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시안 반도체공장. 최진석 전 하이닉스 부사장은 이곳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삼성전자 반도체 복제 공장'을 짓고, 18나노급 메모리 반도체 시제품을 만들었다는게 검찰의 기소 내용이다.

2001년 10월 하이닉스 제조본부장 최진석 상무가 채권단 대표 이연수 외환은행 수석부행장을 찾아왔다. “구세대 설비로도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 해법이 있습니다.” 당시 채권단은 하이닉스가 자금 부족으로 몇 년째 신규 투자를 못 해 기업 회생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도표까지 만들어 와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이 부행장) 채권단의 지지를 얻은 하이닉스는 최 상무 지휘 아래 구세대 장비로 당시로선 최첨단인 256메가 D램을 만들어내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반도체 생산 달인’ 최씨는 2009년 국가에서 산업훈장을 받았다. 서울대가 뽑은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도 선정됐다.

◆삼성과의 舊怨

이런 경력을 가진 최씨가 삼성전자의 설계도를 훔쳐 중국에 ‘반도체 복제 공장’을 만든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 측은 “물증이 확보된 것만 우선 기소했다”고 말하지만, 최씨는 “검찰이 ‘훔쳤다’고 주장하는 기술은 ‘국가 핵심 기밀’이 아니며, 삼성이 구원(舊怨) 탓에 나를 죽이려 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과거 최씨와 삼성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58년생 최씨는 경북대 금속공학과를 나와 한양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삼성전자 엔지니어 출신이다. 삼성에서 승승장구해 40대에 임원이 된 그는 2001년 갑자기 삼성을 떠난다. 전후 사정을 잘 아는 업계 관계자는 “당시 삼성 자체 감사에서 최씨와 납품 업체 J 기업 간의 뒷거래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J 기업은 지금도 혐의를 부인하지만, 삼성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절 거래를 하지 않고 있다.

그래픽=양인성

◆하이닉스 이후 행적

하이닉스에서 눈부신 성과를 낸 최씨는 사장 후보에 올랐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낙마하고 2010년 하이닉스를 떠난다. 이후 STX, 한화그룹 등을 거쳐 2015년 싱가포르에 반도체 컨설팅 업체 ‘진 세미컨닥터’를 설립했다. 진 세미컨닥터는 세계 굴지의 반도체 메이커 마이크론 등과 거래하며 입지를 다진다. 그러던 중 2018년 최씨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될 만한 사업 제안이 들어온다. 대만 휴대폰(아이폰) 제조 기업 폭스콘이 62억달러(약 8조원)을 투자할 테니 중국에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지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삼성전자, 하이닉스 출신 엔지니어 200여 명을 스카우트하고, 공장 설계도를 작성하는 등 1년 남짓 준비 작업을 마무리할 즈음, 돌연 폭스콘이 프로젝트 중단을 통지했다. 다급해진 최씨는 중국 지방정부의 투자를 받아 반도체 공장을 짓는 대안을 추진하기 위해 중국 지방정부 10여 곳과 접촉했다. 2020년 9월 중국 청두시가 손을 내밀었다. 중국 청두시와 최씨가 6대4로 투자해 합작 법인 CHJS를 만들었다. 삼성전자 시안 공장 인근에 공장을 짓고 시제품 제작에 들어갔다. 놀라운 속도로 18나노급 메모리 반도체 시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제품 수준과 수율이 청두시를 만족시키지 못했다(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보도). 최씨의 시제품은 삼성전자가 2016년에 양산한 수준의 제품이었다.

◆폭스콘이 돌연 투자를 중단한 이유

만약 폭스콘이 62억달러 투자 약속을 지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최씨의 꿈대로 삼성·하이닉스·마이크론 뒤를 잇는 세계 4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폭스콘이 돌연 투자를 중단한 이유는 뭘까. 국내 반도체 업계의 해석은 이렇다. ‘평소 ‘타도 삼성’을 외쳐온 폭스콘이 메모리 반도체 생산으로 삼성에 일격을 가하려 했다. 그런데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이 격화되는 바람에 애플에 아이폰을 납품하는 폭스콘이 미국에 밉보이면 곤란하다고 판단해 투자를 중단했다’는 것이다. 당사자 최씨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 ‘친중파 기업인으로 대만 총통이 되고 싶어 하는 폭스콘 회장이 중국에 잘 보이려 중국 소재 메모리 반도체 공장 설립 계획을 세웠는데, 2019년 국민당 총통 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떨어지자 갑자기 투자 계획을 접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반도체를 둘러싼 국제 지정학 변수가 최씨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복제 공장’ 사건이 던진 과제

최씨와 변호인은 중국의 반도체 공장 설립에 활용한 기술은 검찰이 말하는 ‘국가 산업 기밀’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씨 변호를 맡은 김필성 변호사는 “산업기술보호법은 ‘30나노 이하 반도체 설계·공정·소자 기술’을 국가 핵심 기술로 지정하고 있는데, 최씨가 공장 건설에 활용한 클린룸, 생산 라인 배치 기술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최씨가 국가 핵심 기술을 훔쳤는지 여부는 향후 재판에서 밝혀지겠지만, 이번 사건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 큰 숙제를 던지고 있다. 중국 반도체 기업의 한 임원은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한국 기술 훔치기가 중국에선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반도체 공장 복제’ 시도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최씨는 중국 반도체 공장 추진 이유에 대해 “한국 반도체 산업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거기에 납품하는 소수 하청 업체가 전부”라며 “반도체 하청 업체들에 새 납품처를 제공해 한국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더 풍성하게 만들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최씨의 변명 속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부와 기업은 퇴직 엔지니어들에게 재취업 기회를 주고, 그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재활용하기 위해 반도체 생태계를 다양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한국 반도체 공장 출구 전략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반도체 공장에 60조원 이상을 투자했다. 삼성전자 시안 공장에선 낸드 반도체의 40%, SK하이닉스 우시·다롄 공장에선 D램 반도체 50%, 낸드 30%를 각각 생산하고 있다. 미국의 중국 반도체 규제 핵심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반도체의 기술 수준에 제한을 두는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춘 곳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공장밖에 없다.

미국의 제재로 삼성전자·하이닉스 중국 공장으로의 첨단 장비 반입이 몇 년 내에 금지될 가능성이 크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면 삼성전자·하이닉스 중국 공장은 하루아침에 경쟁력을 잃고 투자금도 고스란히 매몰비용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중국 공장을 유지할 경우 ‘반도체 복제 공장’ 사건처럼 반도체 제조 기술, 인력의 유출 가능성이 커지는 위험도 있다. 이런 위험을 줄이면서 안전하게 중국을 탈출하는 출구 전략은 없을까.

‘반도체 삼국지’ 저자인 성균관대 권석준 교수가 제시하는 해법이 주목할 만하다. 중국 공장의 생산 품목을 첨단 메모리 반도체에서 다른 품목으로 바꾸고, 중국 생산 비율을 점차 줄여나가는 것이다. 앞으로 중국 내 반도체 수요가 대폭 늘어날 차량용 반도체, 전력 반도체, 아날로그 반도체 등으로 생산 품목을 바꾸고, 반도체 제조 라인을 20~28나노 수준의 레거시(옛 공정) 파운드리로 바꾸면 세대가 지난 장비도 계속 활용하면서 반도체 생산을 지속해 투자비를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반도체 공장에서 기존 D램, 낸드 메모리 생산량은 몇 년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줄여 나가고, 대신 국내 공장 생산량을 늘리면 시간을 벌면서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평택, 용인 클러스터에 반도체 제조 라인을 증설하고 있어, 이 정도 증산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권 교수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