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창업주인 유일한(柳一韓·1895~1971)이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된 건 그가 남긴 유언장에서 비롯됐다. 손녀의 대학 학자금 1만달러를 제외한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다는 내용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한국 사회가 신선한 충격에 휩싸였다. 정치 비자금, 탈세, 세습 경영을 당연시하던 1970년대였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1만달러 ‘상속’의 주인공 유일링(62)씨는 “우리 가족은 오히려 ‘그렇게나 많이?’ 하고 놀라워했다”며 웃었다. “기업은 국가와 사회의 것이니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할아버지 말씀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라 전혀 놀랍지 않았다”고 했다.
유일한 박사의 하나밖에 없는 직계 후손이지만 경영에 가족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칙에 따라 그는 유한학원 재단과 보건장학회 이사로만 이름을 올린 채 미국 애리조나에서 권총 사격 코치로 일하며 산다.
◇대학에 보냈으니 자립하라
-국내 1위 제약 회사를 일군 할아버지가 유산을 1만달러만 남겨 섭섭하지 않았나?
“전혀! 스스로 능력이 있어야지, 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가 유산을 받는다는 건 우리 가족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웃음). 1만달러나 주셔서 오히려 놀랐다. 특히 저의 대학 등록금으로 남겨준 선물이라 더욱 의미 있고 감사했다.”
-외아들 유일선에게도 ‘대학까지 보냈으니 자립하라’고 했더라.
“임원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미국 변호사였던 아버지(유일선)가 60년대에 잠시 한국에 들어와 경영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안 돼 할아버지가 해고하셨다(웃음).”
-경영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걸까?
“아버지는 국내 기업 최초로 IBM 컴퓨터를 도입하고 킴벌리 클라크와 합작회사도 설립했다. 할아버지처럼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분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성장해 한국 문화에 적응하길 어려워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서로가 더 좋은 선택을 하길 원했다. 아버지는 자유를 얻는 대신 스스로 개척하는 인생을 택했다.”
-맏딸인 유재라에겐 땅 5000평을 남겼던데.
“할아버지가 부천에 세운 유한공업고등학교에 포함된 부지다. 할아버지 묘소와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유한의 문지기로서 기업과 학교에 친인척들이 얼씬 못 하게 하고, 할아버지 경영 철학에 맞게 회사가 굴러가는지 지켜보는 사명을 맏딸인 고모에게 남긴 것이다. 고모 또한 1991년 세상을 떠나면서 전 재산을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유일한 박사는 아들보다 딸을 더 신뢰했을까?
“우리 집에선 성별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이유다. 할아버지는 아내와 딸에게도 총 쏘는 법을 가르쳤다.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며. 딸에게 문지기 사명을 맡긴 것도 그 때문이다. 친척들이 일자리를 부탁할 때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고모였다.”
◇정치자금? 정직한 납세가 애국
-유일한 박사는 왜 그토록 전문 경영인 체제를 고집했을까.
“할아버지는 모든 직원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가족이나 친인척이 회사에 버티고 있으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저 자리까지는 못 올라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좌절하고 날개를 펼칠 수 없다고 하셨다. 물론 가족의 경영 참여가 나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유일한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다. 그 시대에 그런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할아버지는 아홉 살에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 네브래스카의 청교도 가정에 입양돼 일하고 공부하며 대학까지 다녔고, 졸업 후 숙주 통조림을 파는 회사 ‘라초이’를 창업해 성공시킨 사업가였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미국의 경영 철학과 시스템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미국 기업이 다 그렇진 않다.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나도 할아버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사업가가 돼 고국의 부모님을 만나러 왔을 때 할아버지는 질병과 가난에 고통 당하는 국민을 보고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 남아 뭘 할 수 있는지 고민하다 의사인 아내와 종로에 제약 회사를 세웠다. 할아버지에겐 처음부터 기업을 하는 목적이 이윤 극대화에 있지 않았다.”
-정치자금을 헌납하라는 정권의 요구를 거절해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와 세무당국이 당황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기업이 비자금을 내고 국가의 특혜를 받는 걸 당연히 여기던 때라 회사에도 할아버지를 이해 못 하는 임원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과 정치가 같이 가면 안 된다는 것이 할아버지 신념이었다. 정치자금 대신 정직한 납세가 애국이라고 믿었다.”
-교육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던 유일한은 1964년 전교생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고 기술을 가르치는 유한공고를 세웠다.
“할아버지는 국가와 국민을 더 강하게 하는 기반이 교육이라고 믿었다. 전쟁으로 폐허 된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공업 기술과 엔지니어가 절실하다고 믿고 설립한 학교가 유한공고다. 지금도 할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네가 얼마나 아느냐, 지식이 많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지식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내년이 개교 60주년이다.”
◇유일한과 펄 벅의 우정
-유일한은 이승만, 서재필과 함께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를 이끈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지만, 태평양전쟁 때 미 전략사무국(OSS) 특수 요원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반도에 침투해 일제를 타격하는 일명 ‘냅코 프로젝트’ 요원이었다. 가족에겐 한마디도 하지 않고 LA 산타칼리나섬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으셨다. 그때 나이 50세였다. 작전 수행 중 죽을 수도 있으니, 아들은 네브래스카의 친구에게, 딸은 매사추세츠에 사는 친구에게 맡기고 섬으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무척 놀랐지만, 할아버지라면 일본을 상대로 한 싸움에 당연히 뛰어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OSS에서 유일한은 펄 벅을 만난다.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는 펄 벅과 우정이 각별하더라. 그의 소설 ‘살아 있는 갈대’는 유일한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었다.
“할아버지와 펄 벅을 서로 가깝게 만든 요소는, 펄 벅이 하이브리드(hybrid)라고 표현한 혼혈 아이들에 대한 감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펄 벅이 부천에 ‘소사 희망원’을 세워 혼혈 고아들을 돌볼 수 있게 해준 분이 할아버지다. 두 사람은 자신들 또한 ‘혼혈’이라고 느낀 것 같다. 펄 벅은 미국인이자 중국인으로, 할아버지는 미국인이면서 애국심 강한 한국인으로 살았다. 그들은 둘 이상의 국가에 애국심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다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듯. 놀랍도록 진보적인 아이디어와 이를 실행에 옮기는 능력도 둘의 공통점이었다.”
-중국계였던 할머니 호미리 여사는 미국에서 소아과 의사 면허를 처음으로 딴 동양 여성이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내로서 삶의 우선순위가 국가-교육-기업-가족이었던 남편이 못마땅하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립심 강한 여성이었다. 의사인 할머니가 없었다면 할아버지는 유한양행을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겐 더없이 자애로운 할머니였다. 딱 하나, ‘끔찍한’ 추억은 있다. 할머니 댁 냉장고 문을 열면 주삿바늘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내가 맞아야 할 예방주사였다(웃음).”
-유한양행이 개발한 ‘국민 연고’ 안티푸라민에 대한 추억도 있을 것 같다.
“물론이다. 내가 먹는 걸 좋아해 과식으로 배가 자주 아팠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배꼽 주변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주셨다.(웃음)”
◇외할아버지도 건국훈장 받아
-유일한 박사가 돌아가신 날을 기억하는지.
“내가 열 살 때였다. 최고의 할아버지를 잃어버렸다며 울자 엄마가 ‘너에겐 할아버지 한 분이 더 계시지 않냐’며 위로해주시더라(웃음).”
-외할아버지는 중국 군인이었다던데.
“중국 국민당 쉐웨 장군으로, 할아버지(유일한 박사)처럼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으셨다.”
-중국 군인이 대한민국 훈장을 받았다는 건가?
“중일전쟁 때 잡은 포로들 중에 일본에 강제 징집된 한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을 분리해 조국으로 보내준 공로를 인정받으셨다고 들었다.”
-권총 사격 코치라는 직업은 두 할아버지와도 관련이 있을까.
“사격은 온 가족이 즐긴 취미였다. 어릴 때 나도 아빠한테 공기총 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예일대 사격팀의 주장이기도 했다(웃음). 예일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MBA를 하고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다 나이 마흔에 사격 코치로 직업을 바꿨다. 엄마와 고모가 6개월 간격으로 돌아가신 뒤 커다란 상실감에 빠져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다. 내가 잘하는 게 총쏘기와 가르치기여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애리조나의 사격 학교 코치로 취직할 수 있었다. 첫 15년은 군인, 경찰 등 학생이 다 남자였다(웃음).”
-90년대에 한국에서 잠시 일했다고 들었다.
“고모는 재단 문지기 역할을 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일했는데, 나를 볼 때마다 한국에 가서 유한양행과 할아버지의 정신에 대해 더 배워야 한다고 권하셨다. 경영에 참여할 수 없으니 유한의 신입사원들에게 무급으로 영어 가르치는 일을 했다. 영업사원들과 함께 공장을 견학했던 기억도 난다. 30년 전 인연을 맺은 그들과 지금도 연락하며 친구로 지낸다. 서로 늙었다고 골린다(웃음).”
-자신이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느낄 때가 있는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느끼는 것, 소신이 강해 홀로 외로운 길을 간다는 것. 그러나 할아버지는 너무 큰 분이라 내가 닮기는 힘들 것 같다.”
-’큰 그늘 아래선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그래서 우리는 큰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 갈 길을 찾았다(웃음).”
-2026년 100주년을 맞는 유한양행은 창업주의 정신을 잘 계승해 가고 있나.
“할아버지의 열정과 철학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분들이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유한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지,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 정신에 충실했던 전문 경영인들이 일군 시스템과 거버넌스가 계속해서 유지, 발전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대한민국에 유한양행 같은 기업만 있으면 K드라마를 못 만들 텐데.
“오, 노노(no)! 그건 안 된다. 한국 드라마는 정말 재미있다(웃음).”
-할아버지 유일한이 준 가장 큰 선물은 뭘까.
“등록금 1만달러와 내가 나로 살 수 있게 해준 자유, 그리고 책임감이다.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최고의 인생을 개척해서 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엄청난 부자다!”
☞유일링
196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변호사 유일선과 중국인 아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도쿄에서 유년기를 보낸 뒤 샌타바버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예일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다 40세부터 애리조나의 사격 학교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다. 한자 이름은 유은영(柳恩令). 유한학원과 보건장학회 이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