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2월 28일 상해교민단의 이승만 환영회 모습. 배경에 태극기가 있고 그 위에 ‘대통령 리승만’이라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오른쪽 마지막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뒤에도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계속했고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 독립운동 직후 1919년에 상해에서 세워졌다가 1945년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면서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렇게 26년 동안 존속하면서, 임시정부는 줄기차게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끝내 영토와 인민을 되찾아 대한민국을 세웠다. 이런 성과는 현대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 공군까지 편성한 자기 군대를 갖추고 제2차 세계대전에 당당히 참전한 폴란드 망명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소비에트 러시아의 방해로 정부를 다시 세우는 데 실패했다.

지역·이념 갈려 응집력 없던 임시정부

원래 임시정부는 여럿이 난립하고 중심적 단체도 내부적으로 분열되게 마련이다. 영토도 인민도 없으니, 권력도 재력도 없어서 응집력을 갖추기 어렵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모든 조선 사람의 충성심을 얻었다. 그들에게 ‘상해’라는 말은 그저 도시 이름일 수 없었다.

‘상해로 가는 배가 떠난다

저음의 기적, 그 여운을 길게 남기고

유랑과 추방과 망명의

많은 목숨을 싣고 떠나는 배다.’

1927년에 나온 박팔양의 ‘인천항’엔 그런 애틋함이 담겼다. 그래도 상해 임시정부 안엔 깊은 분열이 있었고 치열한 다툼이 이어졌다. 가장 깊은 분열은 지역적 분열이었으니, 조선조에서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극심한 차별을 받은 데서 유래했다. 그래서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평안도 사람들의 서북파와 이승만 주변 남쪽 사람들의 기호파 사이에 틈이 있었다.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활동이 활발해져 공산주의자들이 늘어나자, 이념적 분열이 더 큰 문제가 되었다.

다행히, 임시정부에 응집력을 주는 요인들이 작용해서 파탄을 막았다.

근본적 요인은 3·1 독립운동의 열정이었다. 모든 조선 사람이 참여한 독립운동의 뜨거운 열정은 조선 사회를 융합시켰다. 그런 열정에서 탄생한 터라, 임시정부는 어려운 고비를 넘기곤 했다.

둘째 요인은 장개석 총통이 이끈 중화민국의 지원이었다. 일본과 벌이는 싸움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한 중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꾸준히 지원했고, 덕분에 임시정부는 안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셋째 요인은 임시정부의 안정적 외교 활동이었다. 초대 임시 대통령에 선출된 뒤에도, 이승만은 국제 정치의 중심인 미국에 머물면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의 활약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고무했고, 임시정부가 흔들릴 때마다 닻 노릇을 했다. 특히 이승만이 미국 주재 중국 외교관들과 긴밀히 사귀고 그들의 지지를 얻어낸 것은 김구 주석의 입지를 강화했고 임시정부를 장악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시도를 무산시켰다.

이처럼 임시정부가 지속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지도에서 사라진 조선이 완전히 잊히지는 않았다. 그리고 1943년의 ‘카이로 회담’에서 강대국들의 독립 약속이 나왔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긴 뒤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다. 자연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교 무대에서 설 땅이 없었다. 국제 회의마다 임시정부가 파견한 대표단은 참석을 거부당했다.

이승만의 첫 성공적 외교 무대는 1933년에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였다.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이듬해에 만주국이 서자, 국제연맹은 조사단을 파견했다. 이승만이 참가하고자 한 회의는 그 조사단이 올린 보고서를 처리하는 총회였다. 총회 참가 자격이 없던 터라, 그는 중국 대표단과 협력해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런 활동을 통해서, 그는 총회가 일본의 행위를 규탄한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실질적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네바에서 벌인 활동은 이승만에게 여러 혜택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국제 외교의 실상을 경험했고 능숙한 외교관으로 자라났다. 다음엔 중국 외교관들과 교분을 터서, 뒤에 워싱턴에서 활동할 때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중국 외교관들과 맺은 교분은 당연히 중국 정부에 크게 의존한 임시정부에 큰 힘이 되었다.

더욱 중요하게, 제네바에서 쌓은 경험과 통찰에 바탕을 두고, 이승만은 장기적 외교 전략을 세웠다. 일찍이 일본의 영토가 된 조선이 되살아나려면,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잊히지 않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는 조선이란 나라가 있었고 조선 인민들이 독립을 바란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부지런히 강연했고, 미국 정부에 계속 조선 문제와 관련한 편지를 보냈고, 국제 회의에 참석하려 애썼다.

나아가서 그는 일본의 해외 팽창 정책이 조만간 미국과 충돌로 이어지리라고 판단했다. 일본이 미국을 이길 수는 없으므로, 그때 조선이 독립할 기회가 온다고 그는 내다보았다. 이 대담한 추론은 그의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에 설득력 있게 기술되었다. 일본의 미국 침공 직전에 나온 이 뛰어난 저작은 합당한 명성을 얻었고 그의 권위를 높여서 그의 외교 활동에 큰 운동량을 주었다.

국제회의·강연… ‘조선 알리기’ 총력

여기서 살펴야 할 점은 이승만이 외교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가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경의 일본군 초소들을 공격하는 것을 비판했다. 일본군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면서, 소중한 인적 자원을 낭비한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군은 유격전을 펼 수밖에 없었으므로,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인 만주의 조선인 동포들을 박해할 터였다. 그의 걱정대로, 만주의 동포들은 끔찍한 화를 입곤 했다. 때가 오기 전에 군비를 서두르는 대신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그는 늘 강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군대를 키울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마침 친분이 있는 언론인 프레스턴 굿펠로가 특수 작전을 수행하는 전략사무처(OSS)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이승만은 OSS 요원 후보로 한국인 청년들을 추천했고, 여러 사람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다. 특히 장석윤은 OSS의 버마 작전에 참가해서 공을 세웠다.

1944년 7월에 이승만은 미군 합동참모본부에 편지를 보내서 일본과 벌이는 전쟁에 한국인들을 활용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미국에 있는 한국인 청년들과 태평양의 섬들에서 일본군을 돕다가 미군에 붙잡힌 한국인 노무자들을 훈련시켜 한반도로 침투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OSS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냅코 작전(NAPKO Project)’을 출범시켰다. OSS의 전설적 인물인 칼 아이플러 대령이 책임자가 되었고, 장석윤이 실무를 맡았다.

1944년 11월에 장석윤은 미국 위스콘신주의 포로수용소에 스스로 포로로 갇혔다. 그리고 버마에서 비행장을 닦다가 연합군에 붙잡힌 노무자로 행세하면서 포로들을 관찰했다. 법무장관과 간수 넷만 그의 신분을 알았다. 그런 관찰에 바탕을 두고서 그는 특수 작전에 적합한 요원들을 뽑았다. 이 노무자들에 미국에 있던 한국인 청년들과 한인 사회 지도자들이 더해져서, 한반도에 침투할 부대가 구성되었다.

선발된 요원 55명은 10조로 나뉘어 서로 분리돼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소형 반잠수정 3척으로 해안에 접근하도록 되었다. 작전은 1945년 8월 하순에 실행할 터였다. 그러나 일본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냅코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같은 시기에 중경 임시정부가 OSS의 도움을 받아 추진한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도 같은 사정으로 중단되었다).

국제 정세는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도 이승만은 일본과 미국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부딪치리라고 예견했고 그런 예측에 바탕을 두고 독립운동의 전략을 세웠다. 차츰 잊히는 조국을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기회가 날 적마다 외교를 통해 상기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기회가 나오자, 그는 군대를 창설하는 일에 착수해서 구체적 성과를 얻었다. 이처럼 그가 멀리 내다보고 세운 전략을 어려운 시기에도 꾸준히 추구한 덕분에 대한민국이 다시 설 기회가 마련되었다.

[ ‘운명의 동반자’ 프란체스카]

“난 한국 사람이에요… 오스트리아에서 우연히 태어났을 뿐”

1933년의 제네바는 독립운동가 이승만에겐 운명적 시공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했으니, 거기서 그는 오스트리아 여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다.

프란체스카는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쓰는 동양의 노신사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외교관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간소한 식사와 외교관다운 예절이 그녀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그의 기사가 크게 난 신문을 그에게 전달했고 끝내는 그의 서류 작성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1935년 1월 24일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한 이승만 부부. 이승만은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에 참석했다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났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그는 이미 58세였고 그녀는 33세였다. 당시 유럽에선 인종차별도 심했다. 게다가 그는 국적도 재산도 없었다. 당연히, 그녀 가족은 그들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래도 프란체스카는 연인을 찾아 혼자 대서양을 건넜다. 그들의 신혼 여행은 미국을 가로질러 이승만의 근거인 하와이로 가는 여정이었다. 그들이 만난 교포는 거의 다 가난했다. 영양 실조에 걸린 이도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찬장에 넣어두었던 몇 달러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어 놓았다.

이승만은 아내에게 하와이에서 병사한 교포들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서 고국에서 신부를 데려오는 꿈을 키우다가 죽게 되자, 그들은 결혼 자금으로 모은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어놓고 이승만의 무릎을 베고 운명했다. 그제서야 왜 남편이 3등 열차, 3등 선실을 고집하는지 깨달았다고 그녀는 술회했다.

만년에 그녀는 시간이 나면 남편 묘소를 찾았다. 하루는 한 서양 남자가 현충원에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스트리아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녀도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한국 사람이에요. 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