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김관진 전 국방장관과 함께 북의 암살 위협을 받는 인물이다. 2017년 김정은은 “남조선 괴뢰 이병호를 지구 끝까지 따라가 테러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병호 당시 국정원장은 북한을 국정원 업무의 주 타깃으로 복귀시켰고, 그 시절 태영호 주영 북한 공사 망명,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 탈출이 이뤄졌다.
그가 ‘좌파 정권은 왜 국정원을 무력화시켰을까’란 제목의 회고록을 냈다. ‘평생 함구’라는 정보기관 수장의 직무 윤리를 깬 행보라 이목이 집중됐다. 그는 “소리 없이 헌신했으나 무참히 짓밟힌 국정원의 명예는 회복돼야 한다”고 했다. 출간 후 언론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부했던 이 전 원장을 최근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만났다.
◇ 전례 없이 가혹한 박해
-왜 책을 쓰기로 결심했나.
“문재인 정권의 적폐 청산이 얼마나 무도했는지, 그것으로 국정원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 알려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 직업윤리보다 컸다.”
-문 정부가 국정원을 ‘사냥’했다고 썼더라.
“국정원 직원을 많이 잡아넣을수록, 국정원장을 비롯한 고위직을 감옥에 잡아넣을수록 검찰이 성공한다고 평가받는 적폐 청산 구조였다. 국정원의 메인 서버까지 뒤졌고, 500명에 가까운 전·현직 직원이 검찰 조사를 받았으며, 46명이 감옥에 갔다. 어떤 선진국 정보기관 역사에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가혹한 박해였다.”
-국정원 댓글 공작은 여론 조작이고 정치 개입 아닌가?
“김정은은 ‘남한의 인터넷 공간은 해방구, 사이버전은 만능의 보검’이라면서 악성 댓글 공작을 전개했다. 광우병 난동 때부터 1명이 선동 글을 올리면 9명이 퍼 나르고 90명이 클릭하는 ‘1대 9대 90′의 댓글 책동을 펼쳤다. 이에 국정원이 일상적 대응 활동을 한 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검찰은 댓글 5000만 건 중 대선에 개입했다는 2200건을 문제 삼았는데, 이는 전체의 0.0045%에 불과하다. 그중 절반은 4대강 사업, 한미 FTA와 관련한 것이었다. 검찰이 범죄라고 우긴 0.0045% 댓글 때문에 국정원이 초토화됐다.”
-국정원의 대북 공작금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추적하는 데 사용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거액의 김대중 전 대통령 비자금이 해외 은행에 예치돼 있다는 제보가 있었다. 비자금 일부가 북으로 흘러간 징후가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그러나 검찰은 비자금엔 관심이 없고, 추적 업무를 담당한 간부 직원만 경리 규칙을 어겼다며 감옥에 보냈다. 비자금이 사실이라면 전대미문의 거악 사건이다. 검찰이 방관한 것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 베트남전 무공훈장도 박탈
-당신은 남재준, 이병기 원장과 함께 ‘국정원장 특활비 상납 사건’에 연루돼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국정원장이 대통령에게 돈을 ‘상납’하다니, 얼마나 악의적인 작명(作名)인가. 국정원장 특별사업비는 일반 부처 특활비와 다르다.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한 예비비적 성격의 비밀 정보 예산이다. 세계 모든 정보기관장들은 다 시크릿 펀드를 가지고 있고, 국가 안보에 융통성 있게 사용한다. 국가안보 총책임자인 역대 대통령들도 관행적으로 예산 지원을 요청했다.”
-특활비가 안보에 쓰인 게 아니라 죄가 된 것 아닐까?
“이 자금이 박근혜 대통령의 사익을 위해 쓰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 국정원법 3조에 국정원장은 대통령 지시와 감독을 받는다고 규정돼 있다. 국정원장들은 법에 따라 대통령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그런데 대법원은 왜 국고 손실죄로 최종 판결했을까.
“국고 손실죄가 성립하려면 국정원장이 일개 회계 직원이 돼야 한다. 항소심은 국정원장은 회계 직원이 아니라고 판결했지만, 김명수 대법원이 이를 뒤집었다. 국정원장이 회계 직원이면 특활비를 사용하는 모든 부처의 장관도 회계 직원인가. 기네스북에 올라갈 황당한 법리로, 돈을 착복하지도 횡령하지도 않은 우리는 중죄인이 됐다. 법치(rule of law)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가 이뤄지던 시대, 법 조항만 해석해 범죄로 엮는 데 능숙한 법 기술자들의 시대였다.”
-당시 적폐 청산을 지휘한 이가 윤석열 대통령이다.
“서울중앙지검장 윤석열과 대통령 윤석열이 국정원을 보는 시각은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시 형사처벌 받은 국정원 직원 전원을 2022년 사면 복권시켰을 것이다.”
-직원들 삶이 어렵다던데.
“연금은 반으로 삭감됐고 퇴직금도 환수당했다. 변호사비 때문에 빚을 지거나 아파트를 처분한 사람도 있다. 나는 베트남전 참전으로 받은 무공 수훈 유공자 자격도 박탈당했다. 60년 전 목숨을 건 전투에서 얻은 훈장이었다.”
◇ 나중에 태어난 자들의 오만
-문재인 정부는 왜 국정원을 무력화했을까?
“민주화 세력으로 위장한 운동권의 사상과 정체, 비리와 무능을 국정원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대공 수사권의 경찰 이관 등 문 정부가 개정한 법이 국정원을 형해화했다고 썼더라.
“대공 수사권 이관은 간첩을 잡지 말라는 뜻이다. 경찰은 국정원의 정보 역량 없이 간첩을 잡을 수 없다.”
-국내 정보 기능이 사실상 금지된 건가.
“새 국정원법은 국정원의 직무를 해외 정보 수집, 방첩, 대테러, 국제 범죄에 한정했다. 미국의 FBI, 영국의 MI5, 이스라엘의 신베트가 하는 국내 정보 기능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산업 스파이를 잡고 테러를 방지하고 마약 범죄를 추적하려면 국내도 함께 모니터해야 하는 게 상식이다. 대북 비밀 정보 활동도 지금은 할 수 없다.”
-간첩 조작 등 인권 침해를 우려한 때문 아닐까?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고 인권을 탄압하고 간첩을 조작하는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나갔다. 교통사고 방지를 위해 도로에 CCTV를 설치하듯 국내 안보 위험 요소를 모니터하는 건 정보기관의 필수 기능이다. 인권, 자유의 가치와 충돌하는 건 맞다. 그러나 국민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공익이 더 크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국내 공안 기능을 중시한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새만금 잼버리 사태도 막을 수 있었다.”
-견제 장치는 있어야 하지 않나?
“국정원을 견제하기 위해 국회 정보위원회가 설치돼 있다. 대통령의 양식과 헌법 준수 의지도 국정원 권력 남용을 막는 장치다. 국정원 내부의 감찰 기능도 강하다. 선진국 어떤 정보기관도 외부 감사를 받지 않는다.”
-무소불위 권력이었던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의 업보 아닐지.
“히틀러에게 반대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학자 로웬스타인은 ‘민주주의는 비민주적으로 보이는 수단으로 지켜질 수 있다’면서 이를 ‘기강 있는 민주주의(militant democracy)’라고 했다. 가난하면 민주주의도, 국가 안보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한 박정희 대통령은 비민주적 수단으로 보이는 ‘중정’을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독재는 나쁘지만 독재를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더 나쁘다’는 말은 그 시대의 딜레마를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결국 산업화가 민주화의 바탕이 되지 않았나. 나쁜 짓만 한 몹쓸 기관으로 국정원을 악마화하는 건 나중에 태어난 자들의 오만이다.”
◇ 정보의 실패는 대재앙 불러
-국정원은 야성의 조직이어야 한다고 했더라.
“소리없는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국정원은 10%의 가능성만 보고도 달려들어 안보 가치를 창출하는 적극성과 돌파력, 모험적 도전정신으로 일해야 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적폐 청산 이후 무사안일을 추구하는 풍조가 생겼다. 정보기관으로서 생명력을 잃었다.”
-수미 테리 사건으로 난맥상이 드러나기도 했다.
“FBI의 과민 반응이었지만, 그 사건에서 내가 눈여겨본 건 선물을 구입할 때 국정원 요원이 현금이 아닌 카드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훗날 감사원의 처벌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활동에 근거를 남기려는 강박이 작용한 거라고 본다.”
-국정원 위기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 정책 때 시작됐다고도 했다.
“90년대 말 김정일 체제는 위기에 직면했다. 고난의 행군으로 수백만이 굶어 죽었고, 황장엽 탈북으로 고위 엘리트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2~3년만 더 압박해 들어갔다면 남북 관계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 탈출구를 햇볕 정책이 제공해 줬다. 주적(主敵)이던 북한이 협력 대상이 되면서 국정원에도 일대 혼란이 왔다.”
-국정원 기강이 바닥을 쳤다고 했더라.
“콘테이너 박스처럼 폐쇄된 북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정보 타깃이다. 이를 상대로 고군분투하며 국정원은 엄청난 정보 역량을 쌓아왔다. 내가 국정원장이 되어 18년만에 돌아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특히 사이버 방어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많은 나라가 북한의 해킹 시도를 막기 위해 협조를 요청할 정도다. 그런 국정원을 문 정부는 5년간 와해시켰다. 역사적 범죄다.”
-윤석열 정부의 강경한 대북 정책이 전쟁 위협을 높인다는 시각도 있다.
“냉전시대 주소련 미국 외교관이었던 조지 케넌은 ‘소련 공산 체제는 달래거나 설득으로 변할 체제가 아니므로 단호하고도 장기적인 봉쇄 정책으로 맞서야 한다’고 했다. 내가 봐온 북한 역시 당근을 준다고 변할 체제가 아니다. 케넌의 충고처럼 북의 위협에 강고한 의지로 맞서야 한다. 우리가 선의를 보이면 김정은도 선의로 보답할 거라는 몽상이 문 정부 5년을 지배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은 매우 상식적이다.”
-안보 위기에 국민이 둔감하다고 생각하나?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공격으로 중동 전쟁이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경제력·군사력·정보력에서 중동의 수퍼파워인데도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당했다. 전쟁은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북한이 전쟁, 혹은 전쟁에 준하는 도발을 하지 않을 거라고 누가 보장하나. 북한의 군사력은 방어형이 아니라 모든 걸 희생해서 구축하는 공격형이다. 기회만 되면 침공하려 한다. 우리 정보 역량은 그걸 예측할 수 있도록 강화해야 한다. 정보의 실패는 대재앙을 부른다. 국정원을 성원해야 할 이유다.”
-국정원 혁신 TF가 필요하다고 했다.
“헤즈볼라가 사용하는 무선 호출기에 소형 폭탄을 설치한 이스라엘의 정보 공작은 그 상상력과 치밀성, 과단성에 탄복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강한 건 책임자가 모두 정보와 안보의 전문가이고 정권이 교체돼도 장기간 복무한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정보기관은 끊임없이 정치에 흔들린다. 국정원장이 자주 바뀔 뿐 아니라, 대부분 대통령 측근 인사가 보임된다.”
-현재 국정원장도 외부에서 왔다.
“조태용 원장은 외교부에서 왔지만 국제정세와 북핵 문제에 폭넓은 지식과 시각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국정원을 떠날 때는 국정원의 패밀리가 돼 있을 거라고 하더라(웃음). 국정원에 대한 신뢰와 애정의 술회라고 생각한다.”
-시계를 돌려 국정원장직을 제안받았던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고사할까?
“감옥이라는 뜻밖의 고초를 겪었지만, 애국심 깊은 국정원 직원들과 나라의 안위를 위해 분투한 보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운명은 받아들이는 것이지 원망의 대상이 아니다. 역사가 반드시 정의로 가는 것도 아니다.”
-정치는 여전히 어지럽다.
“나는 크리스찬이고, 대한민국을 하나님이 세우고 지켜줬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다시 광야로 내쫓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이병호
1940년 경기 시흥 출생. 교통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국가안보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주미 대사관 일등 서기관, 국가안전기획부 해외 담당 차장, 주말레이시아 대사를 거쳐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정보원 원장을 지냈다. 청와대에 특수활동비를 제공한 혐의로 구속됐다가 2022년 사면 복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