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박 회장이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이승만 대통령의 작은 동상을 들고 웃었다. 그의 집무실엔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태극기와 함께 걸려 있다. /이태경 기자

전쟁으로 여덟 살 때부터 날품을 팔아야 했던 소년은 여간해선 울지 않았다. 피같이 모은 종잣돈으로 뛰어든 공구 사업이 부도 위기에 처했을 때 주먹으로 짓이긴 눈물이 전부였다. 백발의 그가 다시 눈물을 흘린 건, 지난 달 27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지에서다.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이 백선엽 장군의 동상과 이웃해 세워지던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7년을 기다린 일이거든요. 저의 오늘을 있게 해준 두 생명의 은인이 다시 살아온 듯합니다.” 보수 우파의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는 김박(81) 앨트웰 회장 이야기다.

◇대한민국 세운 위인 박해하는 나라

-인터뷰를 한사코 거부하시더군요.

“어릴 적 어머님이, 네가 열 가지 잘해도 한 마디 공치사를 하면 그게 다 없어진다, 모두 공 없는 짓이 된다고 하셨지요. 나이는 세 살 어리지만 제가 멘토로 삼고 존경하는 조갑제 선생이 권유해 할 수 없이 나왔습니다.”

-이승만, 트루먼 동상 건립을 주도하셨지요?

“주도는 조갑제 선생이 하고 저는 자금 지원만 좀 했을 뿐입니다. 6·25를 이긴 전쟁으로 만들어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아래 선진국 시민으로 살고 있게 해 준 두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건립까지 어려움이 많았다고요.

“2016년 동상건립추진모임을 만들고조각가 김영원 교수에게 부탁해 동상까지 다 완성했는데, 당시 칠곡군 의회가 반대해 세울 수가 없었어요. 다행히 2019년 이철우 경북지사가 돕겠다고 나섰고, 작년 지방선거로 바뀐 칠곡군수와 의회가 도와줘 한미 동맹 70주년이 되는 올해에서야 뜻을 이루게 됐지요.”

-원래는 박정희 대통령까지 세 분의 동상이었죠?

“박 대통령 동상은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세우려고 했는데,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 마포구청 등에서 독재자의 동상을 세울 수 없다며 트집을 잡고 방해를 해서 아직도 창고에 계십니다.”

-박정희 기념관에 왜 박정희 동상을 세울 수 없습니까?

“기념관이 시(市)유지라 그렇답니다. 말이 됩니까?”

-동상 하나에 설치비를 포함해 5억씩, 15억을 혼자 내셨더군요. 동상이 뭐라고, 7년간 속을 끓입니까.

“대한민국의 건국과 6·25, 그리고 경제 부흥은 세계 유례가 없는 위대한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그 주역들을 우리 스스로 박해하고 있어요. 동상 하나 세우는 일이 이렇게 괴로워서야 되겠습니까.”

7월 27일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시민들이 동상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이승만, 트루먼… 69년 만의 재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 동상을 세웠습니다.

“조갑제 선생이, 국군 제1사단이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다부동 전투는 북한군 주력을 최초로 격퇴해 유엔군의 반격을 가능하게 한 결전장으로 워털루, 노르망디에 비견된다고 했지요.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의 토대가 됐으니 양국의 최고사령관을 모시기에 그 이상의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부동(多富洞)이 부자가 많이 사는 동네란 뜻이더군요.

“이름 그대로 됐지요. 한미군 1만명이 흘린 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켜낸 덕분에 대한민국이 지금 부자 마을이 되지 않습니까?(웃음)”

-이승만 동상을 김구 동상보다 더 크게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셨다면서요?

“남산에 있는 김구 동상이 4미터라고 해서 그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크게 해달라고 주문했지요(웃음). 김구 선생도 훌륭하시지만, 저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룬 업적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트루먼 대통령 동상까지 세울 생각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전쟁 발발 직후 ‘우리는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서라도 싸울 것’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결사 항전 의지에 트루먼 대통령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야 한다’며 유엔 기치하에 미군 출동을 결단합니다. 트루먼이 전폭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김정은 치하에 살고 있을 겁니다. 제가 가장(家長) 역할을 해서 잘 알아요. 전쟁 3년 동안 미국의 원조 물자, 양곡, 구호품이 없었다면 우리 여덟 식구는 다 굶어죽었을 겁니다.”

-1950년 7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이 의미심장하더군요.

“종북 좌파들은 이승만이 미국의 꼭두각시였다고 조롱하는데 어림없는 소리예요. 제가 책을 많이 안 읽어 잘은 모르지만, 조갑제 선생이 발굴해 번역한 그 서신을 읽다가 감동했어요. 미국의 지원에 구구절절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도 주권과 관련된 사안엔 이승만 대통령이 양보를 안 해요. ‘대한민국 정부의 동의나 승인 없이 장차 다른 나라나 국가 그룹에서 결정하는 그 어떤 협정이나 양해 사항도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못박지요. 한국전을 ‘남과 북의 대결이 아니라 소수의 공산주의자들과 압도적 다수인 한국인들 사이의 대결’이라고 정의하는 대목도 놀라웠어요.”

-조각가 김영원은 이승만과 트루먼이 대화하는 형상으로 빚었다고 하더군요.

“두 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건 트루먼 대통령 퇴임 후인 1954년 8월 미국 미주리주의 자택이었다고 해요. 그후 69년 만에 다부동에서 재회한 겁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했을까요.

“참 보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했습니다!”

2023년 7월 27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열린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김박 앨트웰텍 회장. 뒤로 트루먼 대통령 동상이 보인다. /김동환 기자

◇ ‘아리랑 공구’에서 ‘앨트웰’까지

-겨우 여덟 살에 생업 전선에 나섰다고요.

“그때 전쟁이 났어요. 일본서 대학 나온 아버지는 책만 읽는 지식인이어서, 6남매 중 제일 사나운 제가 생업에 뛰어들었죠(웃음). 서산 피란 시절엔 지게 지고 땔감을 구하러 다녔고, 시골서 농산물을 떼다 오일장에 팔았어요. 경기상고 시절엔 학교 파하면 명동으로 달려가 고려은단 가게에서 은단을 떼다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걸으며 팔았지요. 교복을 입은 채로요. 집에 오면 밤 11시 반. 기절하다시피 잠들었죠.”

-상고 졸업하고 바로 사업을 시작한 건가요?

“슬레이트 만드는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적자 난 섬유 회사를 인수했어요. 전 직장에서 수입 업무 3년, 수출 업무 3년, 경리 4년을 해봐서 경영이 크게 어렵진 않더라고요. 워낙 고지식하고 원리원칙대로 일하는 타입이라 은행권 신용도 높았고요. 그러다 미국에서 온 한 비즈니스맨이 한국엔 공구를 만들어 수출하는 공장이 없다며 아쉬워하더라는 말에 솔깃해 겁도 없이 뛰어들었죠. 공구의 공자도 모르면서요(웃음).”

-순탄하셨나요?

“첫해에 공구를 20만 개 생산했는데 거의 다 불량품 진단을 받았어요. 섬유 수출해서 번 돈을 다 까먹었지요. 안되겠다 싶어 스테인리스 기술자들에게 노하우를 배우고, 일본 공구 회사에서 기술 교육을 받은 뒤 다시 도전했지요. 2~3년 뒤 제대로 된 공구를 생산하게 되면서 60~70kg 무게의 샘플 가방을 들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수출 판로를 찾으러.”

-거래처를 찾았나요?

“첫 한 달은 한 건도 못 땄어요. 버스터미널에서 쪽잠 자고 매 끼니를 햄버거로 때우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수주에 실패하면 회사가 부도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때 중동 근로자들 떠올리며 이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버텼어요. 체류를 한 달 연장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25만불 주문을 성사시켰지요.”

-지금은 앨트웰이란 기업을 경영하면서 23년째 민초장학재단을 운영하고 있더군요.

“사업을 시작할 때 내가 60세까지 기반을 잡으면 부국강병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등록금에다 매달 35만원의 생활비를 지원해서 당시엔 삼성장학금보다 좋다는 얘길 들었지요(웃음). 법조계, 과학계, 언론계에 다양하게 진출해 있습니다.”

-졸업생이 벌써 650명이던데, 특별한 선발 기준이 있습니까.

“성적, 인성, 그리고 애국심을 봅니다. 장학증서 수여할 때 간곡히 당부해요. 여러분이 성공해 먹고살 만하게 되면 주위의 가난한 이들을 돌아봐 달라. 그리고 당신들이 속한 조직이 부정부패하지 않도록 노력해 달라. 나나 우리 회사가 불법에 연루되면 가중 처벌로 다스려 달라.”

◇애국하는 사람이 가난하지 않도록

-보수 진영에도 아낌없이 후원한다고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이 대통령은 생명의 은인이고, 박 대통령은 내가 무역을 통해 사업가로서 성공할 수 있게 해준 분이죠. 그런데 자유 우파들은 돈도 없고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저라도 나서자 한 겁니다.”

-그러면 정권의 탄압을 받지 않습니까.

“제가 기업을 경영하는 4가지 원칙이 있어요. 국세청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금융기관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검찰 경찰로부터 자유로울 것, 언론과 시민단체로부터 자유로울 것. 그 원칙을 지켜 빚 하나 없는 10층 회사를 강남에 세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세무조사에서 자유로울 기업이 없을텐데요.

“사업 시작하고 첫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2300만원의 과세를 당했어요. 부당하다고 여겨 국세청을 제소했지요. 당시 여러 사람이 국세청을 상대로 싸우는 바보가 어디 있냐, 그래서 재벌 되겠냐 말렸지만, 저는 법대로 하겠다고 했어요.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해 2300만원을 되찾고 이자 300만원까지 받아냈지요. 명색이 부국강병을 꿈꾸는 기업인이 1원이라도 탈세를 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요?”

-보수의 가치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배고픈 사람이 없게 하는 것.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리사욕과 부정부패를 멀리해 종북 좌파들이 공격할 틈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겠군요.

“대한민국을 구석구석 망쳐놓은 분이죠. 비유하자면, 기계를 뜯어 부수기만 한 게 아니고 거기다 모래를 끼얹어 아예 작동하지 못하게 해놓은 셈입니다.”

-그런데 퇴임 때 지지율이 40%대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국민을 싫어합니다, 하하!”

-윤석열 대통령은 잘하고 있습니까.

“고시를 9번 만에 합격했다는 게 마음에 들더군요. 실패하면서 축적한 인간의 크기가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평생을 범죄자들과 싸운 사람이잖아요. 얼마나 뚝심이 강하겠습니까.”

-팔순잔치는 하셨나요.

“먹고 사느라 바빠서 생일 같은 건 챙겨본 적이 없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한테 맞은 날은 이상하게도 꼭 생일이었지요(웃음).”

-부모님이 아들에게 미안하셨을 것 같습니다.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은 부모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지혜와 투지를 쌓을 수 있는 고생의 순간을 주셔서 제가 이만큼 살게 된 거라고 생각하지요.”

-건강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술과 담배를 안 합니다. 젊어선 살기가 느껴질 만큼 눈빛이 강렬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많이 흐려졌지요(웃음).”

-스트레스는 어떻게 풉니까.

“자동차 안에서 혼자 노래를 불러요. 평생 기사를 두지 않아서 차 안이 저의 자유 공간입니다.”

-어떤 노래를 부릅니까.

“나그네 설움. 내가 살아온 인생과 비슷해서요.”

-남은 생에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나요?

“이승만, 박정희 동상을 광화문, 전쟁기념관, 코엑스 등 전국 곳곳에 세우고 싶어요. 애국하는 분들이 가난하게 살지 않도록 돕고 싶습니다.”

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앨트웰 빌딩에서 만난 김박 회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미니어처 동상을 들고 웃었다. 그의 집무실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이태경기자

☞김박

1942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상고를 졸업했다. 여덟 살 때 6·25전쟁이 일어나 충남 서산에서 피란 시절을 보내며 생업 전선에 나섰다. 상고를 졸업한 뒤 슬레이트 업체에 다니다 ‘아리랑 공구’를 창업했고, 1978년 ‘앨트웰’을 창업해 기능성 속옷, 공구 세트, 정수기를 판매하는 연매출 450억 규모 회사로 키웠다. 앨트웰은 ‘이타주의(altruism)의 샘(well)’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