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적 의미에서 보석의 출생지는 앤트워프와 암스테르담이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유대인이다. 한낱 장신구에 지나지 않았던 보석에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석을 보석답게 재탄생시켰다. 이 과정을 살펴보자.

유대인들은 항상 그들이 살던 곳에서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아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추방될 때 손쉽게 들고 갈 수 있는 재화였다. 무거운 귀금속보다는 작고 값진 재화나 보석들이 제격이었다. 유대인의 오랜 방랑과 시련이 남겨준 지혜였다. 주화는 편리하고 쓰기도 쉬웠지만 언제 어느 나라로 쫓겨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각 나라에서 사용하는 주화를 다 모으기는 힘든 실정이었다. 게다가 무겁고 강탈의 위험에 노출되기 쉬웠다. 그러나 보석이란 어느 나라에서나 통하는 만국 공통의 화폐 구실을 했다.

◇보석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유대인

유대인들이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해 전 재산을 처분하고 나올 때 한 웅큼씩 숨겨 가지고 나온 것이 보석이었다. 아예 추방령에 돈이나 금괴를 가져 나오다 걸리면 사형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보석을 이처럼 중요한 재화의 대용으로 사용하기 이전에는 보석은 그리 값이 일정하지도 않았고 귀족이나 성직자 예복의 장식품에 불과했다. 유대인들이 보석을 중요한 교환가치의 하나로 승격시키면서 보석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이로써 유대인과 보석은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이후 보석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꾸준히 개발되면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로 발전했다.

15세기 이베리아반도의 유대인들이 쫓겨나 앤트워프로 피신해 와서 제일 먼저 한 장사가 그들이 탈출할 때 몸에 숨겨 지니고 온 보석 거래였다. 이후 자리를 잡자 그들이 가장 먼저 일으킨 산업이 바로 다이아몬드 가공 및 수출산업이었다. 당시 유일한 다이아몬드 산출국이었던 인도에서 원석을 들여와 이를 가공해 수출했다. 오늘날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 앤트워프는 유럽 최대의 다이아몬드 유통지이다. 18세기 초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기까지는 인도가 유일한 산출국이었다. 중세에는 유럽에 수입되는 다이아몬드는 극소량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법률로 왕족과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도록 규제했었다.

브릴리언트 컷. /위키피디아

다이아몬드는 물질 가운데에서 가장 단단하다. 곧 경도가 가장 높아 ‘10′이다. 이는 영원불멸의 강력함과 깨지지 않는 사랑을 상징한다. 그래서 결혼반지로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이아몬드가 보석으로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17세기 말 베네치아의 유대인 페루지에 의하여 다이아몬드 컷팅 기술의 정수인 ‘브릴리언트 컷’의 연마 방법이 발명된 뒤의 일이다.

◇로스차일드 자금 투입 및 세실 로즈 드비어스 설립

본격적인 다이아몬드 생산은 1866년 남아공에서 21캐럿짜리 ‘유레카’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나서부터다. 이어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근대적 채굴법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나서야 다이아몬드는 대중화되었다. 그 뒤 남아공에 다이아몬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일찍이 영국인 세실 로즈가 로스차일드 가의 자금을 받아 1888년 ‘드비어스(De Beers)사’를 설립해 아프리카 남부를 지배했다. 드비어스란 원래 남아공 촌부인 원주민 형제의 이름이다. 평범한 농사꾼이었던 형제는 남아공의 어느 농장을 50파운드에 매입했는데 우연히 그 농장에서 키운 농작물 밑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1871년의 일이었다. 드비어스 형제는 이 뜻하지 않은 복덩어리 농장을 매입가의 무려 126배인 6300파운드에 팔았다. 더욱이 형제는 이 농장을 팔면서 농장의 명칭을 자기들의 이름인 ‘드비어스 광산’으로 영구히 붙여줄 것을 요구했다. 오늘날 다이아몬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드비어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드비어스 형제로부터 다이아몬드 농장을 사들인 사람이 유명한 세실 로즈(Cecil Rhodes)다. 로즈는 농장 밑에 묻혀있었던 엄청난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큰돈을 벌어 재력가가 되었다.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1890년 남아공 케이프주 식민지 총독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각종 정책과 법을 영국인과 드비어스사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인근 지방에 대한 무력 정복도 서슴지 않았다. 로즈는 군대를 동원해 보어 원주민들과 전쟁을 일으킨 ‘침략자’였다. 그는 아프리카 남부 일대에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가 정복한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라고 불렸다. 로즈의 땅이란 뜻이다. 이 지역이 1980년 독립한 ‘짐바브웨’다. 로즈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따 ‘로즈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비롯한 많은 영재들이 받은 ‘로즈 장학금’이 바로 로즈 재단에서 지급한 장학금이다.

◇오펜하이머, 금과 다이아몬드 함께 장악하다

세실 로즈 사후인 1916년에 어니스트 오펜하이머가 ‘앵글로아메리칸’이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지배했다. 이때부터 세계의 금 업계도 오펜하이머 일가가 움직여 왔다. 이후 독일계 유대인인 이 오펜하이머 가문이 다이아몬드 시장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1880년 유대계 담배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영국 보석상의 대리인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킴벌리에 파견되면서 다이아몬드와 인연을 맺었다. 1916년 JP모건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해 광산회사 ‘앵글로아메리카’사를 설립한 후 앙골라, 콩고, 남아공 등지로 사업을 확장해 갔다. 그러면서 꾸준히 드비어스의 주식을 사들여 1929년 마침내 드비어스의 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곧 대공황이 들이닥쳤다. 오펜하이머는 유대인답게 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다이아몬드를 헐값에 사들였다. 동시에 파산한 광산회사들을 사들여 독점을 위한 토대를 닦았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이아몬드의 공업용 수요가 급증해 사세는 더욱 커졌다. 무엇보다 런던에 자회사인 중앙판매기구(CSO)라는 신디케이트를 만들어 전 세계 다이아몬드 원석의 생산, 유통, 판매를 통제함으로써 드비어스 신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남아공에 본사를 두고 영국 런던에 판매 본사를 두었다. 오펜하이머는 킴벌리 시장과 남아공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가이도 했다. 그는 정계와 경제계를 오가며 인맥을 넓히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자체 정보기관을 운영했고, 일종의 외교 담당 부서를 두어 각국의 정권과도 직접 접촉했다. 적대적 인수합병, 주가조작, 가격 조정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사업을 키웠다. 그가 사망할 무렵 드비어스는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의 80~90%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20세기에 들어와 드비어스 카르텔이 남아공, 보츠와나, 나미비아에서의 생산과 기타 국가에서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독점 매집하면서 드비어스는 거의 100여 년간 전 세계의 다이아몬드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여 주물러왔다. 나미비아는 아프리카 남서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나라로 세계 제3위의 다이아몬드 생산국이다. 아프리카 최고 갑부인 오펜하이머 일가는 전 세계 다이아몬드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드비어스사의 최대 주주다. 그와 그가 설립한 앵글로아메리카 회사가 드비어스 주식을 각각 45%씩 가지고 있다. 드비어스는 사실상의 그의 개인회사나 진배없다.

◇다이아몬드, 공급이 자유시장에 맡겨지면 돌 값으로 폭락할 수 있어

보석산업의 특징은 생산과 유통, 판매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유통구조가 대부분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마디로 독과점 체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야 수급 조절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급을 조절할 수 있어야 고가 정책을 유지하여 마진폭을 키울 수 있다. 만약 이들 유통 조직이 갖고 있는 다이아몬드가 모두 시장에 풀리면 다이아몬드 가격은 하루아침에 돌 값으로 폭락한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석류는 상상 이상의 마진이 붙는다. 다이아몬드 원석에는 정확한 값이란 게 없다. 원석 채취 비용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드비어스의 사이트홀더들은 큰 원석을 절단도 하지 않고 그냥 한 번 살펴본 뒤 입찰에 참여한다. 도박 같은 다이아몬드 사업에 한 가지 법칙은 있다. 다이아몬드 가격은 채굴업자에서 사이트홀더와 소매업자를 거쳐 소비자까지 이르는 사이 단계별로 껑충 뛴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다이아몬드 원석은 품질과 유형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남아공에서 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원석을 채취해 채굴업자는 캐럿 당 15달러 곧 150달러 내외에 이 원석을 드비어스에게 넘겼다고 치자. 드비어스는 품질이 좋을 경우 이것에 100배의 가격을 매겨 사이트홀더에 넘긴다. 사이트홀더는 1만5천 달러를 지불한다. 원석을 깎은 뒤 외면상 생각했던 것보다 품질이 나쁘거나 모양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본전치기에 바쁘다. 하지만 이것이 운이 좋아 비교적 흠집 없는 3.5캐럿짜리 보석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면 소매업자는 이것을 7만5천 달러에 사 최종 소비자에게 12만5천 달러에 판다. 그것도 30% 폭탄 세일이라는 가격으로 말이다.

역사적으로 보석산업은 유대인이 주도하여 왔다. 15세기 말 앤트워프에서 보석산업이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유대계 신디케이트인 ‘드비어스’는 다이아몬드의 대명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다이아몬드 생산은 전 세계에 걸쳐 있지만 주로 남아공과 러시아가 주산지였다. 그러나 현재는 호주, 자이레, 카나다 등이 새로운 공급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가공 지역은 값싼 것은 저임금의 인도에서, 고급품은 주로 벨기에의 앤트워프와 뉴욕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유대인의 본거지인 이스라엘을 합하여 4대 가공지이다.

중국과 인도 시장은 현재 매우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특히 인도의 경우 다이아몬드 유통 시장을 쥐게 된 건 값싼 임금 탓이다. 1990년대 호주산 공업용 다이아몬드를 공급받아,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던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를 깎았다. 이를 통해 기술과 자본을 축적했다. 여기에 금을 좋아하던 인도 중산층이 다이아몬드로 시선을 돌린 게 추가적인 산업 성장동력이 됐다. 최근에는 인도의 유통업 진출이 눈에 띤다. 앤트워프의 다이아몬드 전문점 1500개 중 많은 상점을 인도인이 운영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뉴욕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다이아몬드 시장이 주목받고 있는 것도 인도와 같은 논리다. 중국은 지난 2000년 상하이 푸둥지구에 다이아몬드 거래소를 열어 산업을 키우기 시작했다. 중국은 최근 들어 부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선호하여 해마다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드비어스가 장악한 다이아몬드 유통업계

드비어스는 1888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을 때는 다이아몬드 시장의 90%까지 장악하기도 했다. 그 누구도 이 아성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그런 조짐이 보이면 이 ‘다이아몬드의 제왕’은 가차 없는 공격을 퍼부으며 다이아몬드 왕국의 명예를 지켜왔다. 어쩌면 드비어스의 이런 마케팅 전략은 영국의 못된 식민지 정책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의 눈물’이라고 굳게 믿었던 탄소 결정체 다이아몬드는 이제 거대한 산업이 되었다. 이 보석이 처음 사용된 것은 기원전 8세기 인도 드라비다족이었다. 그 뒤 로마 시대에는 오직 왕족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186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어 본격적인 채굴법이 도입되면서 비로소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다. 오랜 세월 ‘사랑’과 ‘헌신’으로 각인된 ‘다이아몬드’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이 업계는 모순투성이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드비어스가 전 세계 다이아몬드 공급의 80% 이상을 장악했었다. 이 회사는 가격결정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원산지를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사들여 수급을 조절했다. 창고에 엄청난 원석이 쌓여 있지만 전 세계 물량 조절을 위해 계속 사들인 것이다. 당연히 무리가 뒤따랐다.

다이아몬드 원석 거래방식도 비합리성 그 자체다. 드비어스는 다이아몬드 광석을 등급별로 분류해 가공 직전 단계의 원석을 파는 회사다. 그런데 이 거래방식이 매우 희한하다. 일 년에 딱 열 번만 이뤄지는 판매 기회는 세계적으로 150여 ‘고정 지정 고객’에게만 구매 권한이 주어진다. 이들을 ‘사이트홀더(sightholder)’라 부른다. 유대인이 주류를 이루고 다음으로 인도계가 많다. 독점이다 보니 완전히 공급자 시장이다. 지정 고객들은 다이아몬드 원석에 대한 선택권이 전혀 없다. 회사 측에서 가격과 물량을 제시하면 불만 없이 ‘현금’으로 구입해야 했다. 가격에 불만을 나타내면 다음부터 초청되지 않는다. 완전히 ‘횡폭한 셀러 마켓’인 것이다. 그럼에도 지정 고객이 못 되어 안달이었다. 마진이 큰 중간 도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정 고객이 되기 위한 물밑 경쟁은 항상 치열했다. 드비어스는 영국의 독점자본으로 출발해 남아공, 중앙아프리카, 앙골라, 보츠와나 등 과거 영국의 식민지에서 착취 형태로 발전했다. 그러면서 전 세계 150여 개의 보석 가공회사에 마치 비밀결사 조직을 방불케 하는 공급 시스템을 갖추고 가격이 내려가면 유통량을 줄이고 가격이 올라가면 유통량을 늘리는 등 가격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다이아몬드에 관한 한 절대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러시아가 변수로 등장

그런데 이런 아성과 권력에도 누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뜻하지 않게도 1991년 구소련의 해체로부터 비롯되었다. 러시아는 1954년 레나강 지류에서 처음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어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다이아몬드를 생산했다. 현재 주 생산지인 사하공화국 야크츠크에서 연간 20억달러어치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캐내고 있다. 광산이 위치한 사하공화국이 전체 생산량의 10%를, 러시아 국영기업인 알로사가 90%의 유통을 관장하고 있다. 구소련은 붕괴되기 전까지 보츠와나에 이어 세계 2위의 다이아몬드 생산국이었다. 시베리아에서 원석을 채굴하기 시작하자 당시 드비어스의 회장이었던 해리 오펜하이머가 공산당과 밀약을 맺고 전량 수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991년 공산정권이 붕괴되면서 러시아는 드비어스 외에 다른 회사에도 다이아몬드 원석을 공급했다. 즉 구소련의 절대권력 해체가 드비어스의 절대 독점을 무너뜨리는 아이러니를 불러왔다.

다이아몬드는 속성상 비즈니스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처럼 철저하게 서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 비즈니스처럼 피고용자의 입장에서는 다이아몬드 거래를 하기가 어렵다. 곧 원석이나 가공품의 가치를 판별하는 과정에서 한순간의 실수가 쉽게 수만달러에서 심지어 수십만달러까지의 이익과 손실이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이아몬드 비즈니스는 유대인의 가족 사업으로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은 드비어스를 비롯해 도소매업도 유대인들이 이끌고 있다. 비록 드비어스의 다이아몬드 영향력이 과거에 견주어 크게 위축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많은 양을 생산하고 있다.

◇강력한 라이벌 등장, 레브 레비브

비합리적인 독점거래는 언젠가는 무너지는 법이다. 캐나다, 호주, 러시아 등지에서 연달아 드비어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됐다. 캐나다는 지난 1998년부터 다이아몬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망하고 고속 성장하는 다이아몬드 원산지이다. 이 보다 드비어스의 독점체제가 도전받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강력한 라이벌 레브 레비브(Lev Leviev)의 등장이다. 최근 들어 다이아몬드 시장에서 유대인들 간의 싸움은 치열하다. 드비어스를 상대로 1990년대 말부터 급부상하고 있는 이스라엘 다이아몬드 거상 레브 레비브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유대인으로 현재 국적도 이스라엘인이다. 그는 세계 다이아몬드 원석 최대생산국인 러시아와 앙골라에서 이미 드비어스 시장을 많이 잠식했다. 그는 원래 드비어스의 ‘150명 지정 고객’ 가운데 한 명이었다. 레비브는 사이트홀더를 다루는 드비어스의 고압적 태도에 격분했다. 드비어스는 사이트홀더 (지정 고객)들에게 몇 상자의 원석을 제멋대로 정한 값에 떠넘겼다. 드비어스의 심기를 거스르면 거래는 영원히 중단됐다. 하지만 이러한 드비어스의 횡포가 계속되자 다이아몬드 가공업체 사장인 그는 드비어스의 사업 분야인 원석 개발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레비브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자랐다. 가족은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았지만 유대교를 믿었다. 남자들은 비밀 할례의식도 치뤘다. 레비브의 아버지는 성공한 직물상이었다. 그의 가족은 7년을 기다린 끝에 1971년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 재산을 100만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바꿨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건너간 가족들은 다이아몬드의 질이 낮아 20만달러밖에 안 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15세였던 레비브는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학교를 중퇴하고 다이아몬드 커팅을 배우기 시작했다. 1997년 레비브는 다이아몬드 커팅 공장을 설립했다. 당시 막 꿈틀대던 이스라엘 다이아몬드 시장의 투기 바람은 대단했다. 커팅업자 대다수는 가격이 계속 치솟으리라는 예상에 재고를 많이 확보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시장이 붕괴되자 은행들은 대출을 더 이상 연장해주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커팅업체가 파산했다. 재정 상태가 양호했던 그는 이후 5년에 걸쳐 12개 소규모 공장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원석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런던, 앤트워프, 남아공, 러시아로 뛰어다녔다.

게다가 레이저 기술과 당시 혁명적이었던 커팅 소프트웨어를 도입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냈다. 1987년 드비어스는 레비브에게 사이트홀더 자격을 부여했다. 당시 레비브는 이스라엘에서 내노라 하는 다이아몬드 세공업자로 성장해 있었다. 2년 뒤 레비브는 러시아 국영 다이아몬드 채굴 ·판매 업체 곧 현재의 ‘알로사’로부터 커팅 공장 설립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원석 생산에서 세공까지 마무리하는 최초의 합작회사 ‘루이스’(Ruis)는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거래를 인연으로 레비브는 러시아 원석 공급량의 일부를 확보하게 됐다. 드비어스가 발끈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1995년 사업에 탄력이 붙으면서 레비브는 사이트홀더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레비브는 루이스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그와 푸틴의 관계는 1992년 시작됐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이었던 푸틴은 시장이 주저하던 유대교 학교 설립을 허가했다. 레비브가 자금을 지원한 유대교 학교는 50년 만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그는 이런 인연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알게 되었다. 러시아 전 푸틴 대통령과 앙골라 산토스 대통령은 매우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앙골라 내전 당시 다이아몬드 광산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반군으로부터 12억 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밀반출시킨 드비어스에 대한 앙골라 정부의 반감이 높았다. 이것이 레비브에게는 다이아몬드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레비브는 1996년 앙골라에 6000만달러를 투자해 현지 최대 다이아몬드 광산의 지분 16%를 받아냈다. 앙골라와 콩고, 시에라리온과 같은 아프리카 중서부의 소위 ‘피 묻은 다이아몬드(Blood Diamond)’ 국가들은 향후 정치만 안정이 되면 캐나다, 러시아를 능가할 만큼의 잠재성이 무궁한 나라들이다. 다행히도 반군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최근 들어 다이아몬드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레비브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LLG(Lev Leviev Group) 그룹은 요즘 러시아, 앙골라, 나미비아, 보츠나와 등의 광산개발 주도권을 쥠으로써 드비어스 위상을 위협하고 있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용해 러시아와 이스라엘의 외교관계 강화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는 현재 그룹 홀딩사인 ‘아프리카 이스라엘 인베스트먼트’의 대주주로서 국내외 부동산개발, 미국 유통업체, 이스라엘 현지 러시아어 TV 방송국 등의 다방면에 걸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최대 비즈니스맨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이들 나라 대통령에게 환심을 사는 방법은 ‘일자리 창출과 다이아몬드 산업 부흥’이다. 그는 “원석을 캐내자마자 영국의 본부로 가져가 그곳에서 비밀리에 거래하는 드비어스의 사업방식은 원산지 국가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각국 정부를 설득했다. 생산지에서 원석 가공도 해서 부가가치를 높이고 일자리도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먹혀들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선 푸틴과의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며 국영이던 알로사(Alrosa) 민영화에 참여해 대주주가 됐다. 러시아는 생산시장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알로사는 드비어스에 이어 세계 2위다. 이제 러시아의 다이아몬드는 굳이 드비어스 유통시스템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앙골라에서는 반란군의 다이아몬드를 구입해줌으로써 자금줄 구실을 했던 드비어스가 쫓겨났다. 레비브는 이 틈을 이용해 앙골라의 다이아몬드 광산개발에도 안착했다. 나미비아에서는 새로 지은 다이아몬드 공장에 대통령을 초청하여 500여명의 젊은 직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세공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내 산업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이미지를 심었다. (참고; 2004.7 매경이코노미, 정선욱 자유기고가)

◇제3의 변수들

드비어스에게 러시아의 배신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호주의 아질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 리오 틴토는 레비브가 드비어스에 맞서는 것을 보고 자극받았다. 그는 1996년에 사상 처음으로 다이아몬드 4200만캐럿을 드비어스를 거치지 않고 벨기에 앤트워프의 한 세공업체에 직접 판매했다. 대규모 중저가 다이아몬드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던 아질 광산이 직접 판매를 선언하고 드비어스의 그늘을 벗어난 것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호주가 전 세계 생산량의 40%를 차지하여 최대 생산지로 등극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캐나다 북서부 지방인 에카티·다이빅·윈스피어 등 3곳에서 대규모 광산이 발견되면서 캐나다가 제3의 다이아몬드 생산국으로 등장하여 드비어스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것이다. 이런 위기는 미국과 EU의 반독점법 규제와 맞물려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프리카의 내전이 대부분 마약과 다이아몬드가 그 원인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다이아몬드 산업 자체에 큰 부담을 안기기도 했다. 이렇듯 여러 악재가 겹쳐 드비어스의 시장 지배력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산업 자체는 지금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후 중국 정부가 다이아몬드 원석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이 아프리카 각국 정부를 상대로 도로 등 인프라 개발을 약속하면서 현지 다이아몬드 원석을 대량 확보하자 인도 정부가 화들짝 놀랐다. 중국은 아프리카 앙골라, 콩고 등 국가에 수십억달러 규모의 인프라를 지원하는 대신 이에 상응하는 자원을 받기로 합의한 것이다. 인도는 다이아몬드 원석 절단 및 세공 부문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60%를 자랑하는데, 이런 기세를 몰아 해외시장 개척도 활발하다. 유대인의 본거지였던 앤트워프도 인도인의 공략 앞에 속절없이 주인들이 바뀌고 있는 판국이다. 이러한 인도 다이아몬드 업계도 중국이 원석 물량 확보에 나서자 바짝 긴장하고 있다.

다이아몬드가 결혼반지로 첫선을 보이게 된 것은 1477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맥시밀리언에 의해서다. 이후 왕과 여왕의 결혼에는 반드시 다이아몬드 반지가 등장하게 되었다. 다이아몬드만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무적의 힘과 둥근 반지의 상징성이 함께 어울려 다이아몬드 반지는 결혼의 조화를 나타내는 완벽한 상징물이 되었다. 무릇 이 세상에 여자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랑하는 연인들이 있는 한, 다이아몬드 산업의 발전도 끊임이 없을 듯하다. 드비어스의 브랜드 ‘FOREVER’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