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베’ ‘빠루’ 난무하던 격전지에서 생환한 나경원은 호기로웠다. 역대 선거 중 가장 힘든 싸움이었으나 “책 한권 써도 모자랄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했다”며 웃었다. 결국 옥탑방 사무실에서 절치부심하며 바닥 민심을 훑은 4년이 정권 심판 바람도 막아낸 비장의 무기가 됐다. “정치는 땅에 발이 붙어 있을 때 힘을 쓰더라”는 말에 용장(勇將)의 패기가 묻어났다.
◇이재명의 ‘나베’, 조국의 ‘빠루’
-지상파 출구조사가 나왔을 때 용궁에 다녀온 기분이라고 했더라.
“이게 말이 되나 싶었지(웃음). 결국 패배했다면 나경원이 계속 정치를 해야 하느냐는 중대 기로에 서게 됐을 것이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선 줄곧 앞서갔다.
“마지막 여론조사가 15개 발표됐는데 3군데서 지는 걸로 나왔다. (유세) 현장 분위기는 너무 좋았는데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잡히는 게 아니라서. 호남분들, 대학생이 많이 사는 동작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세(勢)가 강한 곳이라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재명 대표 등 민주당 선대위 지원 유세도 대단했다.
“이재명 대표가 8번, 조국 대표가 2번이나 왔다. 박지원, 김부겸 등 야권 인사들도 총출동했다. 이재명이 ‘나베’로 좌표를 찍자 이른바 ‘개딸’이란 분들이 오픈 채팅방을 만들어 총공세를 시작했고, 지방에서도 올라와 아침부터 자정까지 확성기 들고 시장과 지하철역을 다니며 시위하더라. 나는 류삼영이 아니라 이재명을 상대로 싸운 셈이다.”
-이재명의 나베, 조국의 빠루 공격이 효과를 봤을까.
“그건 좀 더 분석해 봐야겠지만, 그들이 거칠고 야비하게 나올수록 나는 ‘외부 세력에게 우리 동작을 내어주어선 안 된다’고 외쳤다.”
-정권 심판 바람도 거셌다.
“사전투표 후 실감되더라. 한 중년 여성은 유세장 앞을 지나가다 돌아와 자기가 국힘 지지자이지만 의사라서 기권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유모차 끌고 지나가던 아기 엄마는 당신의 공약은 정말 좋지만 이번엔 찍을 수 없었다고 했다. 정부가 싫어서.”
-그럼에도 승리한 비결이 뭘까.
“지난 4년 동안 동작에만 파묻혀 살았다. ‘나경원의 정치 법률 교실’을 열고 주민들 민원을 경청했다. 10년쯤 살다 보니 시장에 가면 다 아는 분들이다. 이물 없고 동생 같고 친구 같고. 경로당 가서도 어머님이라고 안 부른다. 내 나이도 이제 만만치 않아서. 죄다 언니들이다, 하하!”
◇내 명함 쫙쫙 찢어 던지더라
-마지막 확성기 사용 1분을 남겨두고 흑석동에서 읍소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재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40대 주민이 크게 늘었다. 40대는 우리 당을 좋아하지 않는 세대이니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질 교육 공약을 만들어 간절히 호소했다.”
-교육 공약이 먹혔을까.
“젊은 부모들이 큰 관심을 보인 건 사실이다. 조희연 교육감, 교육 전문가들 초청해 토론회를 갖고 주민들 의견 반영해 만든 정책이다. 학교에 인조잔디 깔아주겠다는 공약은 10대들이 가장 좋아했다. 아이들과의 인스타 소통이 이번 선거의 한 축이었다.”
-소셜미디어를 활용했다는 뜻인가.
“이번 선거에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우리 당이 제일 약한 게 소셜미디어인데, 누가 SNS 유세를 하루 30분만 해도 확 달라질 거라고 조언하더라. 유튜브는 물론 우리 인스타 릴스 조회 수가 400만이 넘었다. 졸업식, 학부모 총회에 인사 드리러 가면 아이들이 사인 받겠다고 줄을 섰다. 우리 로고송도 거의 따라 부르더라. 지나가던 일곱 살 꼬마가 ‘어? 경원이 언니다!’라고 외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대학이 3곳이나 있다. 20대는 어떻게 설득했나.
“제일 어려웠던 게 20대 여성이다. 우리 당에 굉장히 냉소적이다. 저를 롤 모델로 생각하는 여성도 있지만 대부분은 냉랭했다. 우리 당의 큰 숙제다.”
-선거운동 하며 욕도 먹었을 텐데.
“정치의 양극화를 절감했다. 내가 건넨 명함을 쫙쫙 찢어서 얼굴에 대고 뿌리는 분도 있더라. 처음 겪는 수모였다.”
-이번 선거가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동작구 선거사상 8% 포인트 차로 가장 크게 이겼지만 정말 힘들었다. 다른 선거 땐 4시간 이상은 잤다. 이번엔 안 되더라. 작년 가을부터 교회, 성당 새벽 기도회에 참여했으니 일과가 4시 반, 5시에 시작된 셈이다. 잠시라도 짬이 나면 온라인 소통을 했다.”
-책 한권으로 써도 모자랄 선거였다고.
“선거의 A부터 Z까지 다 알려줄 수 있다(웃음). 정치는 역시 발을 땅에 붙여야 힘을 얻는다. 발이 뜨는 순간 민심은 등을 돌린다.”
◇참패? 내 탓이라는 사람 많아져야
-총선에 참패한 여당은 대통령과 함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중진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일단은 흩어진 마음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선거가 끝나니 전부 네 탓이라며 싸우는데 국민이 원하는 모습은 아니다.”
-’이·조 심판’ 전략을 비롯해 총선 참패 원인이 쏟아지고 있다.
“다 맞는 얘기지만 당이 위기를 이겨내려면 ‘내 탓이오’ 하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너무나 애썼지만 중앙당 차원의 선거 준비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한 위원장이 지원 유세한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중앙당의 역할이 없었다.”
-홍준표 시장의 한동훈 공격이 일리가 있다는 뜻인가.
“한동훈 비판도 일리 있다, 대통령 비판도 일리 있다 하다 보면 끝이 없다. 다 함께 애쓴 것도 사실 아닌가. 문제는 우리 역량이 총결집되지 못했다는 거다. 대통령과 위원장의 삐그덕거림부터 사무처, 말단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량이 하나로 결집되지 못했다.”
-의대 정원 이슈는 악재로 작용했나?
“상식 아닌가? 의대 정원 발표하는 날 한덕수 총리에게 제발 보류해 달라고 했는데 강행하시더라. 2000명이라는 목표치는 맞을지 몰라도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더 유연하게 접근했어야 한다.”
-대파 영향은?.
“중앙에서 어떤 외풍이 불어도 지역에서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에 뉴스를 거의 안 봐서 ‘대파 해프닝’이 그렇게 커진 줄도 몰랐다. 사실 대통령 발언을 왜곡한 것 아닌가. 문제는 대응이 늦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민주당이 파 한 뿌리씩 들고 다니며 선동한 거다. 우리 당은 게을렀고, 치열함도 부족했다.”
-나경원, 안철수, 이준석 등 윤석열 대통령에게 각을 세운 사람들이 당선됐다.
“영남에선 대통령 욕한 사람들이 다 떨어졌던데?(웃음)”
-유승민, 이준석을 끌어안았어야 할까.
“이준석은 탈당했으니 어쩔 수 없고, 유승민은 선대위에 함께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래서 배신자고 저래서 배신자라고 제외시키면 같이 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계파 정치에 고개 숙이지 않았다
-지난 전당대회에선 나경원이 내쳐졌다.
“사람들은 나를 하차시키려고 연판장 돌린 의원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하던데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다고 하면 정치를 할 수가 없다. 큰 목표를 향해 가려면 내려놓을 건 내려놔야 한다.”
-그래도 상처받았을 것 같다.
“민주당으로부터 ‘1억 피부과’니 ‘냄비는 밟아야 제 맛’이니 조롱당했어도 후배 의원들이 돌린 연판장만큼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정말 아팠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윤석열 대통령이었다.
“명예 회복을 위해 절치부심한 1년이다. 확신하건대, 나는 국민을 바라보고 국민의 선택을 받아서 정치를 해온 사람이다. 누구 뒤에 줄 서지 않았고 계파 정치, 패거리 정치에 고개 숙이지 않았다. 그래서 미움 받았지만 나의 ‘빽’은 국민과 지역 주민이었고, 험지에서 이길 때마다 더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나경원 당대표, 이철규 원내대표라는 ‘나·이 연대’설이 불거졌다. 대통령과 부부 동반으로 만났다고도 한다.
“부부 동반은 무슨(웃음). 소통한 건 맞다. 근데 ‘나·이 연대’는 어이없다. 내가 김기현(김·장 연대)도 아니고. 나경원을 당권에서 견제하려는 이들의 악의적 음모라고 생각한다. 선거 후 당정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대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보수의 가치를 재건하겠다고 했다.
“보수 정권이 들어선 지난 2년 동안 보수는 유능하고 도덕적이며 책임질 줄 안다는 덕목이 다 무너져버렸다. 선거가 끝나니 중도로, 좌(左)로 가야 한다는 말도 나오던데, 보수의 본래 가치부터 재건하는 게 우선이다.”
-탄핵 위기설도 나온다.
“헌정사에 두 번 다시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어떻게든 대통령과 우리 당의 지지율을 올려야 한다. 그래서 보수의 단일대오가 절실하다. 거야(巨野)가 지금 땡처리하겠다며 5·18 민주유공자법까지 죄다 올려놓지 않았나. 의회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다수결이 아니라 합의다. 다수결의 힘을 이렇게 마구 쓰는 정당은 역사상 없었다.”
-민주당은 국회의장부터 상임위 의장까지 다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의회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일이다. 합의 정신은 다 어디 갖다 팽개쳤나. 국회는 견제와 균형의 기능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국정 운영을 원활하게 도와주는 것도 국회의 역할이다. 국회의장을 왜 꼭 다수당이 해야 하나.”
-4년 만에 국회로 돌아간다.
“인구 문제, 기후 문제 등 22대 국회는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다. 우선 저출산을 완화하는 1호 법안을 낼 것이다. 정부가 신혼부부에게 주택 자금을 빌려주고 출생하는 자녀 수에 따라 이자 감면, 원금 탕감 등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저출산고령위에 있을 때 제안한 헝가리식 저출생 대책인가? 대통령을 격노시킨?
“그렇다. 청년 세대가 출산, 결혼을 하지 않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주거 안정이다. 요즘 정부와 여야가 쏟아내고 있는 저출생 대책들보다 결코 과격하지 않다.”
☞나경원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 7년 6개월 동안 판사로 일했다. 2002년 정치에 입문, 17·18·19·20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지난 4·10 총선에서 동작을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여성 최초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거쳐 윤석열 정부에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