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 의원이 정의기억연대 후원금 횡령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은 날, 이용수 할머니는 “저는 드릴 말씀이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윤 의원 수사는 3년 전 이 할머니 기자회견으로 시작됐다. 지난 4일 대구 자택에서 만난 할머니는 “기자회견 후 (쏟아진 비난에) 죽어버릴까도 했지만, 내가 죽으면 일본의 사죄를 받아낼 수 없지 않나”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90세가 넘어 기억이 왜곡돼 있다는 정의연의 말은 거짓이었다. 95세의 이용수는 날짜, 시간, 사람 이름까지 또렷이 기억해 내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죽은 손영미 생각하면 가슴 아파
-윤미향 의원이 2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저한테는 다 비밀로 했으니 (윤미향이) 뭘 속이고 뭘 했는지 제가 알 바 없습니다. 위안부 문제 꼭 해결하자 약속했던 윤미향이가 돈에 눈이 어두워 그랬나, 돌변해 가지고 (국회로) 나간 게 괘씸했을 뿐이지요.”
-1심에선 사실상 무죄 판결이 나와 민주당 이재명 대표부터 윤 의원에게 사과를 했지요.
“만나는 사람마다 욕했지만 나는 예사로 봤어요. 설령 의원직을 상실해도 좋은 건 다 누리지 않았습니까. 윤미향이가 죄를 살든 말든 관심 없어요. 그저 죽기 전에 위안부 문제 해결해야 하는데 아무 진척 없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윤 의원은 선고 후 자신의 30년 위안부 운동을 폄훼하지 말라고 했던데요.
“그럴 자격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기자회견 당시 윤미향은 할머니 기억이 왜곡됐다고 반박했지요.
“1992년 6월 25일, 내 위안부 피해 신고를 받은 사람이 정대협 간사였던 윤미향이에요. 일본에 끌려갔다 온 걸 밝히는 게 무서워서 처음엔 이용수가 내 친구라고 했지요. 기자회견에서 흠을 잡을 수 없으니, 그때 얘길 꺼내 날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몰고 가데요.”
-윤미향은 애초 기자회견을 말리지 않았나요?
“(국회의원 출마를) 다시 생각해라. 나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하겠다 약속하지 않았나. 그러면 기자회견 하겠다 하니 당당하게 ‘마음대로 하세요’ 하더군요.”
-국회로 가면 위안부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윤미향이 의원 돼서 뭘 했습니까? 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사람이 독해도 그렇지. 할머니들 뒷수발해 주던 그이만 안타깝게 죽었어요.”
-자살한 정의연 마포 쉼터 손영미 소장 얘기인가요?
“그 사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 왜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경희대 후문의 또 다른 쉼터에서 일할 때 내가 윤미향이한테 여기 벽시계라도 하나 걸어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할머니, 이거 다 공금이에요’ 하는 거라. 그래서 내가 사다 줬어요. 손영미가 어찌나 고마워하던지.”
-윤 의원이 용서를 빌러 대구로 왔었지요?
“나도 사람입니다. 무릎 꿇고 용서를 빌더니 돌아서 나가다 말고 날더러 안아 달라고 해요. 늙은 마음에 눈물이 콸콸 나데요. 너하고는 이게 마지막이다 싶고. 그러나 용서한 적 없습니다.”
◇'기억의 터’ 철거, 왜 반대하나
-임옥상 작가의 ‘기억의 터’가 철거됐습니다.
“난 철거하라고 했어요. 서울시에서 새로운 기념물 만들어 준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
-정의연은 서울시가 위안부 역사를 지우려 한다며 반대 시위를 했습니다.
“천지를 모르고 날뛰지요. 다른 것도 아니고 끔찍한 성범죄를 당한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곳에 그런 작품을 두면 죄가 되지 않겠어요.”
-정의연에 이어 경기도 ‘나눔의 집’도 수사를 받았지요?
“둘 다 우릴 참 많이 속였어요. 내가 외국 나가서 증언할 때 한국에 오면 수요 집회나 나눔의 집에 꼭 오시라 말하는데, 정작 그들이 오면 우릴 못 만나고 돌아가요. 정대협과 나눔의 집에서 내겐 연락을 안 하는 거라. 외국 다니며 쌓인 내 비행기 마일리지도 자기들 맘대로 사용해서 내가 막 퍼부은 적도 있어요. 소녀상 세운다고 모금을 해도, 할머니들 데리고 영화를 찍어도, 그 수익금이 다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의혹 폭로 후 김어준의 배후설을 비롯해 비난을 많이 받으셨죠? ‘낮은 목소리’를 만든 변영주 감독은 ‘그 할머니는 원래 그런 분’이라고 했더군요.
“이토 다카시라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증언 현장을 따라다니며 사진 찍는 일본 작가가 있는데 변영주가 그이 사진을 허락 없이 사용했다고 고소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할머니들 사진은 네 멋대로 찍어놓고 그걸 왜 못 쓰게 하노, 하면서 이토 다카시를 꾸짖었지요. 그렇게 해결해 줬는데 날 모욕하데요.”
-할머니들만 고통받는군요.
“박옥선이는 누워서 코로 밥을 먹는 게 10년이 넘었어요. 강일출은 치매에 코로나까지 걸려서 후유증이 심해요. 난리 통에 간호사도 떠나고, 봉사자도, 후원금도 다 끊겼지요.”
-기자회견한 걸 후회하십니까?
“후회는 안 해요. 그런 결단을 어떻게 했나 싶고. 이 문제를 꼭 해결하고 죽어야 하는데 나이는 먹고 기력은 떨어지니 안타까워서 내가 많이 울어요. 먼저 간 할머니들 볼 낯이 없어서.”
◇대통령 안 믿으면 누굴 믿습니까
-30년 걸친 싸움이 되다 보니 피로감을 느끼는 국민도 있습니다.
“일본을 그만 용서해 주라고 하더군요. 그게 이기는 거라고. 내 생각은 다릅니다. 일본은 지금도 강제 동원이 아니었다고 거짓말을 해요. 정치인들의 망언을 보세요. 위안부였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거라고, 한국엔 기생집이 많아 위안부가 일상적인 일이었다고 하지 않나요. 그런데 무엇을 용서하란 말입니까. 돈을 바라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일본이 강제 동원을 깨끗이 인정하고 총리가 사과한 뒤 양국이 평화롭게 사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일본은 국가의 강제 동원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고 맞섭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증거예요. 우리의 기억, 우리의 증언이. 이제 9명 남았어요. 우리가 죽으면 다 사라집니다.”
-일본은 사과도 여러 차례 했다고 주장합니다만.
“사과는 피해자에게 하는 건데 나는 일본에서 어떤 사과도 받은 적 없습니다. 아베는 부시 앞에서 사과 했다는데, 왜 미국에다 사과를 합니까. 한일 청구권 협정(196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협상(2015년) 모두 피해자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엉터리예요.”
-’아시아 여성 기금’ 등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 중심으로 보상 노력이 있었습니다.
“보상과 배상은 달라요. 보상은 그냥 미안해서 주는 눈물 값이고, 배상은 죄에 대한 법적 처벌이에요. 그래서 보상을 거부하고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 청구를 한 겁니다. 그것도 안 되면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서 판결을 받으려고 해요. 그건 일본도 원하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인정할 겁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주인공으로,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위안부결의안이 통과되던 날 가장 기쁘셨겠습니다.
“너무 부끄러웠지만 우리 얘기를 만천하에 알려야 하니 구심에 청심환까지 먹고 연단에 섰지요. 만장일치로 결의안이 통과됐을 때 긴장이 풀려 휘청거리자 마이크 혼다 의원이 부축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선 후보 시절 윤석열 대통령을 만났지요?
“날 만나러 대구 위안부 역사관에 오셨어요. ‘대통령이 안 돼도 이 문제를 꼭 해결하겠다’ 하셔서 깜짝 놀랐지요. 세계 정상들과 외교를 잘하시니 위안부 문제도 잘 해결해 주실 거라 믿어요. 대통령을 안 믿으면 누굴 믿습니까.”
-대구에 위안부 역사관이 있나요?
“학생들이 역사를 올바로 알아야 하니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마련했는데 적산 집이라 비가 오면 물을 퍼내야 할 정도로 열악해요. 사진 하나 붙여 놓을 데 없이 비좁고요. 정부가 도와주면 좋은데 말도 못 하고 있지요.”
◇다음 생에는 女軍으로
-64세에 위안부 피해 신고를 하셨지요.
“91년 김학순씨가 최초로 증언한 뒤 피해자 신고를 하라는 소식이 동네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왔어요. 처음엔 무서웠어요. 사람들이 다 알게 될까 봐. 그러다 바로 밑 남동생이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는데, 그때 45년간 숨겨온 이야기를 털어놨어요. 동생이 ‘누님, 얘기하이소, 꼭 하이소’ 하고 죽었어요.”
-악몽을 꿉니까.
“한동안 낮에는 밖에 못 나갔어요. 누가 잡으러 올까 봐. 위안소에서 전기 고문 당한 후유증에 가만 있다가도 살이 떨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땀이 줄줄 흘러요. 자다가도 흐느끼고.”
-사랑했던 사람은 없었나요?
“왜 없을까요. 근데 우리 민족은 순결이 중요하니까.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이 몸으로 결혼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젊어서 미인이셨다던데.
“눈이 요래 작은데 미인은 무슨. 피부 하나는 끝내줬지요(웃음). 구청장이 웨딩드레스 입는 추억을 만들어줬는데, 혼자 드레스 입고 거울 앞에 서니 세상에 이렇게 가여운 신부가 없어요.”
-위안부 누드집 파문으로 배우 이승연씨가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사죄할 때 꼭 안아주시더군요.
“모르고 했지, 알고는 그리했겠나 싶어서. 수요 시위 하면서 내가 성질이 나빠져서 그렇지 온순하고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웃음).”
-추석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가만히 있으니까 지나가데요.”
-연휴 직전에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다녀갔더군요.
“따뜻한 분이에요. 필요하신 게 뭐냐고 해서 화장품이랬더니 사다 주고, 편지도 주시고. 그만둔다니 섭섭해서 ‘가지 마세요’ 했어요.”
-경북대에서 국제법을 공부하셨다고요.
“일본과 싸우려면 단디 알고 싸워야 하니 사회교육원에서 역사도 배우고, 국제법도 공부했지요. 국제법은 너무 어려워서 내 머리로는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도움이 많이 됐어요.”
-어릴 때부터 제대로 공부 했으면 한자리 하셨을 텐데요.
“아홉 식구에 남동생 넷 업어 키우느라 달성보통학교를 다니다 말았어요. 풍금에 맞춰 노래하는 음악 시간이 제일 좋았지요. 지금도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다시 태어나신다면….
“여군이 될 거예요. 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게 우리나라를 지킬 거예요. 얼마나 멋집니까(웃음).”
☞이용수
1928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남의 집 유모였던 어머니 대신 동생 넷을 돌보며 면사 공장에 다니다 16세이던 1944년 일본군 위안부로 대만에 끌려갔다가 1946년에 돌아왔다. 1992년 6월 25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신고를 한 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증언했다. 2007년 미 하원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모티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