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상인에 목매고 있었던 영국

유럽의 작은 섬나라 영국은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스페인 제국은 물론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에게도 밀리는 변방국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그로부터 200년 후 5대륙 45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세계의 통치자가 된다. 사실 영국은 세계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양모와 모직물 수출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산업이 없었다. 그나마 모직물도 14~15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해인 1336년에 에드워드 3세가 모직업을 발전시키려고 플랑드르에서 유대인 직조기술자를 데려온 후에 양모 수출은 쇠퇴하고 모직물 수출이 증가했다. 그 뒤 백년전쟁 중에는 영국이 양모의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에 플랑드르의 모직물 산업이 타격을 입었다. 그때 전란을 피해 다수의 플랑드르 직조공들이 영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모직물 생산의 중심이 플랑드르에서 영국의 요크셔로 이동했다.

이후 플랑드르에서 온 유대 상인들이 영국의 양모와 모직물 수출을 주도했다. 그래서 원래 영어에서 ‘상인’(merchant)이라는 말은 주로 해외무역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는 유대인을 가리켰다. 당시 영국에서 상인과 유대인은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서서히 영국인 모험상인조합이 성장했다.

영국 경제의 최대 취약점은 양모와 모직물이라는 단일 수출상품과 앤트워프라는 단일 수출시장에 목을 매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단일성이 한순간에 붕괴된다면 영국 경제는 큰 불황으로 치달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영국은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왕실에서 묵인하는 해적 활동이 극성을 부렸다.

◇영국의 자급자족 정책, 철 대포를 개발하다

16세기 영국 왕 헨리 8세 때 해적질에 필요한 대포도 모두 대륙에서 수입해 쓰고 있었다. 그들은 수입 대포를 주로 스페인 상선을 상대로 해적질에 썼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스페인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는 유대인 경제권인 플랑드르 공업지대의 영국 수출 금지를 단행해 영국은 더 이상 청동 대포를 수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자급자족 정책을 서둘러 대포의 자체 제작에 나서야 했다. 당시 청동 가격은 철의 4배에 달해 청동 대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철 대포 개발에 나섰다. 왕은 먼저 철광석 광맥이 있는 서식스 숲의 제철업자들에게 거액을 지원해 품질 좋은 철을 생산케 했다. 그 결과 1540년대 서식스 지역에 50개가 넘는 제철 공장이 들어섰으며 마침내 균질한 철 생산에 성공했다. 이는 훗날 산업혁명의 토대가 된다.

당시 영국은 해적질을 위해서 사거리가 긴 함포가 절실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대륙의 청동 대포보다 포신이 긴 장거리 철 대포 개발이었다. 왕은 장인들을 끌어모아 마침내 장거리용 철 대포 개발에 성공했다. 여기에는 운도 따랐다. 서식스 지역 철광석에 포함된 인(燐)이 대포의 내구성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철 대포 생산 원가는 청동 대포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이후 영국은 연간 400t(톤)이 넘는 철 대포를 생산했다. 이는 유럽 전체 대포 생산량의 70%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갤리언선의 포문과 평저선이 역사를 바꾸다

그런데 어렵게 개발한 장거리 함포의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함포 발사 때 배가 너무 흔들려 조준 사격이 소용없었다. 이를 극복한 게 평저선 개발이었다. 이는 영국의 운명을 바꾸었다. 함포 발사 시의 반동을 흡수할 수 있도록 선박의 밑바닥을 비교적 크고 편평하게 만들라는 아이디어는 당시 헨리 8세가 직접 냈다고 한다. 무엇보다 평저선은 보급에 유리했다. 밑바닥이 평편해 해안 어느 곳이나 쉽게 접안할 수 있어 보급품 운반이 용이했다.

평저선(위)과 첨저선의 모습. /위키피디아

◇밑바닥 편평한 평저선, 회전 좋고 반동 줄여 함포 명중 높여… 임진왜란 때도 위력 발휘

우리나라 배는 고대부터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이다. 중국, 일본 배들은 물살을 쉽게 가르기 위해 배 아래가 뾰족한 역삼각형인 첨저선이다. 유선형이기 때문에 평저선에 비해 속도가 빨라 다른 나라의 배는 첨저선이다. 우리나라에서 평저선 같은 독특한 배가 탄생한 이유는 갯벌이 많다는 점이다. 배 밑이 역삼각형인 V자형 첨저선은 썰물이 나가면 갯벌에 쓰러진다. 그래서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이 자연스럽게 발달했다.

고려 때 최무선 장군은 왜구들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이를 물리치기 위해 먼저 제조 방법이 유실되었던 화약 제조 기술을 복원했다. 그리고 대포를 만들어 평저선 위에 설치했다. 이로써 1380년 금강 하구 진포에 상륙한 왜선 500척을 섬멸하여 바다를 지킬 수 있었다. 칼레 해전에 비해 200년 이상 앞선 이 진포 대첩이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이다. 그 뒤 왜구들도 대포를 만들어 배 위에 장착했지만 우리 한선을 당해낼 수 없었다.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배 위에서 대포를 쏠 때 반동 흡수에 유리하여 명중률이 높았다. 반면 왜구의 배는 첨저선이라 흔들림이 심해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게다가 평저선은 안정감이 있어 파도에 강하고 선회력이 좋았다.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 반면 첨저선은 파도나 물살이 강한 곳에서 무리한 선회를 하다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순신 장군이 물살이 빠른 곳을 주로 활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평저선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일등 공신이었다.

◇아래 갑판에 포문을 설치하다

헨리 8세의 공은 또 있었다. 그는 철 대포 개발 이전에 이미 상선을 차용해 급조한 무장상선이 아닌 본격적인 전투를 위한 전함을 제작해 아래 갑판에 ‘포문’을 설치했다. 그 전에는 상층 갑판에 함포를 적재함으로써 선박의 무게중심이 위로 쏠려 전복될 위험성이 있었다. 때문에 많은 함포를 적재할 수 없었다. 헨리 8세는 그러한 문제를 이레 갑판에 ‘포문’을 설치해 해결했다. 수면 바로 위에 위치한 아래 갑판에 경첩식 나무 창문을 만들어 이 포문을 통해 함포를 발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대포 밑바닥에 4개의 바퀴를 달아 이동이 쉽고 병사들이 포탄 적재와 발사 조작을 간편하게 할 수 있도록 했다.

후발국 영국이 이후 당대 최강 스페인 무적함대를 깰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갤리언선과 평저선에 장거리 철 대포를 장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영국의 갤리언선 포문 설치와 평저선 개발은 이후 세계사를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영란은행을 탄생시키는 시발점이 될 줄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설계도의 출현 및 대형 범선으로 진화

그 뒤 갤리언선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킨 것이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존 호킨스였다. 존 호킨스는 새로운 배를 개발하면서 그때까지의 전통적 선박 건조방식이 아니라 선박의 설계도를 그린 것이다. 현재 캠브리지 대학에 남아 있는 호킨스의 설계도를 보면 주먹구구식 함선 설계방식을 버리고 기하학에 입각해 완전히 새로운 배를 설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중을 낮추고 길고 날렵했다. 영국 전함은 스페인 전함보다 훨씬 더 많은 대포를 장착할 수 있으면서도 기동성이 좋았다.

1573년 새로운 설계에 기반한 첫 번째 전함이 건조된 이후 1588년까지 영국은 총 18척의 ‘레이스 빌트 갤리언선’을 보유하게 되었고, 16척의 왕실 갤리언선도 성능이 개선되었다. 스페인 함선으로는 도저히 쫓아올 수 없는 혁신적 함대가 영국에 등장한 것이다.

◇세계사를 바꾼 칼레 해전

그 뒤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지휘한 1588년 칼레 해상 전투 때 영국은 갤리언 전투선 34척, 상선을 무장 시킨 163척 이외에도 평저선 30척으로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와 맞섰다. 그 무렵 해전은 백병전을 위주로 하는 근접 전투였다. 보통 배와 배끼리 강하게 들이받은 후 갈고리가 달린 사다리를 상대 배에 내려 보병들이 건너가 싸우는 백병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영국 함대의 해군 선원은 6000명에 불과했다. 반면 스페인 무적함대는 해상 백병전을 위해 해군 선원 8500명, 보병 2만명을 태운 엄청난 군사력으로 무장해 있었다. 무적함대 선박은 한 배에 보병만 350명씩 타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칼레 항구에서 스페인 육군 3만명을 더 태워 영국 본토에 상륙시킬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포의 수와 성능은 영국이 월등히 앞섰다. 스페인은 장거리 철포인 컬버린 포를 21문밖에 확보하지 못한 반면, 영국은 153문이나 보유했다. 중거리 포도 스페인이 151문, 영국은 344문이나 보유했다.

대포를 많이 장착한 영국 군함의 전투 대형(隊形)도 변했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종전 방식대로 군함이 뱃머리를 적진으로 향하는 종렬진을 사용했다. 그러나 철 대포를 많이 장착한 영국 함선들은 배의 측면 대포들이 적진을 향하는 횡렬진으로 대항했다.

해상 백병전에서 세계 최강이던 스페인 무적함대는 속도와 회전력의 우위를 활용해 사거리가 길고 명중률 높은 철 대포로 공격해오는 영국 해군 갤리언선과 평저선 함대의 원거리 함포전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칼레 해전. 교황과 스페인 왕실 깃발을 단 맨 앞 가운데 함선은 무적함대 기함 ‘산 마르틴’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배는 영국 해군의 기함 ‘아크 로열’이며, 왼쪽은 전설적 해적이자 탐험가, 해군 제독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 함대의 부사령관 기함 ‘리벤지’인 것으로 보인다. 뒤편으로는 공격당한 스페인 함선들이 침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자 미상의 16세기 영국 유화. 영국 해군과 스페인 무적함대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해전 ‘그레벨링엔 전투’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런던 그리니치 국립 해양 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이에 비해 영국의 갤리언 전투선은 무게중심이 낮고 길고 날렵해 철 대포가 많이 실려있음에도 무적함대 배보다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게다가 무게중심이 낮아 안정되다 보니 대포의 명중률도 스페인 함대보다 높았다. 영국의 평저선 역시 함포 명중률이 스페인 무적함대의 첨저선보다 월등히 높았다. 더구나 평저선은 수심이 얕은 연안에 정박이 가능하여 인근 해안에서 보급품 나르기도 수월해 영국 함선들에 탄약과 식량 등의 보급이 원활해졌다. 특히 당시 칼레 항구는 수심이 낮아 흘수가 깊은 대형 선박이 안심하고 정박할 만한 시설이 없었는데, 이런 조건에서 평저선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당시 영국 철 대포의 사거리는 평균 100m(미터)였고, 스페인 무적함대 청동 대포의 사거리는 보통 60m 내외였다. 영국 함선들은 근접 전투를 하지 않고 장거리 함포 덕분에 80m 밖에서 치고 빠지는 전술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괴롭혔다. 게다가 밑바닥이 편평한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방향을 바꾸는 회전력이 월등히 뛰어났다. 영국 평저선은 단지 밧줄과 도르레를 이용해 돛들을 재빨리 돌려 배를 회전시키면서 초승달 대형을 이루어 쳐들어오는 적선들을 향해 함포 공격을 자유자재로 하여 스페인 무적함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밑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회전력이었다. 이로 인해 무적함대는 그들이 원하는 해상 백병전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네덜란드 독립군 ‘바다의 거지 떼’들의 활약

스페인 함대는 저지대에 주둔하고 있는 파르마 공의 병력을 태우려고 칼레보다 조금 더 북동쪽에 위치한 덩케르크 해안에 정박하고자 했다. 네덜란드 근해는 대형 갯벌로 수심이 얕아 스페인 함선이 정박할 수 없었다. 스페인 함선이 정박할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깊은 지점은 ‘바다의 거지 떼’라고 스스로 칭한 네덜란드 해군이 선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안지형 뒤에 매복해있다가 스페인 대형 선박이 포착되면 바람같이 튀어나와서 사방에서 공격해 배를 불태운 뒤 도주하곤 했다.

게다가 파르마 공은 제때 병력을 이끌고 덩케르크 해안에 도착하지 않았다. 결국 쫓고 쫓기는 일주일간의 전투 끝에 지친 무적함대가 밤에 항구가 아닌 칼레 해협 한가운데 닻을 내리고 정박한 상태로 막연히 파르마 공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영국은 8척의 화공선을 기습적으로 상대방 진영에 투입해서 폭발시키는 화공 작전을 폈다. 이에 놀란 무적함대 선박들이 밧줄을 끊고 달아나면서 아수라장이 됐을 때 함포 사격 총공세를 펼쳐 칼레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은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로 이어져

마침내 영국과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것이다. 이는 세계 권력의 이동이자 해상권 장악을 뜻했다. 그간 스페인 제국의 기세에 눌려 살았던 영국이 이를 계기로 중상주의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그들 영해에서만 스페인 배를 몰아낸 게 아니라 미국과 인도 항구에서도 스페인 상선을 공격해 쫓아내 버렸다. 이로써 이들은 북미에 식민지를 많이 건설할 수 있었다. 이것이 세계사의 분수령이었다. 스페인 제국이 지고 영국의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은 항해조례를 통해 네덜란드 유대인의 영국 이주와 영란은행 탄생 그리고 훗날 영란은행을 본떠 만든 미국 연준의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