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이희완이 유서를 쓴 건 스물다섯 살 때다. 진해 해군기지에서 서해 2함대 접적(接敵) 해역으로 발령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유서를 썼다. “그땐 돌도 씹어먹을 만큼 호전적이었죠(웃음). 전투함 타고 적진을 향해 출동하는 장면을 동경했으니까요.”
그러나 머리카락 3개 넣어 밀봉한 유서는 이듬해인 2002년 6월 29일 바다로 가라앉았다. 참수리 357호정과 함께. 월드컵 3·4위전이 있던 날 발발한 제2 연평해전에서다. 북한 경비정이 기습적으로 퍼부은 포탄에 그는 6명의 전우와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국가보훈부 차관으로 임명된 날, 고등학생 딸이 말했다. “어릴 땐 아빠 다리가 다시 자라나는 줄 알았어. 매일 약을 먹으니까. 크면서 알게 됐지. 한번 잘린 다리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아빠가 자랑스러워.”
◇살아남은 전사
-키도 어깨도 완전 군인각(角)이다. 영화 ‘연평해전’에선 배우 이완이 연기했더라.
“캐스팅이 좀 잘못된 것 아니냐고 놀림을 받긴 했다(웃음).”
-매우 파격적인 인사였다.
“과장급 군인이 갑자기 스리 스타가 된 셈이다. 우리 부장님이 투 스타인데, 취임 전날 ‘저 갑니다’ 하고 전화 드렸더니 ‘오늘까지는 내 부하야’ 해서 웃음이 터졌다.”
-차관 제안을 받고 당황하셨나?
“심박수가 엄청 뛰더라. 기뻐서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두 형님과 단톡방에서 2시간 이상 상의하고, 어머니와 처가 어르신께도 의견을 구했다. 결정적으로 아내가 용기를 줬다.”
-서해 영웅으로서 책임감이 크겠다.
“연평해전 일어난 지 22년 됐지만 그날의 초심을 잊은 적이 없다. 살아남은 부하들에게도 얘기한다. 우리는 대한민국 해군의 한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우리의 잘못된 행동이 전사자의 명예를 욕보이는 것이니 잘살아야 한다고.”
-유가족은 뭐라고 하시던가.
“나라에 자식을 바치고도 홀대받으며 살아온 분들인데, ‘우리 좀 많이 챙겨달라’가 아니라 ‘나랏일 하는 사람은 전체를 두루 봐야 한다’고 당부하시더라. 감사했다.”
-357호정 정장이었던 고(故) 윤영하 소령의 부친도 만났던데.
“뇌졸중으로 2년째 투병 중이시다. 해군사관학교 대선배이기도 한 그분은 제 기억에 눈물을 한 번도 흘리지 않았다. 군인으로 나라 위해 싸우다 죽었으니 얼마나 훌륭한 아들이냐, 하시면서. 늘 나라 걱정만 하던 강단 있는 분이었는데, 기력이 많이 쇠해지셔서 마음이 아팠다.”
-보훈부 업무엔 적응이 되셨나.
“국방과 보훈은 한 울타리라 완전히 생소하진 않다. 다만 얼마 전 70대 월남전 참전 용사께서 고독사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부끄러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故 조천형 상사의 딸
-취임식 앞두고 전사자 묘역을 참배할 때 눈물을 흘리더라.
“22년 전 전우들의 표정,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스무 살 의무병 (박)동혁이는 약 한 알을 건넬 때도 ‘부장님, 이거 드시면 3시간쯤 지나 좋아질 거예요’ 하며 살갑게 말하던 친구였다. 윤영하 정장님은 FM(원칙주의)에 말수도 적어 부하들 입장에선 불편한 상관이었지만 군인 기질이 강한 나와는 코드가 잘 맞았다. 둘 다 접적 해역에서는 팀워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어서, 부하들과 함께 밥 먹고 공 차고 목욕하면서 끈끈한 연대감을 다져나갔다.”
-영화에도 돈독한 전우애가 묻어나더라.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위치를 지키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식구(食口)라는 말처럼, 라면 하나를 끓여도 같이 먹었다. 밥상도 따로 차리지 않았다. 훈련도 장교가 모범을 보였다. 11m 높이에서 바다로 점핑할 때도 정장님이 제일 먼저 뛰고 그다음 내가 뛰어내렸다.”
-발칸포 사수로 싸우다 전사한 조천형 상사와 각별했다던데.
“동갑이었고 믿음직한 부하였다. 출동 며칠 전 조 상사의 아기가 백일이라 다 같이 초대받아 축하해줬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딸이 자라 해군 학군단에 입단했다는 뉴스를 봤다.
“시은이는 우리 모두의 딸이다. 얼마 안 되지만 장학금도 주면서 살아남은 전우들이 두 번째 아빠로서 역할을 하려고 노력한다. 아빠 못지않은 군인이 될 것이다.”
-윤영하 정장이 쓰러진 뒤 작전권을 인계받아 전투를 지휘했다. 다리 한쪽이 절단된 상황에서 어떻게 가능했을까.
“제가 꽤 강성이다(웃음). 사방에서 포탄이 날아와 아플 겨를도 없었다. 평소 우리 팀 훈련량이 많아서 가능했다고 본다. 훈련이 실전처럼 돼 있으면 불구덩이에 빠져도 몸에 밴 매뉴얼대로 하게 된다.”
-영화에는 교전이 일어난 것에 충격받아 숨는 군인도 나온다.
“그건 영화적 재미를 위한 허구였다. 357호정 대원 어느 누구도 비겁하게 숨지 않았다.”
-영화는 사실에 얼마나 가까운가.
“전우들 증언을 토대로 구현해 거의 사실에 가깝다. 의무병 어머니가 청각장애인이고, 358호정 정장이 여성이었다는 정도만 허구다.”
-2015년 개봉하기까지 영화 제작에 어려움이 많았다더라.
“제작비가 없어 전투 장면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영화 제작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이 시작됐다. 개봉까지 7년이 걸렸다. 600만명의 국민이 봐주셨고, 영화를 통해 제2 연평해전의 진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자녀들도 영화를 봤나.
“영화가 끝난 뒤 초등학생이었던 딸이 날 꼭 안아주며 울먹이더라. 아빠의 오른쪽 다리가 없는 이유를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다.”
◇계급장을 떼고 싶었다
-월드컵 열기가 온 나라를 뒤덮은 상황이라 연평해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국민이 많았다.
“김대중 대통령 집권 시기는 남북 간 평화 무드가 최고조에 이른 때였다. 남북 정상이 만나고 금강산과 개성공단이 북적였다. 북한은 궤멸시켜야 할 적이라고 믿던 나조차 평화통일의 가능성을 생각했을 정도다.”
-그런데 왜 북한은 NLL을 넘어 기습 공격 했을까.
“그게 북한이다. 겉으론 평화를 운운하고 화해 무드를 연출하면서도 군사적으로는 끊임없이 도발을 감행하는 게 그들의 본질이다. 우리가 그걸 잊을 뿐이다.”
-연평해전은 북의 계획적 도발인가.
“총만 쏘지 않았을 뿐 서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끊임없이 있었다. 29일 하루 전에도 동일한 북한 전력이 동일한 시간, 동일한 기동으로 우리 해역을 다녀갔다. 일종의 리허설이었다.”
-그런데 왜 공격을 당했나.
“도발의 징후를 인지하고도 첩보가 제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북한 경비정의 포가 열렸는데도 선제공격은 안 된다는 지시만 내려왔다.”
-초기엔 남북 간 우발적 충돌로 보도됐다.
“7시간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진통제를 맞을 때 간호장교한테 신문을 갖다 달라고 했다. 우리 전투를 언론이 어떻게 보도했을지 걱정이 됐다. 아니나 다를까, 여러 신문에서 ‘우발적’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남한 어선들이 빌미를 줘서 북이 공격한 것처럼 썼더라.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군사편찬위원회에 연락해 내 증언을 기록해달라고 부탁했다.”
-해군 참모총장장으로 진행된 영결식에 국방부 장관도 대통령도 오지 않았다.
“우리는 해군총장의 부하이자 국방부 장관의 부하이며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부하들이다. 서해 접적 해역에서 전투가 일어나 6명이 전사하고 배가 침몰당했는데 해군 참모총장장이라니 말이 되는가. 계급장을 떼고 싸우고 싶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폐막식에 가느라 못 왔다던데.
“축구도 중요하지만 잠시라도 들렀다 가셨다면 유가족이 그토록 참담하진 않았을 거다. 끝까지 배의 키를 쥐고 죽어간 한상국 조타장의 아내가 국가의 무관심을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난 이유다. 당시 정부는 추모식도 5주기까지만 하고 끝내라고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명예를 회복한 건가.
“우선 서해교전에서 연평해전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우연한 충돌이 아니라 북의 계획된 도발에 맞서 우리 해군이 NLL을 지켜낸 전투였다는 의미로 바로잡은 것이다. 2함대 사령부가 주관하던 추모 행사도 국가보훈부가 주관하는 정부 행사로 격상됐다. 10주기엔 이 대통령이 직접 오셨다.”
-연평해전이 주는 교훈이 뭘까.
“한반도는 전쟁 중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오랫동안 휴전이 이어지다 보니 6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국민들은 그 심각성을 몰랐다. 우리는 언제든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순신의 후예
-왜 군인이 되었나.
“경북 금릉이 고향인데, 명절이면 선글라스를 쓴 육군 대령 한 분이 지프차를 타고 오셨다. 되게 멋져 보였다.”
-그중에서도 해군이 됐다.
“윤영하 소령 때문이다. EBS에서 해군사관학교를 소개하는 프로에 윤영하 생도가 나왔는데 해군 제복을 입은 모습이 너무 멋있더라. 357호정에서 만났을 때 ‘저는 정장님을 여기서 처음 보는 게 아닙니다’ 했다(웃음).”
-연평해전 2년 뒤인 2004년에 결혼했다.
“저를 어떻게든 장가 보내려는 친구의 소개로 만났다. 처의 할아버지가 국가유공자여서 연평해전을 잘 이해하고 있더라. 진해와 광주를 오가며 1년간 만나다 의족을 한 다리를 보여줬다. 아내가 ‘이걸 보여준다고 내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하더라. 고마웠다.”
-해마다 대전현충원에 가시나.
“계룡대 해군본부에 있을 땐 수시로 갔다. 통닭 싸들고 가족과 함께. 진급하면 진급했다고 신고하고, 고민이 생기면 또 가서 푸념한다. 내겐 안식처 같은 곳이다.”
-군인에 대한 예우는 나아지고 있나.
“병장 월급 인상 등 윤석열 정부에서 크게 개선되고 있다. 차관에 취임했더니 칠곡 순심중학교 학생들이 응원 편지를 잔뜩 보내왔더라. 큰 바다가 되어 달란다(웃음). 짬 날 때마다 읽고 힘을 얻는다.”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하시겠다.
“막내아들 부상 소식에 울산서 올라온다고 태어나 처음 비행기를 타본 분이다(웃음). 가난 속에서도 삼형제를 꿋꿋이 길러낸, 내가 아는 가장 강인한 여성이다.”
-영화 ‘노량’을 보셨나.
“가족과 함께 봤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이순신 장군의 유언을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장엄한 북소리로 연출한 대목에서 울었다. 성웅 이순신의 후예라는 게 자랑스럽다.”
-동해 1함대로 보직을 옮기기 직전 연평해전이 터졌다. 하루만 빨리 서해를 떠났어도 다리를 잃지 않았을 텐데.
“연평해전은 군인의 길을 택한 내 인생에서 가장 명예로운 일이었다. 다리를 되찾을 수 있다고 해도 그 명예와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이희완
1976년 경북 금릉군에서 태어나 울산 성신고를 졸업했다. 해군사관학교 54기로 2000년 해군 소위로 임관, 서해 제2함대 참수리 357호 부정장으로 근무했다. 2002년 6월 29일 발발한 제2 연평해전에서 오른쪽 다리를 잃고 해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하다 지난달 국가보훈부 차관에 임명됐다. 충무무공훈장, 위국헌신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