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가 연인 배용이 만들어준 푸른 원피스를 입고 인형들과 활짝 웃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손, 와인, 편지 등 일상을 소재로 삼은 추상 신작도 볼 수 있다. /이태경 기자

어머니가 도둑놈 손이라고 했던 열 손가락 지문(指紋)은 평생의 노동으로 다 닳아 없어졌지만, 김영희는 “인생은 오페라보다 아름답다”며 웃었다. 첫 남편과 사별 후 아이 셋 업고 날아간 독일 땅에서 갖은 설움받고 살았지만, “그래서 인생은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했다. 팔순의 그녀가 다시 모국에 왔다.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말벗이 돼준 닥종이 인형들과 함께. 서울 광화문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8월 26일까지 열리는 전시 제목이 ‘인생은 아름다워’다.

◇떨어져 연애하니 좋더라

-내년 80인데도 군살이 하나 없습니다.

“채소고 고기고 가리지 않고 잘 먹어요. 우리 큰딸이 엄마는 대체 맛없는 게 뭐냐고 물어요. 그리고 걷지요. 독일에서도 매일 6~7㎞는 걸었어요. 인형 만들고 정원 돌보느라 한시도 퍼질 새가 없어요.”

-서울에서도 광화문 숙소에서 청와대까지 매일 아침 걷는다고요.

“꽃과 나무들이 예뻐서 말을 걸다 오지요. 나이가 드니 아름다운 것에만 눈을 돌리는 이기주의자가 됐나 봐요.”

-한국에 오면 좋은가요?

“저에겐 휴가죠. 사람들 만나 수다 떠니까. 뮌헨 집에선 종일 혼자 일만 하거든요. 그리고 맛있는 게 많잖아요. 팥빵, 오징어, 만두, 옥수수. 미국 사는 오빠도 팔십이 넘으니 한국 가서 탕수육 먹고 살고 싶대요. 근데 내가 쓰는 말을 호텔 직원들이 못 알아들어요. 변소가 어디냐고 했더니 그게 뭐냬요, 하하!”

-사랑도 건강의 비결이겠지요? (김영희는 67세에 동갑내기 패션 디자이너 배용과 연애를 시작했다.)

“그이는 참 부지런한 사람이에요. 제가 부산에 가면 아침을 지어서 갖다 바쳐요. 부산 남자라 말은 이쁘게 안 하는데 어찌나 깨끗한지 집을 쓸고 닦지요. 첫사랑이던 아내와 사별했으니 큰 충격이었죠. 암 치료한다고 서울 의상실도 접고 간병만 했대요. 아내가 죽고 나서 매일 울었는데, 김영희 만나고는 울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웃음).”

-벌써 13년째네요.

“눈에서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독일 친구들은 반대했어요. 곧 헤어진다는 데 300유로씩 걸고(웃음). 근데 난 떨어져 연애하니 참 좋아요. 쓸데없는 간섭이 없잖아요. 대신 매일 아침 전화를 하죠. 잘 있냐, 잘 먹었냐. 우리 올케가 웃어요. 노인네들이 참 부지런하다고. 그럼 내가 그래요. 죽었나 살았나 체크는 해야 할 거 아니냐!”

-팔순을 앞두고 여는 전시입니다.

“한지를 내가 다섯 살 때부터 만졌잖아요. 뭐든지 흔하면 좋은 줄 모르는데, 운명이라 그랬나 봐요. 나는 화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고 자란 고향이 뒷받침되지요. 네덜란드에 전시하러 갔는데 그 나라 풍경이 딱 몬드리안 그림이야. 산은 없고 모두가 네모, 네모. 미켈란젤로의 조각상도 이탈리아에 대리석이 많으니 가능하지 않았겠어요? 나는 한지의 나라에서 태어나 한지 조각가가 됐고요. 그런 내가 장해요(웃음).”

닥종이 작가 김영희가 26일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전시를 앞두고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뜻대로 안 되니 인생

-닥종이의 첫 느낌을 기억하나요?

“그럼요. 아버지가 제천서 직조공장 할 때 한옥에서 살았는데 매년 물 뿌려 창호지를 교체할 때마다 마당에 버려진 파지를 조물락거리던 느낌이 생생하죠. 보송보송한 솜털 같은 종이로 생쥐도 만들고 강아지도 만들고. 고3 때도 그러고 있으니 우리 엄마, 아버지는 막내딸이 저능아인가 했대요.”

-홍대 다닐 땐 굉장한 멋쟁이였다고요.

“그때는 홍대 앞이 진흙밭이라 장화 신고 학교 가서 하이힐로 갈아 신은 다음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명동으로 갔어요. 명동 가서 노는 게 3분의 1! 인형 만드는 것만 재미있지 학교 수업은 재미가 없어서 학점을 겨우 따고 졸업했지요.”

-제천에서 중학교 미술 교사로 근무했더군요.

“대학을 졸업하니 엄마가 용돈을 딱 끊어서 하숙비 안 드는 제천으로 교직을 신청했죠. 거기서 유진이(큰딸) 아빠를 만났고요. 그러니 사람 일이 뜻대로, 플랜대로 되는 게 없어요. 운명대로 살지요.”

-사별 후 왜 서울로 왔나요?

“남편이 죽으니 배짱이 생겨요. 여기서 선생 할 게 아니라 서울 가서 작가로 나가겠다! 엄마도 가라고 하셨어요. 과부 돼서 선생질 하나 그게 그거라고. 서울 개봉동에 집을 사서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인형을 만들었죠. 무조건 성공해야 했어요.”

-첫 전시를 조선호텔 복도에서 했지요?

“처음엔 신세계백화점에 갔는데 거절당했죠. 이름도 못 들어본 작가라고. 다행히 조선호텔에서 허락받고 70점을 걸었는데 호텔 커피숍이 바글바글해질 만큼 전시가 잘됐어요. 마침 내셔널지오그래픽 기자가 리뷰까지 해줘서 건축가 김수근씨 ‘공간’에서 두번째 전시를 한 뒤 독일 뮌헨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첫 한국인 작가가 됐지요.”

-뮌헨 전시에서 운명의 청년 토마스를 만납니다.

“난 서른일곱, 토마스는 스물세 살이라 말도 안 되는 건데, 자기는 영원히 날 사랑할 거고 아이들도 먹여 살릴 거라고 장담하더군요. 서양 남자나 한국 남자나 뻥을 잘 쳐요, 하하!”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았나요?

“내가 말로 해서 듣는 딸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많이 맞았어요(웃음). ‘젊은 양놈한테 미쳐서 애들 밥도 안 해주고 해싸면 내 죽은 귀신이라도 독일로 날아가 널 잡아묵을끼다’ 하셨죠. 난 우악스러운 우리 엄마가 좋았어요. 모르는 게 없는 여장부였죠. 아버지가 그랬어요. 무식한 게 틀린 말은 안 한다고. 다들 파마할 때 쪽찐머리로 평생 산 분이죠.”

-그런데 토마스는 경제적 능력이 없고, 독일 화단의 벽은 높았지요?

“누가 날 쳐주겠어요. 평론가 파워 막강한 독일에선 처녀에, 젊고, 독일대학 나와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하나도 해당 안 됐지요. 그러다 뮌헨 전시 때 내 작품을 눈여겨봤던 사람이 호숫가의 작은 갤러리를 소개해줘 첫 전시를 했어요. 넷째 낳고 3일 만에 퉁퉁 부은 얼굴로 한복 입고 개막식에 갔는데 지금 생각해도 촌스러웠어요(웃음).”

-이젠 독일에서도 유명해졌지요?

“내 컬렉터들은 평론가를 무시하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작품에 포엠(poem·시)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데 그걸 좋아하는 분들이죠. 컬렉터 중 한 변호사가 그러더군요. 자기는 한 시간 만에 변론 쓰고 버는 돈을 당신은 한 달간 노동해서 번다고. 내가 그랬죠. 바보는 바보대로 사는 거라고, 그래도 행복하다고.”

김영희의 닥종이 인형은 언제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어머니, 아버지, 자식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가족 관람객이 많이 찾는다. 1994년 9월 3일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린 김영희 닥종이 전시회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선 관람객들.

◇언제나 기다리는 엄마

-토마스와의 이혼을 후회하나요?

“제일 잘한 일 중 하나예요. 사랑해서 독일로 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보수적인 독일 남자가 돼가고, 나는 억센 한국 여자가 돼갔지요. 성당 안 간다고 어린 딸을 때리고, 배변 못 가린다고 아이 엉덩이에 뜨거운 물, 찬물 퍼붓는 걸 참을 수 없었어요.”

-다섯 아이는 성인이 됐겠군요.

“맏딸 유진이는 파산 전문 변호사가 됐고, 윤수는 음악학원 차려 성공했어요. 스님 되겠다던 장수는 자연의학에 관련된 일을 하고, 봄누리는 작곡가로 살고 있지요. 그 애들이 이제 날 감시해요. 말대꾸하면 큰일나죠, 하하!”

-자폐 증세 있던 막내 프란츠도 잘 있나요?

“프란츠 때문에 늘 마음 아파하니 장수가 그래요. 엄마는 프란츠가 잘 크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건 엄마가 다른 애들과 비교를 하기 때문이라고. 정작 프란츠는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낸다고.”

-봄누리 때문에도 맘고생 하셨지요?

“처녀가 애를 뱄으니, 기가 찼지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는데 프랑스에서 온 거지 청년과 사랑에 빠져서 대학도 그만뒀으니. 그래도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했어요. 결국 혼자 돼 레슨과 작곡으로 돈을 벌면서 다시 학위도 땄어요. 이번 전시에 ‘김영희의 사계절’이란 영상이 나오는데 거기 흐르는 음악을 봄누리가 작곡했어요.”

-오남매는 서로 잘 지내나요?

“걔네들은 한달에 한번 만나는 걸 원칙으로 알아요. 큰아들 집에 모여 바비큐 파티를 하지요. 유진이는 너무 바쁘니 부르지 말라고 해도 꼭 달려와요. 한국말 독일말 섞어서 저희들끼리 별 얘기를 다하고. 크리스마스는 오스트리아 접경 지역에 사는 봄누리까지 다 모여요.”

-아이들에게 미안한가요?

“저 어린 것들이 무슨 죄로 낯선 나라에 와서 멸시받고 사나 미안했지요. ‘왜 우릴 여기로 데려왔어?’ 따지기도 했고요. 그런데 요샌 고마워하는 것 같아요. 코로나로 학원이 어려워져 힘들어하는 아들한테 며느리가 그랬대요.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맹자로 왔지만 다섯 아이 공부시키고 그랜드피아노 사서 음악 가르치고 인형으로 돈도 벌었잖아. 그러니까 당신도 이겨내야지.’”

-자식들로부터 존경을 받는군요.

“이웃집 프리들 아줌마가 그래요. ‘프라우 킴(김영희)은 언제나 기다리는 엄마’라고. 그 말에 내가 울었어요.”

◇갱년기는 혁명의 시간

-여자에게 갱년기는 함정이거나 혁명, 둘 중 하나라고 했더군요.

“나의 갱년기는 엄청난 함정이었어요. 토마스와 헤어져 더 죽을 지경이었죠. 눈물만 나고 죽고 싶은 생각도 들고. 의사한테 갔더니 무조건 걸어야 된대요. 근데 내가 걸을 시간이 어딨어요. 작품하고 애들 키우느라 바쁜데.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었죠. 죽기 아니면 살기인데 어떡할래? 살기로 결정한 뒤엔 매일 걷고, 물 마시고, 일했어요. 그리고 거울 보면서 날 칭찬했지요. 야, 얼마나 근사하게 생긴 여자냐, 두 번이나 결혼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

-혁명군이 되었군요.

“혁명은 나폴레옹처럼 힘이 굉장히 세야 돼요. 실패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진격을 해야 돼요. 그래서 매일 진격했죠. 오늘 얼마큼 걸었나, 얼마큼 인형을 만들었나 체크하고, 이쁜 옷도 사서 입고. 어떤 날은 소피아 로렌처럼 눈화장을 하고 강가의 멋진 레스토랑 가서 혼자 커피를 마셨어요. 당당해지려고.”

-예술은 무엇일까요.

“아침에 바흐나 모차르트를 들으면 눈물이 나요. 모차르트는 몇백 년 후에 한국의 못생긴 여자가 작업실 한구석에서 자기 음악 들으며 울고 있을 줄 알았을까요? 그 상상을 하면 내가 반성을 해요. 내 작품이 먼 훗날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줄까 하고요.”

-시간을 되돌린다면 언제로 가고 싶으세요?

“안 가고 싶어요. 과거는 과거로 끝. 아무리 좋은 레스토랑도 매일 가서 먹으면 그저 그렇잖아요. 한번 겪어봤으니까. 저는 내일이 제일 좋아요.”

-늙으면 좋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죠.

“늙으니 좋아요. 내 의무가 없어지고 세상 보는 눈이 좀 올라가고요. 하늘에서 부르면 가야 하는 것도 아니까 욕심도 없어져요.”

-죽고 싶다며 절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오죽하면요. 근데 죽는 거 쉽지 않아요. 살아야겠다 이 악물면 무수한 인연들이 알게 모르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죠. 추운 겨울날 토마스 집 문이 잠겨 밖에서 떨고 있는 나와 아이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따뜻한 차와 케이크를 내어주던 프리들 아줌마처럼. 그래서 인생은 최고의 예술품이에요. 어떤 오페라보다 아름답죠. 이걸 모르고 죽으면 억울하잖아요? 끝까지 살아봐야 알아요, 인생은!”

닥종이 작가 김영희가 26일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전시를 앞두고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김영희

1944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에서 회화와 조각을 전공했다. 1978년 서울 조선호텔에서 첫 전시를 한 뒤 1981년 독일 뮌헨으로 이주해 닥종이 조형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만부가 팔린 첫 책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를 비롯해 ‘뮌헨의 노란 민들레’ ‘눈이 작은 아이들’ ‘눈화장만 하는 여자’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