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에서 소금, 후추, 설탕 등이 끼친 영향은 역사를 바꿀 정도로 대단했다. 이들 상품 대부분이 유대인에 의해 유통되었다는 공통점 또한 같다. 커피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커피는 원유 다음으로 물동량이 크다. 현재 커피의 연간 거래량이 750만톤(t)으로 하루 소비량은 27억잔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유럽에 선보인 초기에는 너무 비싸 일반인들은 마시기 힘들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딸의 커피 값으로 요즘 돈으로 한 해 1만5000달러(약 1982만원)를 치렀을 정도다. 커피가 경제사에 등장한 과정을 보자.
525년 에티오피아가 예멘 지방을 침략한 시기에 아프리카가 원산인 커피가 아라비아로 건너갔다고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커피라는 이름 자체가 에티오피아 커피 산지인 카파(Kaffa)라는 지역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설(說)은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졸음을 이기려 애쓸 때 가브리엘 대천사가 나타나 주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주었다는 비약이 바로 카베(혹은 카와)였다.
◇처음에는 각성제 약으로 쓰인 커피
9세기에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커피를 먹었다는 최초의 기록이 등장한다. 당시 커피는 음료로 마셨던 것이 아니라 밤 기도 시간 동안 졸음을 쫓아내는 약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커피 열매나 씨앗을 볶지 않은 상태에서 씹어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약으로 쓰인 귀한 열매인 까닭에 이슬람권은 커피 씨앗의 유출을 막았다. 아랍인들은 그들의 커피를 지키기 위해 싹이 터서 발아할 수 있는 종자의 반출은 막고, 대신 씨앗을 끓이거나 볶아서 유럽행 배에 선적했다. 이는 커피의 가공법이 발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후 커피 열매를 씹어 먹는 대신, 그 씨앗을 볶아서 그것을 갈아 마시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그 뒤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밤늦게까지 기도하며 신과 합일을 이루고자 ‘각성제’인 커피를 마셨다. 이슬람 사원에 한정되던 커피는 11세기 일반 민중에게까지 널리 애용되었다. 이렇게 커피가 마시는 음료로 발전한 곳이 아라비아 지역이다.
◇양대 종교를 대표하는 커피와 와인
커피와 와인은 인류의 역사를 이끈 쌍두마차다. 기독교 문화가 뿌리를 내린 곳 어디서나 포도농장을 볼 수 있었던 반면,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곳에는 어디서나 커피향이 가득했다. 기독교에서 와인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멋진 선물로 여겨진다. 심지어 와인은 예수의 피로 상징된다. 반면 이슬람에서는 인간을 인사불성으로 만드는 와인을 혐오했다. 이성과 절제를 추구하는 이슬람들은 정신을 맑게 해주는 커피를 애호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커피는 종교였다. 무함마드가 졸음의 고통을 이기려 애쓸 때 가브리엘 대천사가 전해 준 음료가 커피였기 때문이다.
유럽에는 12세기 십자군 전쟁 때 커피가 처음 들어왔으나 기독교도들은 커피가 이슬람교도의 음료라 하여 배척했다.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는 커피가 기호식품으로 자리 잡는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에 커피가 소개되어 1475년 세계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이렇게 커피가 기호식품으로 이슬람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된 것은 15세기 중반부터이다. 그 무렵 이슬람권을 유일하게 오갈 수 있는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이를 밀무역으로 이탈리아에 반입했다. 그 뒤 커피를 마셔본 이탈리아 사람들은 커피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주교 사제들이 교황 클레멘스 8세에게 커피를 악마의 음료로 칭하며 커피 음용을 금지시켜 달라고 탄원했다. 그러나 교황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유럽에서 커피 음용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곧 커피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아랍 지역 유대인, 커피 수출을 모카 항구 한 곳으로 제한
15세기에 이르러 커피의 수요가 늘어나자, 예멘에 사는 유대 상인들은 이를 독점 공급하기 위해 커피의 수출 항구를 모카로 한정하여 다른 지역에서의 반출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유대인들은 에티오피아 커피까지 모카로 가져와 모카에서 수출했다. 그 무렵 예멘을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반도에는 약 3만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커피 무역을 독점했다. 당시 커피는 매우 비싼 상품이었다. 그 뒤 모카의 유대인들은 17세기 말까지 무려 300년간이나 커피 무역 독점을 이어갔다. 이렇게 커피가 모카 항구만을 통해 유럽 각지로 수출되다 보니 유럽 사람들이 커피를 ‘모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커피를 담은 부대 자루에 ‘Mocha’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유대 무역상이 커피를 독점 수입하다
아랍은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황금알을 낳는’ 커피나무의 반출을 철저히 막았다. 17세기 유럽에서 커피는 비싸 아무나 마실 수 없었음에도 품귀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인기 상품이었다. 그러나 기후조건 때문에 아라비아 땅 이외에는 커피가 자라지 않았다. 그 무렵 서구의 커피의 독점 교역을 주도한 것도 유대인들로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이 예멘 유대인 공동체의 협조로 커피 교역에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만이 유일하게 이슬람 사회와 기독교 사회를 자유롭게 오가며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최초 카페는 1629년 커피가 처음 들어온 관문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선보였다. 이어 1650년 유대인 제이콥(야곱)이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옥스퍼드 대학 도시에 열었고 1652년에는 런던에 ‘파스카 로제’ 카페가 문을 열었다. 그 뒤 ‘커피하우스’는 대영제국을 지배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술을 즐긴 영국인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덕분에 카페 수가 선술집을 넘어섰다. 런던 사람들이 ‘동전 대학’(Penny Universities)이라 부르면서 카페는 싼값에 지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커피 농장 세우다
그 뒤 커피의 대량 재배에 성공한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대인들이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인도의 이슬람 승려 바바부단은 1600년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이집트에 들러 그곳 커피 농장에서 종자 몇 개를 몰래 갖고 인도로 돌아왔다. 이 씨앗을 인도 남부의 카나타가에 뿌려 농장 재배에 성공하였다. ‘인도판 문익점’이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황금알을 놓칠 리 없었다. 1616년 인도에 커피나무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동인도회사는 상인을 가장한 스파이를 인도로 밀파한다. 스파이는 인도에서 커피 원두와 묘목을 본국으로 밀반출했고, 네덜란드로 건너 온 커피 묘목은 식물원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커피는 특성상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 25도와 남위 25도 사이에서 자란다. 이를 ‘커피벨트’라 부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58년 온실 재배에 성공한 커피 묘목을 스리랑카로 가져가서 재배를 시도했다. 그러나 1670년에 커피나무는 해충에 의해 몰살당해 실패했다. 유대인들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재배 장소를 동인도회사의 아시아 본거지인 인도네시아로 옮겼다. 마침내 1696년 인도네시아 자바의 바타비아에서 해충을 이겨내는 대규모 커피 농장을 일구었다. 이렇게 커피가 최초로 대량 재배되기 시작한 곳은 남미가 아닌 아시아였다.
그 뒤 70년 동안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의 플랜테이션에서 커피를 대규모로 재배했다. 커피는 네덜란드의 가장 인기 있는 음료가 되었다. 마침내 유대인들이 커피 재배와 교역을 주도한 것이다.
1800년대 들어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농민들에게도 커피, 설탕, 인디고(藍)를 강제 경작케 하고 이를 거둬들여 유럽 시장에 팔았다. 그 수익은 1850년대 네덜란드 재정 수입의 30% 이상을 차지하여 정부는 부채를 갚고 운하와 도로를 건설하는 데 썼다. 반면 커피 재배의 특성상 땅은 7~8년이 지나면 죽은 땅이 된다. 원주민들은 당장 돈이 되는 커피 재배에만 힘을 쏟다 식량 재배를 못 해 결국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카페 문화를 선도한 프랑스
파리의 ‘카페 프로코프’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카페 레 듀 마고’에는 생텍쥐페리, 헤밍웨이, 사르트르 등 예술가들이 모여 열띤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카페 문화는 프랑스가 선도했다. 파리의 ‘카페 프로코프’는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카페 레 듀 마고’에는 생텍쥐페리, 헤밍웨이, 사르트르 등 예술가들이 모여 열띤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랑스혁명 사상과 예술혼이 카페에서 무르익었다. 1880년 무렵 파리에만 카페가 약 4만5000곳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쌌던 인도네시아 루왁 커피
여담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는 야생 사향고양이 배설물에서 걸러낸 커피다. 인도네시아의 ‘루왁’(luwak) 커피가 그것이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살고 있는 긴 꼬리 사향고양이 루왁이 커피 열매를 먹으면 껍질만 소화되고 씨앗은 배설된다. 이 씨앗을 어렵게 모아 깨끗이 닦아낸 뒤 햇볕에 말려 만든 것이 루왁 커피다. 독특한 향기와 깊고 부드러운 맛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채취 가능한 양이 매우 적다. 1년에 500~800㎏의 원두만 생산되어 ㎏당 1000달러 이상을 호가한다. 일반 소매점에서는 잔당 5~10만원을 받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향고양이를 가둬두고 사료 대신 커피 열매만 먹여서 채취한 인공 루왁 커피가 생산되어 동물애호단체가 동물 학대를 문제 삼아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제 루왁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커피가 아니다. 최근에는 코끼리 똥 커피인 ‘블랙 아이보리’가 루왁보다 더 비싸다. 더 비싼 이유는 코끼리가 커피콩만 먹어서는 영양부족으로 생존이 안되기 때문에 코끼리에게 매일 100㎏ 이상의 식량과 함께 커피콩을 추가로 먹인다. 코끼리는 하루 50㎏ 이상 배설하는데 그 배설물에서 커피콩을 인력으로 찾아내야 하기 때문에 생산량이 루왁커피 보다 훨씬 적다.
◇중남미로 퍼져 나간 커피 플랜테이션
커피 생산의 선두주자 네덜란드는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커피를 전파했다. 1715년 암스테르담 식물원의 커피 묘목을 수리남과 카리브 해의 식민지로 옮겨 심어 커피 재배에 성공했다. 수리남에서 자라던 커피는 이후 브라질로 들어갔다.
한편 콜롬비아와 브라질에 커피가 전해진 사연은 로맨틱하다. 프랑스령 기아나의 총독 부인이 화려한 꽃다발 속에 커피 묘목을 숨겨 잘생긴 스페인 연대장에게 선물함으로써 그 묘목은 콜롬비아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것이 브라질로 퍼져나갔다. 브라질과 콜롬비아로 보내진 커피는 최상의 재배 조건 위에서 잘 자라 두 나라를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주변 남미 국가에 퍼지게 되었다.
◇‘착한 가격’이 거론되는 커피
네덜란드의 커피 교역은 처음부터 국제성을 띠었다. 이른바 ‘커피 벨트’를 형성하는 커피 산출국이 주로 적도 부근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커피 소비국은 대부분 북반구에 위치한 나라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멀리 떨어진 커피 생산지와 소비지를 이어주기 위해 커피를 실은 네덜란드의 배들이 세계의 바다를 오갔다. 유대인들은 커피의 공급서부터 중간 유통과 판매에 이르기까지 독과점체제를 구축하여 엄청난 마진을 챙겼다. 시장이 오픈된 지금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개선되지 못하고 지속되고 있다.
이렇듯 커피의 중심에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네슬레를 유대인 앙리 네슬레가, 스타벅스를 유대인 하워드 슐츠가, 3세대 커피라는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인테리젠시아와 스텀프타운은 유대인 요한 아담 벤키저가 탄생시킨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선진국에서 팔리는 커피의 소비자 가격은 생산지 가격의 200배에 가깝다고 한다. 근래 들어 스타벅스 등 고급 커피 체인점들이 생긴 뒤로 더 차이가 벌어졌다. 에티오피아에서 300원에 구입한 원두 1㎏로 스타벅스는 소비자들에게 25만원 이상을 벌어들이고 있다. 이쯤 되면 엄연한 착취이다. 직거래 공정무역에 의한 커피의 ‘착한 가격’이 거론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