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간 선거운동을 하며 대한민국이 빨강과 파랑, 양날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천수는 "승자와 패자가 서로에게 박수 쳐주는 멋진 정치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원희룡 캠프 제공

총선은 끝났으나 이천수는 길 위에 있었다. 붉은 점퍼 차림의 그는 인천 계양을에서 패배한 원희룡의 낙선 인사에 동행했다. ‘의리 빼면 시체’라는 그라운드의 악동이라더니, 캠프에서 부탁한 것도 아닌데 열일 제치고 왔다고 했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에게 정치는 득보다 실인데, 이천수는 어쩌자고 선거판에 뛰어든 걸까. 13일, 낙선 인사의 마지막 장소였던 이마트 계양점 앞에서 그를 만났다.

◇ 어느 편이냐고? 난 사람만 본다

-낙선 인사까지 함께했더라.

“후보님이 플래카드로 인사를 대신하는 건 주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해서 나도 따라 나섰다. 원 후보의 그런 소탈함과 진정성을 내가 좋아했던 것 같다.”

-선거 전과는 분위기가 달랐겠다.

“욕하는 분들이 확 줄었다(웃음).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하고, 어깨 두드려주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틀간 하루 3시간씩 계양구를 걸어다니며 인사했더라.

“그래야 주민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 임학역, 이마트 등 우리가 유세했던 주요 장소에서 다시 뵈니 반가웠다. 뽑아달라고 할 때만 절하는 건 역시 도리가 아니었다.”

-당선 인사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낙선 인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후보님도 계양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했으니 새로운 시작을 약속한 인사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원희룡 캠프에 합류했나.

“2016년인가, 월드컵 4강 주역들이 제주 여자축구부를 방문했을 때 처음 뵈었다. 보좌관이 절친이라 몇 번 같이 뵙다 보니 친분이 쌓이고 서로를 좋아하게 됐다.”

-선거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건가.

“나는 솔직히 계양으로 오지 말라고 만류했다. 워낙 민주당이 강해 당선되기 힘드니까. 그런데도 굳이 오시겠다면 도와드리고 싶었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나?

“어느 당도 지지하지 않는다. 정치도, 좌우도 모른다. 다만 계양은 내가 자란 곳이고, 축구를 처음 시작한 곳이며, 함께 축구했던 친구들이 여전히 살고 있는 고향 같은 곳이라 낙후 지역에서 벗어나 발전하려면 일 잘하고 힘도 있는 일꾼이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13일 인천 계양구에서 낙선 인사를 하고 있는 원희룡 국민의힘 후보와 이천수. /유튜브 원희룡TV

◇ 계양의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민주당 송영길 전 대표의 유세도 지원하지 않았나.

“송 대표님은 내 축구 인생의 은인이다. 내가 좀 문제가 많은 선수였나(웃음). 이리저리 방황하다 축구계에서 버려지다시피 한 나를 정신 차리게 도와주셨고 다시 그라운드로 복귀해 제대로 은퇴하게 해준 분이다. 선거를 도와드리는 게 마땅했다.”

-그러다 국민의힘 후보를 지지하니 배신자 비난을 받은 것 아닐까.

“정치를 몰라서이겠지만, 나는 사람만 본다. 아주 단순하다. 내가 좋으면 그걸로 끝이다.”

-아내와도 다퉜다고.

“뭐에 꽂히면 그냥 밀어붙이는 성격이라 아내가 굉장히 걱정한다. 하지만 결국 나를 이해해줬고 우리는 같은 선택을 했다.”

-송영길이라면 이재명 후보를 돕길 원했을 텐데.

“이재명 후보는 어떤 분인지 내가 잘 모른다. 아까 말했듯이 나는 계양을 위해 더 열심히 뛸 사람을 원했을 뿐이다. 서울과 이렇게 가까운데도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재건축, 재개발 이슈를 잘 풀어서 주민들이 좀 더 편안하고 쾌적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이재명은 경기 지사를 지냈고 2년이나 계양을 의원으로 있었으니 더 적임자 아닌가.

“이 대표는 계양이라는 작은 지역보단 국가라는 더 큰 그림에 관심이 있는 것 같더라. 물론 나라가 중요하지만, 계양구민에겐 계양을 더 중요히 여기는 사람이 필요하다. 원 후보는 계양에 온 지 얼마 안 되지만 선거 승패와 상관없이 계양을 빨리 바꿔야 한다는 데 진심으로 공감했다. 공약, 토론회에서 보여준 고민과 대안들만 봐도 그렇다.”

-선거운동 기간 계양구를 다 걸어서 다녔다던데.

“원희룡 후보가 내게 물었다. 계양구를 차가 아닌 운동화로 다닐 수 있겠느냐고. 나야 선수였으니 문제없지만 후보님이 나이도 있고 체력도 달려서 안 될 줄 알았는데, 살까지 빼면서 계양을 두 번, 세 번 완주하더라. 계양의 끝에서 끝을 다 밟으며 민심을 읽었다.”

지난 4일 원희룡 국민의힘 후보 유세 현장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이천수와 어머니. 그는 상대 당 지지자들로부터 가족을 위협하는 협박을 받았다. /유튜브 원희룡TV

◇ 욕먹으며 완주한 이유

-폭행도 당했다. 선거판에 나선 걸 후회하진 않았는지.

“유세 첫날부터 후회했다(웃음). 욕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멘붕이 오더라.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송영길 선거운동 할 땐 욕을 먹지 않았나.

“전혀! 한 번도 비난받은 적 없다. 내가 축구를 못 해서 욕 먹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건 선택의 문제 아닌가. 민주주의 사회인데. 내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아버님이 더 시끄러운데요?’ 등등 민주당 지지자들과 실랑이를 해서 논란이 됐다.

“그분들은 정말 거칠다. 욕하고 조롱하는 데 거침이 없다. 축구팬들이면 다 아는 내 성질에 참다 참다 한 말씀 드린 것뿐이다. 내가 그분들께 받은 협박과 비난은 만 번도 넘는다. 그래도 화를 눌렀다. 후보님께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까.”

-그래서 ‘개딸’의 표적이 됐다.

“인스타는 안 본 지 오래됐다. 쏟아지는 욕설을 처음엔 열심히 지웠는데 지우다 지쳐서 안 들어가고 안 본다. 선거 기간에도 유튜브 ‘리춘수’ 영상을 몇 개 찍었는데 올리질 못 하고 있다. 초토화될까 봐. 구독자도 엄청 떨어져 나갔다.”

-낙선 인사 때 ‘솔직히 (선거운동 하며) 쫄았다’고 고백했더라.

“저는 계양 출신이고 계양 발전을 위한 순수한 마음에 나선 건데 상대방 분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더라. 욕설은 기본에, 손을 강제로 잡아끌며 네 가족이 어디 사는지 안다고 협박했다. 당황스럽고 무섭더라. 내 입장을 설명해주려고 해도 대화 자체가 되지를 않았다.”

-우리 정치의 현실일까?

“월드컵 응원할 때는 원팀이 되는 국민이 선거 때는 빨강과 파랑 양날로 갈라지는 게 섬뜩했다. 그래서 후보님한테 물었다. 정치가 원래 이런 거냐고. 그러자 ‘조국 사태’를 겪으며 분열이 더 심해졌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연예인들이 정치를 멀리하려는 것 아닐까.

“사람들은 내가 무슨 목적을 갖고 머리 엄청 굴리며 선거판에 나왔다고 조롱하는데, 머리가 있었다면 이런 선택은 안 했을 것이다. 정치가 뭔지 알았다면 절대 선택해선 안 될 일이었다(웃음).”

-그래도 끝까지 완주했다.

“둘째날도, 셋째날도 힘들었다면 완주 못 했을 거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진정성을 알아주는 분들이 늘어나는 걸 체감했다. 축구로 치면 원희룡 후보는 원정 경기를 하러 온 사람인데 정말 열심히 하니까 홈팀 관객도 인정하더라. 민주당 성향 주민들 중에도 당과 상관없이 뽑으라면 원희룡을 뽑겠다는 분들 많았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았다.”

히딩크 감독과 차두리, 이천수, 코칭스텝과 함께 슛팅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보며 분석을 하는 모습./스포츠조선DB

◇ 히딩크와 클린스만

-출구조사 결과가 나왔을 땐 실망했겠다.

“믿지 않았다. 개표하면 뒤집어질 거라 확신했다.”

-어차피 기울어진 운동장 아니었나.

“축구가 재미있는 건 월등한 경기력을 가진 팀을 약팀이 이기는 반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계양역은 열 번, 임학역은 스무 번 넘게 가서 유권자를 만났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주민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바람을 탄다고 할까? 잘하면 이기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뒤집기엔 시간이 부족했나.

“선거운동은 일찍 시작했는데, 후보의 진정성을 더 많은 분들이 받아들이게 하는 데는 시간이 모자랐다. TV 토론회 이후 판세가 바뀌기 시작했는데, 토론회를 두세 번 더 했으면 뒤집혔을 것이다.”

-이천수의 지지도 판세에 영향을 미쳤을까?

“모르겠다. 초등학교 꼬마들, 그리고 엄마들이 날 좋아해주신 것 같다(웃음).”

-정치에도 뜻이 있나?

“축구협회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주제에 정치는 무슨.”

-정치와 축구, 뭐가 더 어려울까?

“당연히 정치 아닐까. 축구는 11대11로 싸우니 일대일 싸움에 가깝지만, 정치는 그게 아니더라.”

-이천수가 생각하는 축구와 정치 리더십의 핵심은.

“소통! 훌륭한 지도자는 사소한 의견도 귀 담아 듣는다. 히딩크는 늘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며 팀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파악한 뒤 전략을 세웠다. 그 반대가 클린스만이었다.”

-월드컵을 원팀으로 응원하듯 정치도 그럴 순 없을까?

“태영호 후보가 경쟁 상대였던 윤건영 후보의 승리를 축하하며 꽃을 보냈다는 뉴스를 보고 감동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어디든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서로를 위해 박수 쳐주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게 멋진 정치 아닐까.”

-그나저나 선거운동 하는 두 달간 TV를 비롯해 본업은 아예 손을 놨다던데.

“그래서 우리 소속사 사장님이 굉장히 열받아 있다. 어떤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장이 자기 연예인이 선거운동 하는 걸 허락하겠나. 하루에도 손해 보는 돈이 얼만데. 오늘 기자와 만난 줄 알면 뒷목 잡으실 거다(웃음).”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나?

“다시 열심히 살아야지. 유세 끝나고 집에 가면 다섯 살 쌍둥이가 날 빤히 쳐다보는데 ‘여기가 현실이었지’ 하면서 정신을 차렸다(웃음).”

-아, 한동훈 비대위원장과 함께 간 고깃집에서 소고기가 아니라 김치찜을 먹어서 서운하진 않았는지.

“그 식당은 원래 김치찜으로 유명한 맛집이다. 그리고 워낙 바빠 고기 구워 먹을 시간도 없었다, 하하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지난 8일 오후 인천 계양구의 한 식당을 찾아 원희룡 후보, 이천수씨와 함께 김치찜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2024.4.8/뉴스1

☞이천수

1981년 인천 출생. 부평고, 고려대를 졸업했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주역으로, 같은 해 레알 소시에다드로 스카우트되면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한 첫 한국인 선수가 됐다. K리그에서는 울산 현대, 전남 드래곤즈, 인천 유나이티드 등에서 활약했고 2015년 은퇴했다. 대한축구협회 사회공헌위원장을 지냈다. 80만명이 구독하는 유튜브 ‘리춘수’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