1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간척사업이 시작되었다. 농부들은 ‘바우벤크라이어’라는 새로운 풍차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풍차는 구조 전체가 아니라 꼭대기 부분만 돌아도 작동했다. 게다가 1624년에는 직렬로 작동하는 풍차가 개발되어 이전에는 30㎝ 깊이까지의 물만 퍼내던 풍차가 4.5m 깊이까지의 물을 퍼낼 수 있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풍차 이용의 절정기에 총 9천 대의 풍차가 있었다. 그리고 풍차의 동력을 여러모로 활용했다. 벨트를 연결해 방앗간이나 철공소에 필요한 동력뿐 아니라 기계톱의 가동이나, 광산에서 광석을 끌어 올리는 데도 사용했다.
이렇듯 네덜란드 사람들은 범람하는 바닷물과 강물을 막기 위해 수문과 제방을 쌓고 풍차를 만들어 물과 싸웠다. 네덜란드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물과의 싸움이었다. 이렇게 물과 싸우는 과정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은 제방 쌓는 기술, 갑문 만드는 기술, 운하를 파고 수로를 연결하여 사람과 물건을 운송하는 기술이 발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