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에서 이승만과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나란히 앉아있다. 이승만은 선포식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한다”고 했다./조선일보DB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재적 의원 198명 가운데 196명이 출석해서 투표했는데, 이승만이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엔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7월 24일 부슬비 내리는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나 이승만은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그날 오후부터 집무했다.

먼저 처리할 일은 내각을 꾸미는 것이었다. 자리는 적고 지망자는 넘치는 터라, 조각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대통령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삼아 내각을 꾸몄다. 늘 정파에 초연하려고 애써온 그는 자신을 지지한 한민당의 과도한 요구를 물리치고 거국 내각의 면모를 지닌 내각을 꾸몄다.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로 꼽힌 농지 개혁을 주도할 농림부 장관에 공산주의자 조봉암을 기용한 데서 그 점이 잘 드러났다.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오전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열렸다. 이 대통령은 “오늘에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국민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는 것입니다”라고 식전(式典)의 뜻을 밝혔다. 그는 “건국 기초의 요소가 될 만한 몇 조건”으로 (1) 민주주의에 대한 전적인 믿음, (2) 민권과 개인 자유의 보호, (3) 사상의 자유에 바탕을 둔 포용적 태도, (4) 정부와 법에 대한 충성, (5) 생활 수준의 향상, (6) 한미 협력과 경제 원조를 들었다. 그리고 “이 정부가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우리는 이에 선언합니다”라며 연설을 매듭지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세계에 선포하는 기념식장인 중앙청에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참석해 이승만 부부에게 축하인사를 하고 있다./'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이어 도쿄에서 찾아온 맥아더 사령관을 비롯한 외빈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하지 사령관은 “재조선 미군 정부는 오늘 밤 자정으로 폐지되고 한국 주둔 미군 사령부 민사처가 생긴다”고 발표했다.

비현실·보복적이었던 반민법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은 가장 뜻깊은 식전이고 이 대통령의 식사는 가장 뜻깊은 연설이다. 그래서 우리는 1948년 8월 15일에 어떤 날보다 깊은 뜻을 둔다. 그래도 당시 상황을 살피면, 우리는 그날의 뜻깊은 식전도 선언적 사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을 실제로 세우는 일은 힘들 뿐 아니라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남한 사회는 가난했고 불안했고 심각한 문제들이 겹쳐 있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행정 조직은 허약했고 재정은 빈약했다. 오랫동안 식민지 체제에서 살았으므로, 국민들은 생활 수준과 지식 수준이 낮았다. 따라서 국가를 운영할 만한 인적 자원이 크게 부족했는데, 행정 경험을 지닌 사람들은 ‘친일파’로 간주되어 인적 자원이 더욱 빈약해졌다.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전시 체제 아래 사람들의 삶이 피폐했으므로, 쓸 데는 많은데 세금을 거두기는 어려웠다.

당장 급한 것은 해외와 북한에서 온 수백만 동포를 재우고 먹이는 일이었다. 북한이 단전한 터라, 산업은 마비되었고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비축된 식량이 없었으므로, 쌀값은 빠르게 올랐고, 걷잡을 수 없는 물가 상승이 경제를 위협했다.

치안도 극도로 불안했다. 남로당은 아직도 준동했고 4·3사건도 평정되지 못했다. 이처럼 어지러운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주동으로 여수 주둔 14연대 병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 대구, 김천, 나주 등지에 주둔한 부대들이 봉기했다. ‘여수 순천 반란’이라 불리는 이 봉기는 북한의 실질적 통치자 시티코프가 “남조선 군대의 장악”을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지시해 일어났다.

자연히 군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는 일이 긴급했다. ‘숙군(肅軍)’이라 불린 이 정화 작업은 위험했고 불완전했다. 그래서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육군과 해군 요직들엔 북한에 충성하는 고급 장교들이 있었다. 다행히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보안 조치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져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어 공산주의자들의 암약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좌익 성향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주도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만들어졌다. 반민법의 목적은 식민지 시기에 일본 제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면서 조선 민족의 이익을 크게 해친 사람들의 처벌이었다. 반민법이 본질적으로 정화법(淨化法)이었으므로, 법의 기본 원칙인 ‘형벌 불소급 원칙’을 어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처벌이 조심스러워야 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실질적 지배가 두 세대에 걸쳤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반민법은 범위와 처벌에서 비현실적으로 보복적이었다. 특히 경찰관들을 처벌 대상으로 삼아 마구 체포하는 바람에, 경찰이 집단적으로 반발해서 치안이 크게 흔들렸다. 결국 사회를 정화해서 융합시킨다는 목적을 지닌 법이 오히려 사회 분열을 심화했다.

국제 정세도 긴박했다. 1948년 9월의 파리 유엔(UN)총회에서 대한민국이 승인을 받도록, 정부는 대표단을 보냈고 특별 사절단이 주요 국가들을 순방하도록 했다. 그러나 여러 나라가 남한 단독정부는 “한국을 영원히 분단시킨다”는 주장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남북협상파는 유엔 사무총장에게 편지를 보내 “어떤 한인이든지 자유의사로 말하라 하면 반쪽 조국 위에 세워진 정부를 자기의 통일 정부라고 부르지 아니하며, 그 정부가 자기들의 행복을 줄 것이라고 승인하지 아니하리라”고 주장했다.

총회 마지막 날인 12월 12일에 미국, 중국, 오스트레일리아가 공동 발의한 결의안이 총회에 회부되었다. 핵심적 내용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것이었다. 이 결의안은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로 통과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정부군이 공산군에 패배한 터라, 남한에선 위기감이 더욱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자기 군대를 1949년 1월 1일까지 철수시킨다고 발표하고 미국도 함께 군대를 철수하자고 제안했다. 김구는 러시아의 결정을 환영하며 미국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급해진 이 대통령은 내외 기자들과의 회견을 통해 “한국이 국방군을 건설할 때까지 미국은 남한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라고 미국에 촉구했다.

이 대통령은 미군 철수를 막으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미국의 기본 정책에 관한 일이라서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무기라도 제대로 얻으려 애썼지만, 미국은 자신에게 별 쓸모가 없는 무기들에도 인색했다. 중국에서 정부군이 패배하도록 만든 공산주의자들이 백악관과 국무부를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마침내 1949년 6월, 군사고문단 5백명만을 남기고 7만명가량 되었던 미군이 모두 한국을 떠났다.

1948년 8월 5일 중앙청 대통령실에서 첫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승만은 첫 조각에서 정파를 초월한 거국내각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왼쪽부터 민희식(교통), 전진한(사회), 안호상(문교), 김도연(재무), 장택상(외무), 이범석(총리), 이승만, 윤치영(내무), 임영신(상공) 등의 얼굴이 보인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승만 정권은 어려운 문제들에 대응하면서 국정을 잘 운영했다. 덕분에 대한민국은 빠르게 안정되었고 뿌리를 내렸다. 이 점은 경제적 평등과 농업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여겨진 농지 개혁에서 잘 드러난다. 농지 개혁에서 핵심은 농지를 내놓는 지주에 대한 보상액과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의 상환액이었다. 오랜 논의 끝에, 보상액과 상환액을 ‘당해 농지의 주 생산물 생산량’의 150%로 해서 5년간 균분하기로 되었다. 정부의 재정 부담 없이 개혁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1950년 5월까지 분배 대상 농지의 70~80%가 실제로 분배되었다.

중국서 공산당 승리, 위기감 커져

1950년 5월 30일엔 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졌다. 신생 국가가 맞는 가장 큰 정치적 위험은 첫 지도자의 독재다. 그래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다시 치르는 것이 건국 과정의 마지막 시험이다.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여당을 자임한 대한국민당이 71석에서 24석으로 줄어들었고,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은 69석에서 24석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무소속은 무려 126석을 얻어 전체 의석 210석의 60%를 차지했다. 이런 의석 분포는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하게 치러졌음을 유창하게 말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어려운 마지막 시험을 거뜬히 통과하고 튼실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마침내 건국의 과업이 마무리된 것이었다.

이 선거가 치러지고 채 한 달이 안 되어 일어난 6·25전쟁은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초기 전투에서의 완패라는 충격에도 대한민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북한군을 물리쳤다.

[일본이 남긴 귀속 재산 처분]

대기업도 민간 불하… 시장경제 지향으로 경제발전 토대 마련

미군정청은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이 남한에서 소유했던 재산을 모두 자신에게 귀속시켰다. 그래서 이 재산은 미군정청에 귀속된 재산(vested property)이라 불리게 되었다(대한민국이 선 뒤엔, 귀속 재산은 흔히 적산(敵産)이라 불렸다).

이런 귀속재산은 다양하고 방대했으니, 사회간접자본, 공공시설, 산업 시설 및 각종 무형 자산을 포함했다. 자연히 가치도 엄청나서 당시 남한 총자산의 80퍼센트를 넘었다.

귀속재산 가운데 산업 시설이 문제가 되었다. 다른 재산들은 정부나 공공 기관들에 이전될 터였지만, 산업 시설은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남한에선 시민들에게 분배되어야 했다. 당시 여론은 대기업들도 정부 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 대통령은 이런 여론을 거스르면서 대기업들도 시민들에게 불하되도록 했다. 이 조치는 우리 사회가 시장 경제를 지향해서 경제 발전을 이루는 과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아울러, 귀속재산의 처분 과정도 공정했다. 정부 재산의 민간 불하엔 부정이 따르게 마련이다. 비록 많은 추문이 일었지만, 객관적 기준으로 살피면, 귀속재산 불하는 놀랄 만큼 깨끗했다.

명령 경제 체제가 시장 경제 체제로 바뀔 때 나온 상황은 이 점을 보여준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방대한 국유재산 불하 과정에선, 엄청난 부패를 통해 과두 재벌들(Oligarchs)이 생겨났다. 과두 재벌들은 시장 경제로의 전환을 시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절에 이미 나왔고, 보리스 옐친과 블라디미르 푸틴의 통치 아래 빠르게 커졌다. 이들은 국유재산을 헐값에 불하받았을 뿐 아니라,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

이런 부패는 기업가들과 정치 지도자들 사이의 유착에서 나왔다. 당연히 정치 지도자들도 큰 재산을 모았다. 해외 원조를 받은 나라들에서 원조 자금이 해외로 새나가는 일도 흔하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지도층에 만연한 부패는 잘 알려졌다. 이승만 정권에선 이런 종류의 국부 약탈이 전혀 없었다. 이 대통령의 전설적 청렴이 그런 부패가 나오는 것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