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가 중상주의의 꽃을 피우고 자본주의의 싹을 키울 때 영국은 후진국이었다. 수출품이라곤 양털과 모직물이 전부였다. 그나마 모험상인이라 불리었던 유대인들이 이 수출을 대행해주었다. 그 다음의 수익원이 해적질이었다. 해적질의 생명은 기동성과 함포 사격술이었다. 이를 통해 길러진 해상 전투력으로 점차 해상권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과 네덜란드는 합심해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게 된다. 하지만 해양의 주인이 두 나라일 수는 없었다. 1651년 크롬웰의 항해조례를 계기로 영국과 네덜란드 간에 3차례에 걸친 영란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바이킹 출신 정복왕 윌리엄, 영국의 봉건 왕조를 열다

정복왕 윌리엄. /위키피디아

섬나라 영국의 초기 역사는 식민지 역사였다. 영국에서 유대인들이 살았다는 첫 기록은 노르만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금 생산과 노략질을 위해 스칸디나비아에서 프랑스 북부로 내려와 노르만 지역을 점령해 살던 바이킹 출신의 노르만족이 1066년 영국마저 정복했다. 당시 노르만 7대 공작인 윌리엄은 영국을 정복하면 땅을 나누어주겠다고 신하들과 프랑스 귀족들을 회유해서 귀족들로부터 많은 병사와 700여 척의 배를 모으게 된다. 이때 북부 프랑스 루앙(Rouen) 지방에 있던 유대인 상인들과 의사들이 윌리엄을 따라 해협을 건넜다. 이때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1세가 영국 왕조의 시조이다.

윌리엄 1세는 영국을 정복한 후 4000여명의 영국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그의 180명이 채 안 되는 노르만족 신하들과 프랑스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로써 영국에 처음으로 강력한 봉건제를 도입하여 왕권 강화에 주력했다.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왕조 이전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색슨족이 이주해 와 세운 왕국이 여럿 있었지만, 이 왕조로부터 영국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주의 국가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때를 기준으로 ‘왕조 이전 시대’와 ‘왕조 시대’로 구분한다.

◇윌리엄 왕, 유대인을 영국으로 불러들이다

이때부터 영국(잉글랜드) 왕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는 프랑스의 신하가 아니지만 노르망디 공작의 지위는 잉글랜드 왕위와는 별개로 프랑스의 봉신이기 때문에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는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또한 이때부터 런던이 본격적으로 영국의 수도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런던탑. /위키피디아

윌리엄 왕은 다른 바이킹족 등 외적의 침입과 내부 반란을 막기 위해 런던을 관통하는 테임즈강 요충지에 가장 높고 튼튼한 거대한 요새 겸 성을 짓게 되는데 이 성이 바로 런던탑이다. 당시만 해도 이러한 성채가 영국에서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윌리엄은 이러한 노르만식 요새를 영국 곳곳에 지으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그는 프랑스에 살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뛰어난 상업과 금융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자본과 상업 기술을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는 이를 위해 프랑스 루앙에 남아 있던 나머지 유대인 커뮤니티 전체를 영국으로 초청하여 살도록 했다. 이를 필두로 노르망디와 북부 프랑스에 살던 유대인들이 영국으로 대거 이주하여 정착촌을 이루며 살았다. 물론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기 이전에도 일부 유대인들이 영국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이 무렵까지 아직 정착촌을 형성할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영국에 들어온 유대인들은 대부분 대부업에 종사했다. 대부업은 당시에 그들이 영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업종이었다. 장원 중심의 봉건적 경제체제가 정착되어가고 있던 영국에서 유대인들은 감히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도시의 길드 체제나 농촌의 장원 체제 모두 유대인들에게 조그마한 활동공간조차 제공할 여지가 아예 없었다. 그리하여 토지를 보유할 수도, 기존의 경제체제에 편입될 수도 없었던 그들은 자연히 교회가 기독교도들에게 금지한 업종, 곧 대부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당시 영국은 왕권 강화를 위해 분투하는 국왕들과 사치스런 귀족들이 금전을 빌릴 수 있는 대상을 항상 필요로 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자본을 가진 유대인들에게는 대부업이 더없이 좋은 업종이기도 했다.

유대 자본으로 건설된 윈저성, 1087년 정복왕 윌리엄이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 목조 성채를 쌓는 데서 시작하여 조지 4세 때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단일성으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위키피디아

유대인은 이후 노르만족의 역대 왕들과 영주의 보호 아래 번창했다. 그들은 독자적인 유대교 회당과 공동묘지가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를 영국 도시 곳곳에 짓고 살았다. 그들이 사는 곳에는 어김없이 상업이 발전하고 경제가 힘차게 살아 움직였다. 또한 대부 때마다 매번 세금을 내고 왕이나 영주의 채무보증을 얻어야 하는 유대인의 대부업은 영국 국가재정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무렵 지배계급들은 전국에 성을 지어 워릭성, 윈저성 등 100여 개의 큰 성들이 이때 건설되었다. 유대 자본으로 건설된 것이다.

이후 1085년 토지대장이 완성되어 세금 징수의 토대가 되었다. 제대로 된 나라 꼴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자료를 보면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왕에 즉위한 1066년과 자료가 출간된 1086년의 두 시기를 기준으로 그때와 지금 누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고, 언제 어떻게 주인이 바뀌었는지가 정리되어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대부분의 토지 주인은 프랑스에서 건너온 새로운 영주와 교회가 차지했다.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문화가 영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지배층의 언어가 노르만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노르만어는 노르망디 지방에서 통용되는 프랑스어 방언이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노르만어는 영국 지배층의 언어가 되었고, 수많은 흔적을 영어단어에 남겼다.

영국 국회의사당. /위키피디아

또 하나의 변화는 성이었다. 처음에는 주위에 해자를 파고, 가운데는 탑 모양의 요새를 설치한 형태에서, 나중에는 돌로 축성한 성이 수도 없이 영국 전역에 세워져 영국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의 영국 국회의사당도 정복왕 윌리엄 시대인 1090년에 완성되어 궁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헨리 8세가 화이트홀로 거처를 옮긴 1532년부터 영국의 국회의사당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상인은 유대인을 의미

헨리 2세 때 유대인의 대부업은 나라의 통화량을 조정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했다. 1185년 아론이라는 유대인 대부업자는 1만5000파운드를 430명에게 빌려주었는데, 이것은 영국 연간 국고 수입의 4분의 3이었다고 하니 유대인 대부업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 유대인들이 누렸던 이러한 번영은 전적으로 국왕의 보호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들은 국왕의 막중한 돈줄이자 수지맞는 과세 대상이었기 때문에 왕실은 그들을 과도하리만큼 후원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체와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이같이 전적으로 국왕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이 취하는 각종 조처에 대해 거의 무력한 처지였다. 실제로 헨리 2세 때에 이르면 유대인들은 아예 국왕의 소유물, 곧 재산 그 자체였다. 1180년경의 법령에는 이 점이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왕국의 어느 곳에 거주하든지 모든 유대인은 왕의 신하의 감시와 보호를 받아야 한다. 유대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은 국왕의 것이므로, 어느 유력자를 막론하고 왕의 허가 없이 유대인들을 자신에게 예속시켜서는 안 된다. 또한 만약 어느 유력자가 유대인들이나 그들의 금전을 억류했을 경우, 만약 왕이 원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왕은 [본래] 자신의 것이었던 그 억류 대상을 마땅히 회수할 수 있다.”

이런 형편이라 국왕은 유대인들에 대한 거의 모든 조치를 내릴 수 있었다. 예컨대 유대인들이 돈을 빌려줄 때마다 왕의 관리들은 구체적인 액수와 대상을 문서에 기록했고, 그 대금을 회수할 때는 채무액의 1할을 징수했다. 또 만약 유대인 대금업자가 죽게 되면 왕은 그의 사채권을 모조리 왕의 재무관 수중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실례로 1185년에 영국 최고 거부로 알려진 유대인 ‘링컨의 아론’(Aaron of Lincoln)이 죽었을 때, 헨리 2세는 그의 전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다. 당시 그는 대륙에서 프랑스 왕 필립 2세와 교전 중이라 전쟁 경비 마련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이때 마침 아론이 죽자 왕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법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아론의 모든 유산을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헨리 2세는 또한 자신이 죽기 한 해 전인 1188년에 자신의 십자군 참전계획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소위 ‘살라딘 십일조’를 징수하기도 했다. 이 세금 징수의 직접적 대상은 사실상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는 이때 유대인들의 재산을 실사하여 총보유액 중 4분의 1을 납부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유대인들에게 거둔 금액은 모두 6만파운드에 달했는데, 당시 유대인들을 제외하고 영국 전체에서 징수한 총액이 7만파운드였던 점에 비추어 본다면 이 금액이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왕은 1191년에는 런던 상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했다. 당시 상인은 유대인을 의미했다.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중세에 글을 아는 유대인들이 상권을 장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유대인들의 위세는 지나치게 커져갔다.

◇유대인 박해가 추방과 학살로 치달아

중세 유대인들이 써야 했던 특별한 고깔모자. /위키피디아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이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 살인자’라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영국 사회에도 반유대 정서가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고리대금업에 휘둘리는 서민들이 유대인을 미워했다. 3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면서 유대인 박해는 추방으로 연결되었으며 더 나아가 학살로 치달았다. 유대인이 추방되거나 죽으면 채무가 탕감될 뿐 아니라 그 재산은 영주에게 귀속되었다.

실제로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이끌었던 제3차 십자군 출정에 앞서 1189~1190년 런던과 요크에서 발생한 유대인 학살에 채무자들이 대거 가담했다. 그 뒤 폭정과 무능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존 왕이 유대인 탄압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206년에 프랑스왕 필립 2세에게 노르망디를 빼앗긴 그는 그곳을 탈환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1210년에 영국 내 모든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그들의 재산을 실사하여 총 6만6000마르크에 이르는 거액을 세금으로 징수했다. 이제 유대인들에게 영국은 더 이상 안전과 번영을 약속하는 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헨리 3세(1216~1272년) 때에 이르면 유대인들은 아예 국왕의 목초지에서 방목되는 젖소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 헨리는 통치기간 동안 별의별 명목들과 강압적 수단들을 동원해 유대인들에게 막중한 세금을 징수했다. 그의 치세에서 유대인들은 철저한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1257~1267년에는 영국의 주요 도시에서 유대인들이 연달아 추방당했다. 그리하여 런던, 캔터배리, 노샘프턴, 링컨, 캠브리지 등에서 유대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같은 대중의 반유대 감정이 점차 국가정책에도 반영되어 1275년에는 아예 유대인의 대부업을 불법화시켰다. 그 무렵 영국에서 유대인의 대금업이 전성기를 이루고 있을 당시 영국 왕은 특별한 권한을 갖고 유대인의 재산을 자기 것처럼 처분할 수 있었다. 마치 봉건영주가 농노들에 대해 갖고 있었던 권한과 비슷했다.

사자 왕 리처드가 집권하면서 유대인들의 수난이 시작됐다. 리처드 왕은 재정 확보 수단으로 유대인들을 파산시켰다. 뒤에는 신성 모독죄로 몰아 유대인 300명을 교수형 시켰다. 그들의 재산은 전부 왕의 것이 되었다. 왕으로서는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민심을 달래면서 왕의 돈주머니도 늘어났다.

◇1290년에 세계 최초로 유대인을 추방했던 영국

사회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대부업조차 차단당한 유대인들은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그때 추방령이 떨어졌다. 1290년 7월 18일, 영국 내 모든 유대인은 11월 1일까지 국가를 떠나라는 통첩이 내려졌다. 정해진 기한 이후에 영국에서 발견되는 유대인은 모두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 나라에서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추방되는 첫 사례였다.

플랑드르 지역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유대인들은 몸에 지니고 갈 수 없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채 영국에서 집단 추방되었다. 당시 약 1만6000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도버 해협 바로 건너 플랑드르(오늘날 북부 벨기에)로 쫓겨 갔다. 영국은 스페인보다 200년이나 앞서서 유대인을 모두 나라 밖으로 추방한 것이다. 그 뒤 영국에 숨어 사는 개종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몰래 숨어 살았다. 이후 플랑드르는 북부 유럽의 상업과 금융 중심지로 탈바꿈한다.

이런 사례는 그 뒤 프랑스에서도 나타났다. 미려왕 필립의 확장정책과 반유대주의로 인해 1306년 유대인들에게 빌린 그간의 채무 관계를 백지화하고 프랑스 내 모든 유대인 1만 명을 추방했다. 부유한 유대인도 예외 없이 모든 재산을 남겨두고 한 달 내 빈털터리로 떠나야 했다. 이러한 사례는 이후 유럽 곳곳에서 발생했다.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이들이 플랑드르와 북부 이탈리아로 나누어 정착하자 이 두 곳이 유럽의 최대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