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 /위키피디아

자본주의 역사에서 발전만 있을 뿐 퇴보나 재앙이 없었던 자본주의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에서 금융산업이 발전하면서 자본축적이 커지고 유동성이 증가하자 가장 먼저 나타난 부작용이 투기적 거래였다. 1630년대 네덜란드의 경제적 상황은 투기하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30년 전쟁으로 강력한 경쟁 산업이었던 동유럽의 직물산업이 붕괴되어 네덜란드 직물산업이 호황을 맞고 있었다. 자카르타 지역을 차지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가는 최고의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 무렵 유럽 국가 가운데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던 네덜란드 사람들은 앞다투어 교외에 대저택을 짓는 등 호황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부동산 가격도 급등했다. 요새 말로 자산소득의 환상에 빠져 있었다. 늘어난 부에 취한 네덜란드 사람들의 머리에선 검약정신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소비지향적인 국민이 되어 있었다. 풍요와 오만에 젖은 네덜란드인은 과시욕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리고 더 큰 부를 안겨줄 대상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튤립이었다. 튤립처럼 부드럽고 예쁜 꽃이 유동성 장세의 속성인 ‘붐’을 불러오고 그리고 그 투기의 끝은 ‘공황’이었다. 이 이야기는 신출내기 주식투자자는 물론 투자상담가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다. 이 꽃은 17세기 네덜란드 경제를 거의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 내막을 살펴보자.

◇아시아의 야생화 유럽을 사로잡다

튤립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의 파미르고원일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한다. 이때만 해도 튤립은 그다지 화려한 꽃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붉은 빛과 자생적으로 번져나가는 강인한 생명력 덕분에 페르시아 사람들 집 안팎에 자라고 있었던 꽃이었을 뿐이다. 이 꽃이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오스만투르크 사람들이 정원에서 키우면서부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이 꽃의 존재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

1573년 터키 술레이만에 파견된 네덜란드 대사 오기에르 부스베크가 당시 네덜란드 최고의 식물학자였던 카롤루스 크루시우스에게 튤립 한 뿌리를 선물했다. 크루시우스는 이 구근을 번식시켜 다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쓴 ‘식물도감’에 등재했다.

터키인들이 투르반이라고 부르는 이 꽃은 번식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름이 튤립으로 바뀌었다. 식물학자들은 꽃의 연약한 꽃대를 북유럽의 거친 기후에 적응하도록 강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사람들은 정원에 피어난 튤립을 보고 감탄했다. 초기 튤립은 귀족과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꽃의 색깔에 따라 튤립을 다양하게 분류했다.

몇 년이 흐르자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꽃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사실 튤립은 집에서 기르는 평범한 꽃이었으나 부자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차차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 변해 갔다.

귀족 부인들은 화장실의 타일 색과 가장 잘 어울리는 튤립을 골랐고 화려한 튤립 장식은 비싼 아라비아산 카펫의 화려함을 능가했다. 사람들은 튤립으로 장식한 마차를 타고 산책하곤 했다. 시중에선 거의 매일 튤립 축제가 열려 어느 가문의 튤립이 더 우아한지를 겨루었다. 이웃이 가지고 있지 않은 희귀한 튤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했다.

사람들이 튤립에 열광한 이유는 당시의 네덜란드 사회가 대단히 개방적이고 누구든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고귀한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는 변화가 많은 사회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일부 갑부들이 현대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부와 교양미를 과시하는 것처럼 튤립은 당시 네덜란드 사람에게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집 한 채 값의 튤립 등장

이렇듯 1600년대 초의 네덜란드는 튤립 투기의 열풍에 휩싸이고 있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진 품종 튤립을 열심히 구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튤립 가격은 점차 급등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튤립을 이용해 사회적 지위를 올리려 했다. 그러자 귀족을 닮고 싶어 했던 서민들도 이 행동을 따라 했다. 결국 신중하기로 소문난 네덜란드 사람들도 튤립 재배에 자신들의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원이 튤립으로 화려하게 장식되는 동안 가격은 더 오르기 시작했다. 자국에서 생산되는 것만으로는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웠다. 천천히 가격은 계속 올랐다. 튤립 뿌리가 거래되는 8~9월에는 값이 절정에 달했다. 계산이 빠르고 돈 있는 사람들은 튤립 뿌리 구매에 돈을 투자했다. 시장은 이제 버블 국면에 진입했다. 그때까지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서 주로 주식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이 대거 튤립 시장에 몰려들어 튤립 뿌리 가격은 폭등하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비쌌던 황제튤립 정물화. /위키피디아

1624년 일명 ‘황제튤립’은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 값인 1200플로린에 거래되었다. 1633년에는 5500플로린까지 값이 올랐다. 꽃이 만개할 때까지 무늬와 색깔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 튤립 투기의 우연성을 극대화해 주었다. 하나의 뿌리가 황제 튤립을 터트릴 수도 있었고 평범한 꽃을 피울 수도 있었다. 당시 400여종의 튤립이 개발되면서 튤립마다 황제, 총독, 영주, 대장 등 군대 계급과 비슷한 이름이 붙었다. 뿌리는 상대적으로 쉽게 재배할 수 있었다. 땅 한 뙤기만 있으면 족했다. 그리고 거래를 막을 길드도 없었다. 당시 고가주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주식에 투자할 돈이 없었던 가난한 서민들은 ‘꿩 대신 닭’이라는 말 그대로 튤립 한 뿌리에 모든 것을 걸었다.

튤립 시장은 뿌리가 채취되는 여름에 열렸다. 하지만 튤립의 인기가 올라가자 1년 내내 거래할 수 있는 매매 방법이 고안되었다. 재배 농가는 뿌리를 심은 두렁에 표시를 하고 각 뿌리마다 무게와 어떤 변종인지를 알 수 있는 번호표를 붙였다. 또 거래일지를 만들어 뿌리마다 그동안 체결된 거래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값비싼 뿌리는 쪼개어 아스(20분의 1g) 단위로 거래되었고, 평범한 뿌리들은 두렁 단위로 거래되었다. 튤립뿌리는 표준화 되었고, 네덜란드 중앙은행의 은행권이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식과 같이 취급되었다.

◇선물시장 발달이 투기 부추겨

일확천금에 눈이 멀어 뒤늦게 시장에 뛰어든 사람들은 농사꾼 등 서민들이었다. 이렇게 되자 폭발적인 튤립 재배 붐이 일어나면서 선물시장도 발달하게 되었다. 1936년 ‘바’나 ‘타베르나’라 불리는 카페와 선술집 같은 곳에서 확립된 ‘금융선물시장’은 투자자들이 튤립의 현물 가격을 다 지불할 필요가 없이 계약가격과 결제가격의 차액만을 지불하면 됐다. 이로써 투자자들은 적은 돈으로 많은 양의 튤립을 거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투자자들이 광란적 투기와 수 없는 전매가 일어났다. 대부분의 거래는 어음결제로 이루어졌고 어음의 만기는 대부분 튤립 뿌리를 캐는 이듬해 봄이었다. 투기열풍이 끝나갈 무렵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튤립 뿌리는 돌고 돌아 실체가 없는 거래가 되어 버렸다.

흥미로운 것은 ‘선물거래’의 특성상 직접 눈으로 보지도 못한 튤립을 매매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이 네덜란드 회화의 전성시대를 다시 열어주었다. 아직 피지도 않은 튤립 꽃을 매수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매도자가 화가를 통해 그 튤립의 꽃을 아름답게 그려서 보여준 것이다. 튤립 투기에 그림까지 이용되었다. 대부분의 투기꾼들은 만기에도 튤립 뿌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현물을 인도할 수가 없었고 돈조차 없어 결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튤립의 적정가격이 얼마인지를 밝히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투기꾼들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튤립을 전매하는 데 열을 올렸을 뿐이다. 1636년 12월에서 1637년 1월 한 달 사이에 수천 길더가 뛰어오르는가 하면 심지어는 1만길더를 호가했다. 살찐 황소 4마리 값이 480길더이던 시절이었다. 한 달 사이에 2600%나 뛰어오르자 사람들은 집과 땅을 팔아 튤립 알뿌리를 샀다. 현금보다는 주로 어음으로 거래되었다.

◇투기의 종말

꽃과 바보들의 수레. /위키피디아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투기의 종말이 찾아왔다. 튤립거래의 중심지였던 하를렘에는 더 이상 살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실제로 다음날 싼값에 내놓은 튤립조차 전혀 팔리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동안 튤립을 신용으로 매집해놓고 있었던 업자들은 일단 가격이 하락세로 접어들자 불과 한두 달 전에 금보다 더욱 가치 있었던 튤립이 하나의 양파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37년 2월 마침내 풍선은 터져 버렸다. 한때 8000달러를 넘던 튤립이 70달러까지 폭락했다. 그래도 양파치고는 비싼 가격이었다. 매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부도가 줄지어 발생했다. 꽃 상인들은 채권 투기꾼들에게 보유 어음을 넘겨 일부나마 회수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매매가격의 3.5%만을 지급하는 것으로 모든 채권, 채무를 정리하도록 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특단의 조치가 취해지자 튤립뿌리 수집가들이 다시 시장으로 모여들어 아주 헐값에 튤립 뿌리를 사들였다.  그리고 2~3년이 지나자 황제튤립의 값은 투기 발생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하지만 서민들이 한몫 보기 위해 투기를 벌였던 낮은 등급의 튤립 값은 이후에도 회복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튤립 투기의 실체였다.

◇렘브란트의 원숙미는 투자 실패로부터

‘빛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 /위키피디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빛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도 이때 ‘상투’를 잡았다. 재능은 물론 부귀와 명예를 함께 가지고 있던 그가 대출받아 투자한 돈을 모두 날린 것이다. 집과 미술품을 모두 경매로 넘기고 파산한 렘브란트는 평생 빚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재기해보려고 미술품 경매회사를 세웠다. 예술품을 일반 경매시장에 내놓은 최초의 사례다. 렘브란트의 경매회사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영국의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회사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원숙한 정신과 위대한 예술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회화사에서 렘브란트만큼 그림의 깊이가 심오하고 그만큼 불안과 고뇌가 깊었고 인간과 세계, 순간과 영원 사이의 관계를 파헤친 화가는 없었다. “글쎄 내가 채권자들에게 빚 독촉 받는 지금의 상황 때문인지는 몰라도 젊은 날의 야망을 꿈꾸던 내가 아니오. 외부적인 경제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의 정신적 성숙과 표현의 힘은 날로 더해지는 것 같소.” 렘브란트가 죽은 아내를 그리며 쓴 편지다.

◇투기의 원조, 7세기 당나라 모란꽃

투기의 전형으로 불리는 튤립 광풍의 원조는 놀랍게도 중국의 당나라다. 7세기 초 이세민이 천하를 통일하고 평화와 변영의 시기가 열리자 장안의 귀족들은 그들의 정원을 장식할 아름다운 모란꽃 투기에 몰입했다. 늦은 봄이면 화려한 모란꽃 경연대회가 열렸고 1등을 한 모란 가격은 집 한 채 가격을 훌쩍 뛰어넘었다. 농부들이 농사 대신 모란재배에 미쳐갔다.

경제학자인 슘페터는 새로운 산업이나 기술이 만들어낼 장래 수익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퍼지면서 과도한 자본이 집중될 때 ‘투기’가 주로 발생한다고 했다. 발전 과정상 한번은 넘어야 할 고비로 본 말이다. 투자 시장이나 혹은 투기 시장에서 비이성적 게임이 벌어지는 것은 예나제나 큰 차이가 없다. 예전 코스닥 시장의 IT(정보기술) 거품에서 보았듯이 오버슈팅된 상승장에서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려는 욕심이 앞서 믿을 수 없이 높은 가격을 지불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튤립 투기 사례는 우리가 지나간 과거의 우스개 이야기로 단순히 흘려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투기는 필연적으로 버블을 수반하고 버블의 종착역은 붕괴와 파멸이다.

하지만 투기의 심각한 후유증 속에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긍정적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골드러시는 금을 캐낸 경제효과보다 그 과정에서 도로와 도시가 생겨나고 마차, 연장 등 관련 산업과 음식·숙박업 등 서비스업이 활성화되면서 경제가 부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는 변종, 희귀종 등의 교배와 재배 기술을 화훼산업에 적용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결국 투기적 수요에 의해 기술 개발이 촉진되어 네덜란드는 이후 400년간 화훼산업의 종주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연간 700억달러 규모의 농산물을 수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100억달러 이상이 화훼 수출이다. 화훼류는 전 세계 무역에서 네덜란드가 약 60%를 차지하고 있다. 그야말로 꽃의 나라다. 튤립 투기가 남긴 공(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