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와 유대교의 궁합

베르너 좀바르트. /위키피디아

‘근대 자본주의’를 저술한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는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들이 재산을 정리하여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암스테르담에 정착할 때 자본주의도 따라왔다”고 주장한다. 이런 좀바르트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방방곡곡에 유대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미국의 혼’이라는 부르는 것은 순수한 유대 정신에 지나지 않는다. 아메리카의 정신은 퓨리턴(청교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가면을 쓴 유대교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이며 퓨리턴은 인공적인 유대이다.” ‘반유대교’적일 만큼 과격한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크롬웰에 의한 영국의 청교도혁명 이후 영국이 서서히 유대화되었고 드디어는 대영제국의 정책, 나아가서는 세계정책에 유대인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뜻이다. 그러한 청교도 무리와 유대인들이 아메리카에 건너가 미국을 건설했다는 의미이다.

당시 유대인은 물 만난 고기였다. 그 이유는 청교도와 유대교 사이에 커다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종교들은 부를 부정하고 탐욕을 억제하라고 가르친다. 탐욕에 의한 혼란과 약탈을 방지하고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가톨릭은 돈과 부귀를 탐하지 말고 청빈하라고 가르친다. 불교는 모든 물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도록 ‘무소유’를 설파한다. 힌두교는 아예 아무것도 소유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슬람교도 물욕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처럼 종교가 한결같이 물욕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돈 버는 것을 깨끗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데 딱 두 개의 종교가 부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부는 신의 축복이라는 교리를 강조한다. 이 두 종교가 바로 유대교와 청교도이다. 칼뱅은 ‘깨끗한 부자’를 강조했고 유대교도 부자가 축복받은 사람임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지녔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는 돈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사람을 해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근심 말다툼 그리고 빈 지갑이다.’ ‘몸의 모든 부분은 마음에 의존하고, 마음은 돈지갑에 의존한다. 부는 요새이고 가난은 폐허이다’

◇뉴암스테르담, 영국의 점령으로 뉴욕으로 개칭

뉴암스테르담은 다양한 국가와 인종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특히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이는 바로 네덜란드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의 뒤를 이어 북미에 식민지를 세운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하여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게 된다. 항해조례란 영국과 영국 식민지와 교역하려면 영국 선박이거나 영국 식민지 선박으로만 상품을 운송해야 한다는 조례이다. 이는 당시 해운업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붕괴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여 네덜란드는 브라질 일부 지역에 갖고 있던 식민지를 포르투갈에 빼앗겼고, 1664년 뉴암스테르담도 영국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새 영토의 주인이 된 영국 왕 찰스 2세는 왕위계승자인 동생 요크에게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 사이에 있는 모든 땅을 선물로 주었다. 요크 공작의 소유가 된 뉴암스테르담은 곧 새 주인 요크(York) 공작을 기리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 ‘뉴욕(New York)이 되었다. 요크 공작은 뒤에 형의 뒤를 이어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된다.

뉴욕 최초의 영국 총독 리차드 니콜슨은 1665년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며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강조했다. “그 누구도 기독교 신자와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 문제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벌금을 낼 수 없다.” 영국인들이 원했던 식민개척자들은 상업적 재능과 우수한 무역망을 가진 이들이었다. 식민지에서는 과거 유럽과 달리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종교적 제약도 없었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과거에는 결코 지니지 못했던 안전의 영속성을 식민지에서 획득했다.

유대인들은 타고난 근면성과 검소함으로 청교도들보다도 더 열심히 일했다. 뉴욕의 유대인들은 대구잡이와 행상을 하는 한편 인근 매사추세츠 유대인 조선소에서 직접 배를 만든 선장들은 유럽의 유대인 커뮤니티와 손잡고 해상무역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뻗어나가는 신대륙 건설과 늘어나는 일감에 일손이 부족해지자 유대인들은 유럽에 사는 친지들을 부지런히 불러들였다. 친척이 없는 유대인들도 건너왔다. 그들 대부분의 초기 이민은 농장에서 일하기로 계약을 맺고 건너왔지만, 곧 상업과 중개업, 여관업, 그밖에 도시형 산업에 종사한다. 조가비 염주 알을 제조하는 공방도 생겨났다. 유대인다운 발상이었다.

마침내 뉴욕은 유럽에서 몰려오는 유대인들의 처음 기착지가 되었다. 이후 뉴욕은 유대인에 의해 주도되어 성장 가도를 달렸다. 한때 뉴욕 인구의 3분의 1이 유대인이었으며 뉴욕 소재 대학교 학생의 반이 유대인이었다. 오늘날의 뉴욕을 만든 이들이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곳곳에 그들의 정착촌을 이루어 나갔다. 유럽에서 이주한 어느 민족보다도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영국의 식민지 13개 주에 모두 유대인 정착촌이 건설되었다.

◇비버 사냥

1720년까지 북아메리카 동부에서 죽임을 당한 비버의 숫자는 200만마리가 넘었다. 비버 모자는 19세기 초까지 인기를 누렸는데, 이때쯤 미시시피 강 동쪽에서는 비버가 사실상 멸종되다시피 했다. 이 시기에 모피 동물 사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졌다. 18세기 말의 통계를 보면 한 해 평균 비버 26만마리, 너구리 23만마리, 여우 2만마리, 곰 2만5000마리 등을 합쳐 모두 90만마리 이상의 동물을 사냥했다. 19세기가 되면 이 수는 더욱 커져서 한 해 평균 포획 동물 수가 170만마리가 되었다.

모피동물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비버였다. 비버는 비교적 쉽게 사냥할 수 있었다. 반면 번식률이 낮기 때문에 사냥꾼들이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잡고 나면 거의 사라질 지경이 되었다. 비버를 주로 식량으로 삼았던 현지 인디언들은 비버를 멸종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로 남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럽의 모피 수요와 연결되자 한 지역에서 비버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1640년쯤 허드슨강에서 비버가 사라졌다. 그러자 사냥꾼들은 세인트로렌스강 주변 지역으로 이동해 갔다. 18세기 말에는 이 지역도 끝나자 미시시피 서쪽과 태평양 연안 지역만이 마지막 남은 비버의 서식지였다.

그 뒤 북아메리카의 모피 무역은 최후의 미개척지인 미시시피 서쪽 땅으로 옮겨갔다. 이 지역을 처음으로 탐험한 루이스와 클락은 1805년에 로키산맥을 넘어 태평양 해안으로 계속 나아가면서 이곳에 지구상 그 어느 곳보다 많은 비버와 수달이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곧 덫 사냥꾼들이 몰려와 비버와 수달을 잡기 시작했다. 이 동물들이 거의 사라진 뒤에는 더 이상 개척할 곳이 없어 값이 덜 나가는 동물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하여 사향뒤쥐와 담비 모피가 몇 년 동안 모피 무역을 지탱했다. 하지만 이 동물들마저 거의 사라졌다. 해달과 바다표범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들의 모피는 주로 북아메리카에서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18세기엔 북해의 해달과 물개가 대신 모피의 소재로 유행했고, 이후엔 검은 여우가 쓰였다. 이때부터 야생동물이 귀해지자 모피용 동물을 사육하기 시작해 은여우가 우리에 갇혀 길러졌다.

◇유대인들의 삼각무역으로 부흥한 뉴욕

뉴욕으로 건너온 유대인들은 미국이 독립하기 이전의 초기 13개 주로 골고루 퍼져 나갔다. 17세기 후반에 뉴욕이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와 교역하였던 3대 상품은 ‘모피와 노예, 밀’이었다. 밀은 허드슨강 주변에서 경작되었다. 또한 뉴욕은 서인도제도에서 당밀(糖蜜)이나 럼주를 수입하여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사는데 썼다. 당밀은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가공할 때 부수적으로 나오는 찐득한 시럽을 말하는데 이를 이용해 럼주를 만들었다. 그 외에도 미국은 영국에서 기계 장비를 수입하고 고래기름과 담배 등을 수출했다.

미국에 흑인이 처음 들어온 것은 1619년 네덜란드 국적 선박이 버지니아 식민지에 20여 명의 흑인을 내려놓으면서부터다. 미국에 흑인들이 청교도들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노예는 아니었다. 그들은 계약노동자였다. 그때에는 비슷한 처지의 백인 계약노동자가 있었다. 대부분 가난 때문에 계약을 맺고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리고 운임 대신 약 7년 동안 일을 해주고 자유를 얻었다.

정작 흑인이 노예가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흑인이 많아지면서부터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대규모 흑인들이 유입되었고, 이들이 인구의 20%를 넘어가자 통제를 위해 노예제도가 본격화되었다. 이후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농장이 급속히 확대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인의 식민지가 확장됨에 따라 흑인 노예의 수요가 급증하여 노예무역은 점점 번성했다. 특히 네덜란드 서인도회사는 브라질에 진출하여 사탕수수농장과 농장에서 일할 인력 공급을 위해 노예무역을 주도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영국령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 섬이 브라질을 대신하여 사탕수수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자 영국은 1672년에 노예무역 독점회사로 왕립 아프리카회사를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영국․ 아프리카․ 서인도를 연결하는 이른바 삼각무역을 경영하여 네덜란드를 압도했다.

당시 흑인 노예 모습. /위키피디아

노예무역에서 삼각무역의 내용을 살펴보면, 본국에서 노예를 사는 데 필요한 럼주와 총포 그리고 화약 등을 싣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이르러 흑인 노예와 바꾸었다. 그 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노예를 팔고 그 대금으로 식민지 물품과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액즙과 당밀을 사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더욱이 17세기 후반 이래 북아메리카 남부의 담배와 쌀, 곡물, 인디고 생산의 대농장에서도 흑인 노예를 사용하여 그 수요는 크게 늘었다.

당시 뉴욕항은 수출로는 농산물, 수입으로는 공업제품과 노예가 주요 상품이었는데 1690년부터 근 60년간 영국·스페인 전쟁 등 각종 전쟁으로 군수품 무역항으로 성장한다. 군수품 무역 또한 솔로몬 왕 이래로 유대인들의 주특기였다. 1690년도 북아메리카 인구는 모두 25만명 정도였으나 그 뒤 인구는 25년마다 두 배로 늘어났다.

◇좀바르트와 베버의 논쟁,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위키피디아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곧 청교도 정신의 금욕이 자본주의 정신을 잉태했다고 주장한 반면에 베르너 좀바르트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사치가 자본주의 탄생의 원동력이었다고 강조했다. 1902년 독일의 국민 경제학자 좀바르트는 ‘근대 자본주의’에서 처음으로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 활동의 특징이 영리주의와 합리주의라고 보았다. 특히 자본주의의 영리주의 측면을 강조한 좀바르트는 경제에서의 무한 추구 정신은 무한의 화폐 추구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쓴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는 청교도로부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는 ‘건전한 직업정신’과 ‘정당한 이윤추구’라는 ‘윤리적 자본주의 정신’이다. 그는 노동이 신성하다면 돈도 신성하다면서 돈은 철저하게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책임감을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윤리적 자본주의 정신이란 노동을 통해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라고 정의했다.

베버에 따르면 자본주의 정신은 탐욕과 무한한 이윤추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른바 금욕주의 정신에 충실한 자본가들은 자신의 직무를 엄격하게 수행하면서 윤리적으로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잘못된 자본주의 정신과 건전한 자본주의 정신과의 차이점을 유대교와 청교도 정신(Puritanism)의 예를 비교로 들어 설명했다. 유대교의 경제적 지향은 정치나 투기에 의존해서라도 돈을 버는 모험적 자본주의 태도다. 한마디로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베버는 이런 유대교 자본주의 행태를 천민자본주의라고 말했다. 청교도적 논리였다.

당시 좀바르트는 베버에 맞선 강력한 라이벌로 두 사람은 거의 20년에 걸쳐 논쟁을 이어갔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논점 하나는 ‘금욕이냐 사치이냐’였다. 좀바르트는 ‘사치와 자본주의’라는 책에서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 사회에서 어떻게 사치가 뿌리내리게 되는지를 다양한 수치와 문헌의 조사를 통해 추적했다. 초기에는 궁정을 중심으로 행해졌던 사치를 귀족이나 졸부들이 모방하게 되면서 이러한 사치 수요가 자본주의적인 생산과 교역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태동시켰다는 것이다.

좀바르트는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을 함께 엮어내어 ‘사치와 자본주의’를 썼다. 그는 경제학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가치판단의 문제를 담고 있는 ‘규범경제학’, 오늘날 주류 경제학이 된 수치적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실증경제학’, 그리고 인문과학적 방법론을 담는 ‘이해경제학’의 세 부류로 나누고, 이해경제학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 이해경제학을 ‘사치와 자본주의’를 쓰면서 이 책을 통해 사회·경제·역사를 아우르고, 또한 그 속에 인문학적 성찰까지도 담아내고자 했다.

좀바르트가 제시하는 명제와 베버가 제시하는 명제는 명백히 상충된다. 한쪽은 사치가 자본주의의 원인이라 하고, 다른 한쪽은 노동윤리와 검약이 자본주의 초기의 특성임을 주장한다. 이 둘의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묘하게도 학문적으로는 이러한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둘은 절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함께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잡지’를 간행하기도 했다. 마치 두 사람에게서 유대교와 청교도 관계를 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