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퇴임 후 보수를 표방한 출판사 기파랑을 차린 안병훈 대표는 가장 아끼는 책으로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을 꼽았다. /남강호 기자

1995년 2월 4일 예술의전당에서 개막한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전시는 일종의 도박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승만’이란 이름은 ‘독재자’를 연상시키는 금기어였다. 이승만의 생애를 너비 7m, 길이 44m에 달하는 거대 연표와 사진으로 구성한 전시 기법도 낯설었다. 망하기 딱 좋은 전시였다.

그러나 첫날부터 대성황을 이뤘다. 일부 대학생이 몰려와 ‘반(反)이승만’ 구호를 외쳤지만 전시를 보고 나온 관람객들이 “전시부터 본 뒤 데모하든 말든 하라”며 학생들 손을 잡아 이끌었다. 개막 20일 만에 관람객 10만명을 돌파, 전국 순회전까지 40만명에 이르는 관객을 끌어모았다.

이 파격 전시를 기획한 이가 안병훈(85) 당시 조선일보 편집인이다. 그는 “서거 60년이 되어서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데에 만시지탄을 느낀다”고 했다.

◇이승만이 금기어였던 시대

-1995년 ’이승만 전시’는 이 대통령을 본격 조명한 사실상 첫 시도였습니다. 근 30년 전 어떻게 그런 발상을 했는지요.

“편집국장 시절부터 내 숙원이었어요. 건국 대통령이자, 한국 근현대사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이 거인을 우리가 이렇게 괄세해도 되나 하는 반성에서 출발했지요.”

-4·19 세대인데 이승만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습니까?

“대학 4학년 때 4·19혁명을 겪었고 종로에서 데모대에도 합류했지만 적개심은 없었어요. 하야를 결정한 뒤 ‘이제 한 사람의 국민으로 돌아왔으니 관용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집으로 가겠다’고 한 대통령 뒤를 따라 시민들도 함께 걷던 모습을 잊지 못해요. 이화장에 들어간 대통령이 나무를 손질하려는 듯 전지가위를 들고 나타나자 담장 밖 시민들이 환호했지요. 비록 하야는 했지만 국민한테 버림받은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장례식 인파가 엄청났군요.

“영구차가 나가는데 광화문의 인도와 차도가 애도 인파로 가득 찼어요. 그때 나는 조선일보 수습기자여서 광화문 한 건물 옥상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봤던 기억이 납니다.”

-이승만이란 이름은 왜 금기시됐을까요?

“하야 후 30년 동안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려는 세력이 이 대통령의 숱한 공적은 외면하고 과오만 내세워 왜곡한 탓이지요. 바로잡으려는 학자도 거의 없었고요. 그러다 보니 국민 마음에서 점차 이승만이 떠나버렸습니다.”

-신문사 안에서도 전시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요.

“이승만 때문에 부수가 떨어질까 봐서(웃음). 그만큼 (이승만이) 인기가 없었어요.”

-개막까지 거의 10년을 준비했다고요.

“1986년부터 미국과 일본 등지에 나가 이승만 관련 사진 1000여종과 문서를 수집했지요. 각종 저서와 친필 유묵까지 모두 1260여 점을 모아 거대한 연보를 제작한 겁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도배하다시피 했지요.”

-관객이 왜 그렇게 많이 왔을까요?

“진짜 이승만을 본 거예요. 우리 근현대사가 얼마나 왜곡돼 왔는지 깨달은 거죠. 이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미안함이었을 겁니다.”

-진짜 이승만이란 어떤 이승만입니까?

“이승만은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꿔놨어요. 군주전제정의 막을 내리고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을 만들어 첫 대통령이 된 인물이죠. 김일성이 스탈린, 마오쩌둥과 합작해 일으킨 남침 전쟁에서는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내 땅을 단 한 평도 빼앗기지 않고 나라를 지켜냈어요. 서방 세계 지도자들에게 뭇매를 맞으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했고, 이 방위조약이 휴전선상의 ‘만리장성’이 되어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 평화를 지속시킨 겁니다.”

광복 50주년과 창간 75주년을 맞아 1995년 2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된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展./조선일보 DB

◇김대중의 유연한 정치력

-전시 개막식에 ‘조용필 마이크’를 설치했다는 건 무슨 얘기인가요?

“김영삼 대통령을 전시에 초대했더니 청와대에서 질이 좋은 마이크를 준비해 달라고 하더군요. 수소문했더니 조용필 밴드가 쓰는 마이크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거라고 해서 직접 빌려 왔어요. 그런데 정작 축사는 안 하고 가시는 바람에 쓸모가 없게 됐지요(웃음).”

-3년 뒤 열린 ‘대한민국 50년,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승만 전시의 속편이었죠? 이 대통령의 취임 선서 육성으로 시작하는 이 전시도 첫날부터 관객이 꼬리를 물고 밀려들었더군요.

“IMF 위기 때 희망과 용기를 준 전시였죠. 무너진 경제에 탄식하던 국민들이 부모 세대가 어떻게 국난을 극복해왔는지 전시를 통해 본 겁니다. 한 초로(初老)의 여성은 실물로 재현한 가발 공장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한참을 서 있더군요.”

-김대중 대통령이 개막식에서 대한민국 50년을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평가해 다들 놀랐다고요.

“‘공산주의자들 반대를 물리치고 건국한 과정부터 6·25의 시련을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 역사는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 연설을 DJ가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승만의 건국, 박정희의 산업화를 인정하고 자신은 민주화를 완성했다고 정의한 겁니다.”

-2000년에 열린 ‘아! 6·25′ 전시는 남북 정상회담으로 무산될 뻔했다던데요.

“전시가 김일성 남침을 강조하는 내용이라 중단 위기에 처했지요. 그런데 오히려 정부에서 정상회담과 상관없이 전시를 추진하라고 하더군요. 평양을 다녀온 김대중 대통령 내외도 개막식에 오셨습니다.”

-DJ에겐 정치적 유연함이 있었군요.

“문재인과는 달랐어요. 언론과 잡음이 나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거죠. 나는 DJ의 사상은 싫어하지만 그가 나라를 위해 잘해보려고 애썼던 건 인정합니다.”

1952년 12월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한 미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가 미군부대를 사찰하던 도중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극기를 선물 받는 모습. /기파랑 제공

◇건국 대통령 찬양이 우상화?

-최근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 기쁘시겠습니다.

“기쁘지요.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언급하고 정부가 관여해 부지 매입 등을 상의해주니 아주 희망적이에요.”

-’이승만 우상화’라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미국을 비롯해 선진국 어느 나라도 자기네 건국 대통령을 국민이 찬양하는 것을 두고 우상화라고 비판하지 않아요. 국민 마음이 살아 움직여 자발적 모금 운동이 일어난 것을 우상화라고 할 수 있나요. 오히려 이렇게 늦어진 것을 부끄러워해야지요.”

-배우 이영애씨는 기념관 건립에 기부했다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이 아니라 놀랍지도 않아요. 이승만을 폄훼하려는 세력은 언제나 그랬으니까요.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퇴임 후 출판사 기파랑을 세운 것도 이 대통령 때문이라던데 사실입니까?

“퇴임해 서점에 가 보니 좌편향 출판물 일색이더군요. 보수의 가치를 지키려는 학자들 책을 내주는 출판사는 거의 없었어요. 이영훈, 박지향 교수 등이 집필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 여러 곳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얘기를 듣고 결심했습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이란 책도 내셨지요?

“건국 대통령 위상에 걸맞은 책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전 세계에 흩어진 이승만 관련 사진을 모은 뒤 이승만 연구자들의 저서, 맥아더·트루먼의 회고록, 올리버·밴플리트·정일권 등 이승만과 접촉한 사람들의 증언, 주고받은 편지, 신문·통신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인용해 제작했지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진이 있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그리고 맥아더 장군과 찍은 사진이에요. 6·25에 유엔군을 참전시키고, 정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는 역사적 장면이지요.”

-태영호 의원의 ‘3층 서기실의 암호’는 기파랑의 베스트셀러지요?

“18만부가 나갔으니까요. 기파랑이 망하지 않게 기여해준 책이죠(웃음). 역사를 바로잡으려고 펴낸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도 여러 산고를 겪었지만 4만부가 나갔어요. 젊은이들이 기파랑 책을 통해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 되었다고 말해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1948년 10월19일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을 하네다 공항에서 맞이하는 모습. /기파랑 제공

◇돈도 권력도 펜대를 꺾을 수 없어

-정치는 왜 안 하셨습니까.

“YS가 비서실장을 제안했지만, 나는 신문기자로 일생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박근혜 경선 캠프엔 참여하셨지요?

“여성이 도와달라고 하니 거절할 수 없더군요(웃음).”

-정치부장 시절 인연이 있던데요.

“박정희 정권 시절 김영삼 총재가 제명당한 기사를 크게 썼더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회사에 해임 압력을 넣었지요. 그런데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가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해 김재규가 호되게 야단맞고 나를 복직시킨 일이 있어요. ‘김재규가 자른 안병훈 목을 박근혜가 다시 붙여줬다’는 우스개가 한동안 회자됐지요(웃음). 하지만 박 대통령은 누구와 안다고 해서 깊은 친분을 드러내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7인회의 한 사람 아니었나요?

“7인회는 언론에서만 떠들었지 실체는 없는 모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자문했는지 몰라도 나는 아니예요. 경선 패배 후 일체 만난 적이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을 때 충격을 받으셨겠네요.

“그분 성격과 대인 관계 스타일이 독특해서…. 여성이라 당한 것도 크지요.”

-김재순 전 국회의장과의 대담집 ‘어느 노정객과의 시간여행’을 펴냈더군요.

“기파랑을 차릴 때 그분이 있던 샘터 사옥에 사무실을 얻고 출판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학구적이고 품격 있는 정치인이었죠. 회고록은 한사코 싫다고 해서 저와 대담하는 형식으로 구성한 책입니다.”

-책의 마지막에 ‘당신 인생은 한마디로 뭐였냐’고 묻자 김 의장이 ‘그저 열심히 살았습니다’라고 하더군요. 똑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나 또한 주어진 모든 일에 몰두했어요. 일에 미쳐서 살았지요(웃음).”

-시계를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은가요?

“편집국장 시절이죠. 그때는 신문에 힘이 있었어요. 쓰레기를 줄이자고 캠페인을 하면 온 국민이 쓰레기 줄이기에 동참했고, 샛강을 살리자고 하면 기업도 나섰지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캠페인을 할 땐 빌 게이츠가 조선일보를 방문했어요. ‘당신 손끝에 모든 정보를(Information on Your Fingertips)’이란 문장을 쓰고 갔지요.”

-다시 태어나도 기자가 되겠습니까.

“다른 걸 해본 적이 없어서(웃음).”

-후배 기자들에게 조언해주신다면.

“진실 편에 설 때 언론은 살아요. 진실을 외면하면 언제고 위기가 오지요. 돈도 권력도 펜대를 좌지우지할 수 없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 후보였던 시절 공동선거대책본부장으로 참여했던 안병훈 대표(오른쪽). /조선일보DB

☞안병훈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법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일보 정치부장, 편집국장, 편집인, 부사장을 지내며 ‘쓰레기를 줄입시다’ ‘샛강을 살립시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등 전 국민 캠페인을 주도했다. 퇴임 후 ‘통일과 나눔’ 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 ‘어느 노정객과의 시간여행’ 등을 펴냈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