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가 세운 목사 양성소가 하버드 대학 되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왔던 프로테스탄트들이 미국에 도착하여 올린 기도는 탈애굽을 연상케 한다.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지만 그 배라도 주심을 감사하며, 평균 시속 2마일로 항해했으나 117일간 계속 전진할 수 있었음을 감사했다. 그러면서 비록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하였고, 폭풍으로 큰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하며 또 여자들 몇 명이 파도에 휩쓸렸지만 모두 구출됨을 감사하였다. 인디언들의 방해로 상륙할 곳을 찾지 못해 한 달 동안 바다에서 표류했지만 결국 호의적인 원주민이 사는 곳에 상륙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또한 고통스러운 3개월 반의 항해 도중 단 한 명도 돌아가자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음을 감사했다.”
그 뒤 청교도들이 후손들 종교교육을 위해 만든 목사 양성소가 바로 하버드 대학이다. 1636년에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하버드대학이 창설되었을 때 라틴어, 그리스어와 함께 히브리어를 교육했다. 실제로 식민지의 공용어를 히브리어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안까지 나온 일이 있었다. 저명한 청교도 존 코튼 목사도 모세 율법을 매사추세츠 법의 바탕이 되게 하자고 생각했다. 이러한 청교도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 헌법에는 모세 법전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게 되었다.
◇플러싱 항의 서한
뉴암스테르담의 총독 페트루스 스토이베산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로 유대인들과 퀘이커 교도들이 늘어나자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추방하려 했다. 그 무렵 퀘이커교는 17세기 영국 청교도 운동의 극좌파에 해당하는 종교로 유대교와 많은 면에서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플러싱 항의서’라고 알려진 서신을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에 보내 종교의 자유와 장사를 핍박하는 총독을 파면시킬 것을 탄원했다.
서인도회사는 곧 총독에게 서신을 보내 유대인들의 종교와 장사를 훼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스토이베산트는 결국 파면당한 다음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플러싱 항의서는 미국 최초로 종교의 자유를 탄원한 문서였다. 이를 계기로 뉴암스테르담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었다. 이렇게 미국의 종교적 자유는 유대인들이 기여한 바가 컸다.
◇유대인, 대구잡이와 비버 모피 수출에 가담하다
뉴암스테르담에 이주한 초기 유대인들은 생업으로 맨해튼 어촌에서 네덜란드에서 하던 대구 잡이와 간단한 일용잡화 행상부터 시작했다. 가장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맨해튼 앞 바다에도 대구가 있지만 가까운 매사추세츠 동남부 반도에 ‘코드곶’(Cape Cod Bay)에 더 많았다. ‘코드’(Cod)라는 단어 자체가 생선 대구를 뜻한다. 그 앞바다는 대구 산란철이 되면 말 그대로 ‘물 반, 대구 반’이었다. 지금도 그곳은 세계 4대 어장의 하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말린 대구와 절임 대구는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먹거리였다. 특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불을 지피거나 요리를 할 수 없어 그 전날 대구 튀김을 해놓았다가 먹는 것으로 유명하며, 상업적으로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서 대구와 청어잡이로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유대인들은 비버 모피 수집과 대구잡이를 위해 뉴암스테르담과 케이프 코드 연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서양 대구는 크다. 보통 1미터가 넘는 크고 못생긴 물고기 대구는 입이 커서 대구(大口)라 불린다. 대서양 대구는 무게도 보통 30Kg이 넘는 대형 고기로 살이 많아 사람들이 좋아했다. 대구는 커다란 입을 쫙 벌린 채 물속을 돌아다니며 입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삼켜 버린다. 대구는 그 큰 입만큼이나 엄청난 대식가이다. 닥치는 대로 먹는데 새우와 오징어, 청어, 꽁치 같은 맛있는 생선을 주로 먹는다. 대구 살이 맛있는 이유이다. 이런 엄청난 식욕 때문에 대구는 잡기가 쉬웠다.
먼바다의 대구가 산란철인 12월에서 3월 사이 연안으로 알을 낳으러 몰려든다. 대구가 번식기에 알을 낳고 정액을 뿌리기 시작하면 바다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대구가 너무 많아 어선들이 항해하기 힘들 정도였고, 낚시 없이도 뱃전에서 양동이를 내려 대구를 퍼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주낙으로 길이 180Cm, 무게 1백 Kg의 거대한 대구가 낚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이때 잡은 대구를 햇볕에 말려 두고두고 먹었으며 대구철이 지나면 청어나 다른 생선을 잡았다.
네덜란드 시절부터 대구 잡이와 소금 절임은 유대인들의 주특기였다. 그들에게 말린 대구는 바다의 빵으로 유대인들이 거의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었다. 특히 금식일이나 종교 절기에 육류와 누룩 든 빵을 금해 유대인들은 대구를 먹었다.
뉴암스테르담과 케이프 코드 연안 유대인들은 잡은 대구를 해변에서 말리는 동안 조개나 물고기를 잡기 위해 해안가를 찾아온 인디언들과 만나게 되고, 양측 간에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인디언들은 그들이 필요한 칼, 도끼, 솥, 술 등을 받고 그 대가로 비버 가죽을 주었다.
당시 뉴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인디언들로부터 사들인 비버 가죽을 유럽에 수출했다. 시베리아에서 잡히던 담비와 비버가 남획으로 고갈되어 북아메리카 비버가 최고 인기 상품으로 떠올랐다. 대구잡이 유대인들은 인디언들로부터 비버 가죽을 사들여 서인도회사에 비싼 값에 되팔았다. 대구잡이 어부들로서는 힘들게 조업하는 것보다 인디언과 교환하여 얻은 모피를 서인도회사에 되파는 것이 수익 면에서 훨씬 좋았다. 그래서 오로지 모피 거래에만 종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655년 영국군의 침략에 대비해 맨해튼 남부에 통나무 외벽(Wall)을 쌓기 위해 시민들로부터 모금을 했다. 그때 맨해튼에 처음 도착했던 유대인 23명 중 다섯 명이 네덜란드 은화 1천 플로린을 기부했다. 그 외벽을 쌓은 곳이 지금의 월스트리트(Wall Street)다. 무일푼이었던 유대인들이 1년 새 그런 거액을 기부할 정도였다. 그들이 얼마나 돈을 잘 벌었는지 알 수 있다.
◇펜실베이니아에 제2의 유대인 정착촌을 개척하다
유대인들은 인디언들이 갖다주는 모피가 양이 차지 않자 모피 수집을 위해 유대인들은 강을 거 슬러 올라가 인디언들이 사는 펜실베이니아로 진출했다. 1655년 초 델라웨어강 주변 인디언들과 모피 교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뉴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도착 이듬해인 1655년에 펜실베이니아에도 두 번째 유대인 정착촌이 들어섰다.
이후 모피 수집을 위해 유대인들이 인디언들이 사는 펜실베이니아로 모여들었다. 그 뒤 펜실베이니아 거주 유대인들의 생업은 대부분 모피 수집과 행상이었다. 나중에는 비버를 잡으러 유대인들이 직접 숲으로 들어갔다. 비버 가죽이 돈이 되자 너나 할 거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그 과정에 길을 내고 작은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유대인뿐 아니라 당시 북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스페인, 러시아 사람들 모두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유대인을 쫓아 펜실베이니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퀘이커 교도들이었다. 돈 많은 퀘이커 교도이자 영국 해군제독의 아들인 윌리엄 펜이 영국 왕 촬스 2세에게 돈을 빌려주고 상환금 대신 1681년 델라웨어강 강변의 땅을 하사받아 이를 개척했다. 펜실베이니아는 ‘펜의 숲이 있는 지방’이란 뜻이다.
그 뒤 펜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며 이민자들을 모집했다. 특히 퀘이커 교도들이 몰려들면서 급속하게 발전하여 1685년경에는 인구가 9천 명으로 불어났다. 그 중심지는 “형제애의 도시”라는 뜻의 필라델피아로 당시 식민지의 최대도시가 되었다. 펜실베이니아는 윌리엄 펜 덕분에 식민지 가운데 가장 먼저 번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펜 자신은 이민자들이 땅을 탐내 인디언을 몰살하는 등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그가 꿈꾸었던 이상이 실현되지 않자 실망해 1701년 영국으로 돌아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제3의 유대인 정착촌 뉴포트
이후 북동부 연안의 대구잡이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뉴욕 롱아일랜드와 가까운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에는 대구잡이 어항이 번성하여 1658년에 유대인들의 세 번째 정착촌이 생겼다. 더구나 그곳은 로저 윌리엄스 목사가 종교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해 주고 있는 곳이었다. 로드아일랜드는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로 1636년 로저 윌리엄스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
윌리엄스는 그가 신봉하는 민주주의 사상으로 인해 매사추세츠주에서 추방당하자, 로드아일랜드로 가서 정교(政敎)분리와 신앙 자유를 표방한 식민지를 세웠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1644년에 정식 인가를 받아 스스로 최초의 로드아일랜드 총독이 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했다. 이것이 유대인들아 모여든 이유였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로드아일랜드 중심 도시인 ‘뉴포트’와 ‘프로비던스’로 몰려와 정착했다.
또 다른 이유는 뉴포트가 눈에 띄는 어항으로 케이프 코드와 가까운 대구잡이 기지로 적지였기 때문이다. 소문이 나자 1658년 네덜란드로부터 많은 유대인이 뉴포트로 건너왔다. 그 뒤 남미와 포르투갈에서도 유대인들이 많이 건너와 뉴포트는 당시로서는 가장 큰 유대인 커뮤니티를 이루었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생존을 위한 이주다 보니 유대인들의 신대륙 정착 속도가 빨랐다. 그 무렵 뉴포트는 미국에서 가장 큰 유대인 커뮤니티를 이루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에서 그랬듯이 대구 처리와 소금 절임을 고도로 분업화하고 표준화했다. 그리고 철저한 품질 관리와 서비스로 전국적인 유통을 장악하여 이를 기업화했다. 네덜란드에서 그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였다. 당시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절임 대구는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였다.
이로써 유대인 부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 뒤 유대인 부자들은 높은 교육열로 대학 설립에 재정 지원을 많이 했다. 1769년에 설립된 로드아일랜드대학은 모든 학생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고, 기독교 종교행사에 유대 학생들의 강제 참여를 면제해 주었다. 유대인에게 종교의 자유와 교육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때부터 유대인 부호들의 명문대학 설립과 재정 지원은 유대인 사회에서 일종의 전통처럼 관례가 된다.
◇북동부에 조선업이 발달하다
로드아일랜드 위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영국 이민자들도 대구잡이에 뛰어들었다. 대구 덕분에 돈이 넘치고 사람이 모이면서 보스턴 같은 대도시가 생겨났다. 대구는 보스턴 항구 인근에서 햇볕에 말려진 뒤 선적되어 스페인 빌바오 항을 거쳐 유럽 내륙에 팔려나갔다.
어업이 발달하면 고기잡이배를 만들기 위한 조선업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 뉴포트 인근을 비롯한 매사추세츠 만에는 조선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위 삼림에 배 만들기 좋은 목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배의 선체 부분을 만드는 참나무(오크), 돛대용 긴 소나무, 배의 이음매를 위한 송진이 동북부 삼림에 지천이었다.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조선소도 생겨 대구잡이 어선에서부터 대형 무역선까지 만들었다. 원래 조선업도 베네치아와 네덜란드 이래로 유대인의 주특기 가운데 하나였다. 매사추세츠 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배를 직접 만들어 유럽 항구에 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연결해 해운업과 무역업의 토대를 쌓았다.
게다가 양질의 풍부하고 값싼 목재와 유대인들의 분업 및 경영합리화로 북동부지역 조선 경쟁력이 높아져 조선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식민지 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영국 선박의 1/3이 아메리카 동북부 뉴잉글랜드에서 건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