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5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풍산역사관 겸 영빈관에서 류진 풍산 회장이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 장련성 기자

류진 회장을 만난 곳은 서울 북아현동 언덕배기에 자리한 풍산역사관이다. 창업주 류찬우(1923~1999)가 별세하기 전까지 살던 한옥으로, 풍산그룹 영빈관으로도 사용한다고 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눈에 띄었다. 음악 애호가인 류 회장이 어릴 적 바이엘까지 배우다 그만둔 피아노를 코로나 시기 집 안에 갇혀 있을 때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피아노 위엔 지휘자 정명훈과 찍은 사진이 있었다.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밟고 류진 회장이 나타났다. 뉴욕발 비행기로 15일 새벽 인천공항에 내린 뒤 곧장 달려온 길이라고 했다. 키가 180㎝는 넘어 보였다. 그는 6척 장신이었다는 서애 류성룡의 13대손으로, 류성룡을 ‘서애 할배’라고 불렀다.

◇나를 울린 ‘서애 할배’의 친필 편지

-정명훈 지휘자와 친하신가 보다.

“그분의 아들 정민이 부산의 비행 청소년들과 꾸린 오케스트라가 2010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연주할 때 우리가 후원하면서 알게 됐다.”

-최근 정명훈 지휘의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 공연도 풍산이 후원했더라.

“똑같은 오케스트라도 정명훈이 지휘봉을 잡으면 소리가 달라진다. 오로지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의 어떤 경지를 느낀다.”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어릴 때부터 후원했던데.

“성진군이 고등학생일 때 부시 대통령 앞에서 피아노 연주할 기회를 마련한 적이 있다. 이렇게 유명해질 줄은 몰랐다(웃음).”

-임윤찬보다 조성진을 더 좋아하시겠다.

“사과와 오렌지 중 뭐가 더 맛있냐고 묻는 격이다(웃음).”

-클래식 애호가인가?

“대중가요, 샹송, 일본 노래 등 음악은 다 좋아한다. 가수 인순이, 부활의 김태원, 그리고 전 멤버였던 이승철과 정동하도 좋아하고 가깝게 지낸다.”

-피아노도 직접 연주하신다고

“부시 대통령이 퇴임 후 ‘내 안의 렘브란트를 찾겠다’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에 감명 받아서 나도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완벽하게 치게 되면 들려드리겠다(웃음).”

-이 집에선 얼마나 사셨나.

“결혼 전까지. 대학 시절 통금 시간이 있었는데 아버지께 혼날까 봐 어머니가 몰래 담을 넘게 해주신 적도 있다(웃음).”

-류성룡 선생의 유품도 보인다.

“‘서애 할배’가 임진왜란 끝난 이듬해 형님께 쓴 친필 편지를 좋아한다. 탄핵을 받아 하회마을로 낙향한 뒤 초가삼간을 지으면서 형님과 주고받은 편지로 보이는데,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형제간 우애가 절절히 느껴진다.”

-서애의 후손이라 부담이 크다고 했더라.

“어려서부터 ‘조상과 가문에 먹칠을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을 귀가 따갑게 듣고 자라 큰 말썽은 일으키지 않고 산 것 같다(웃음).”

서애 류성룡의 친필 편지. 탄핵 받아 낙향한 류성룡이 초가삼간을 짓는 등 주거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형과 의견을 주고받기 위해 쓴 편지로 보인다. /풍산그룹 제공

◇한경협 1년 성적? 70점

-한국경제인협회 수장으로 취임 1년을 맞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빠르게 지나간 1년이었다. 뭐든 올인하는 스타일이라 열심히는 했는데 목표의 60~70%밖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신뢰 회복을 가장 중점에 둔다고 하셨다.

“(정경 유착, 국정 농단 등) 과거와 같은 문제들이 생기지 않도록 윤리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형식적인 위원회로 흐르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3억 이상 드는 비용은 윤리위원회의 허락을 받고 써야 하는 등 협회의 중요한 모든 결정은 위원회에 맡긴다.”

-풍산이 재계 70위권 기업이라 한경협을 잘 이끌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오히려 우리가 큰 재벌이 아니라서 큰 기업과 작은 기업을 연결하고 상생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웃음).”

-경제 외교 기능은 상당부분 회복했다는 평가가 있다.

“북한, 중국, 러시아가 우리 안보를 위협하며 밀착하는 시기에 한·미·일 경제단체의 교류와 결속을 복원한 것에 보람을 느낀다. 회원사들, 특히 작은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합작, 기술제휴 등 외국 기업들과의 매칭 서비스에 도움을 드리려고 한다.”

-4대 그룹의 복귀도 쟁점이었다.

“현대차와 SK그룹은 이미 두 차례 회비를 냈고, 삼성과 LG도 곧 납부한다. 포스코홀딩스, 아모레퍼시픽 등 20개사가 새로 가입하는 등 외연도 넓어졌다.”

-1961년 처음 출범할 때의 초심, 기업가 정신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셨더라.

“한경협은 이병철 회장이 만드셨고,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가장 힘들었던 10년을 정주영 회장이 맡아 정말 열심히 뛰셨다. 최종현 회장은 임종 직전까지 튜브를 꽂고 일하셨다. 기업보다 국가적 차원의 경제가 발전할 수 있도록 헌신한 그분들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2, 3세들에겐 기업가 정신이 부족한가?

“오늘의 성취가 자신만이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선대로부터 이어온 역사와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한경협은 미·중·일 등 주요국이 산업 정책을 강화하면서 우리 기업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등 첨단 전략 산업에 대한 투자는 국가의 미래가 걸린 필수 과제다. 미래 국가 경쟁력이 여기서 판가름 난다. 미국, 중국, 일본은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부으며 발 빠르게 움직이는데 우리만 손 놓고 있다.”

-대기업 특혜라는 비판 때문 아닐까.

“반도체 라인 하나 짓는 데만 20조원 넘게 들어가니 대기업이 맡을 수밖에 없다. 특혜 시비 운운하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 중소기업까지 연결해 생태계 전체를 지원하는 패키지 정책이 나와야 한다.”

-삼성전자의 위기는 어떻게 보나.

“기업을 하다 보면 감기에 걸리기도 한다. 당장은 어렵지만 이재용 리더십과 삼성 직원들의 저력이 돌파구를 찾을 것으로 본다.”

류진(오른쪽) 한경협 회장과 도쿠라 마사카즈 경단련 회장이 18일 한일 재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국내 1호 방산 기업의 한 우물 파기

-풍산그룹은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다.

“(한경협 일로) 내가 회사 일을 덜 해서 그런가 보다(웃음).”

-우크라이나, 중동 전쟁으로 방산 수요가 커진 덕인가.

“회사 전체로 보면 구리를 제조하는 신동 사업, 모든 자동차와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소재 사업 비율이 크지만 최근 방산 분야 매출과 수익이 커진 건 사실이다.”

-동전을 만드는 소전 분야는 시장점유율 50%로 세계 1위인데, 일반 국민은 풍산그룹을 잘 모른다.

“일본에서 무역업으로 성공한 선친(류찬우)이 박정희 대통령의 ‘해외 교포 자본 유치’ 정책에 따라 신격호 회장 등과 한국으로 오신 게 1968년이다. 아버님은 경제 발전에 가장 필요한 것이 기초 소재라 여겼고, 그중에서도 철강을 하고 싶어 했는데, 철강은 이미 포철로 설립돼 비철금속으로 시작했다.”

-신동 산업에서 방위 산업으로 넓힌 건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 때문인가?

“북한의 위협 속에 자주국방이 박 대통령의 첫 번째 숙원 사업이라 탄약의 국산화가 절실했다. 구리를 가공하는 회사이니 동(銅)을 원자재로 소총탄, 포탄에 이르기까지 각종 탄약을 개발해 생산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을 직접 만난 적이 있나?

“직접 뵌 적은 없다. 다만 아들 지만과 내가 58년 개띠로 굉장히 친해서 대통령 서거하신 뒤 위로하려고 청와대에서 며칠 잠을 자고 온 적이 있다. 박 대통령이 물을 아끼려고 화장실 물탱크에 벽돌을 넣어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확인도 해봤다. 진짜 있더라(웃음). 천장에 쥐들 뛰어다니는 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사업의 다각화가 대세인데, 풍산은 60년 가까이 한 우물을 파왔더라.

“한 가지라도 세계 최고가 돼야 나라 경제가 산다는 게 아버님 유언이었다.”

-2세는 다르게 가도 되지 않나?

“문어발 확장을 하다 망한 기업이 얼마나 많은가. 서비스업, 식품업으로 진출할 기회도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지금 하는 분야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풍산은 MZ세대가 선망하는 기업이지만, ‘노사분규 1호’ 기업이기도 했다.

“공권력이 들어와 난장판이 됐던 노사분규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경영을 맡은 뒤 사원 제일주의를 지상 과제로 삼은 이유다. 노조와 임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배를 탄 것이고, 나는 대표 영업 사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매년 회사 이익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익의 얼마를 상여금으로 준다는 노사 간 합의가 있다. 그래선지 1991년 이후 단 한 건의 노사분규도 없었다.”

-부영그룹이 1억원의 출산 장려금을 주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돈보다 유연한 근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시기 경험한 재택근무, 탄력근무처럼 직원들이 시간을 플렉서블하게 쓸 수 있어야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건만 된다면 주 4일 근무도 검토해야 한다.”

2009년 8월 류진 회장의 안내로 안동 하회마을을 찾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등 류진 회장과 친분이 깊은 미 정계 주요 인사들이 하회마을을 찾았다. /안동시 제공

◇부시 대통령 가문과의 인연

-미국 대선은 어떻게 전망하시나?

“누가 되더라도 앞으로 4년은 어렵다. 트럼프가 될까 봐 더 걱정하는 분도 있지만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트럼프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 역시 한국 경제의 막대한 영향력을 알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은 노조에 우호적이고 자국 기업을 우선한다. 반면 공화당은 미국에 투자하는 해외 기업을 자국 기업과 동등하게 대우한다. 유불리 여부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부시에서 바이든까지 미 정계와의 방대한 인맥으로 유명하다. 비결이 뭘까.

“내 별명이 CFO다. Chief Food Officer. 만나는 사람과 모임의 성격에 따라 음식과 와인 리스트를 짜는 데 누구보다 자신 있다. 사람을 웃기는 엔터테이너 기질도 좀 있는 것 같고(웃음).”

-부시 대통령 부자(父子)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1992년 아버지 부시가 방한했을 때 선친이 반농담으로 아이오와주에 우리 공장이 준공되면 와달라고 했는데, 바버라 부시 여사가 진짜 오셨더라. 이후로 크리스마스 때 카드를 주고받고 서로의 집도 방문하면서 가족처럼 지낸다. 아들 부시 대통령과는 1년에 서너 차례 만난다.”

-만나면 무슨 얘길 하나?

“야구 얘기, 골프 얘기(웃음). 정치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결국은 비즈니스가 목적 아닐까?

“우정은 비즈니스로 유지되는 게 아니다.”

-콜린 파월 자서전 ‘My American Journey’는 직접 번역했더라.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에 들어간 사람 중 하나지만, 콜린 파월 자서전은 한 챕터가 다 한국 얘기라 감명 받았다. 1974년 한국에서 미군 2사단 대대장으로 근무했던 때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던 때라고 내게 이야기한 적도 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번역 덕분이라고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번역은 못 할 것 같다. 제2의 창조라는 말처럼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다(웃음).”

-노무현·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 한미 FTA 타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을 만큼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한미 간 가교 역할을 해왔다.

“대한민국을 위한 일에는 좌우가 없다. 기업인이자 국민의 한사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매우 존경하지만 김대중 대통령도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념보다 무엇이 맞는지를 기준으로 선택했다.”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아 ’재계의 선비’ ‘은둔의 경영자’로 불린다.

“선비는 아니고(웃음). 기업인은 경영 실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서지 않았을 뿐이다.”

-류성룡 ‘징비록’의 교훈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데.

“6·25를 겪고도 안보의식이 낮은 것, 플랜B 없이 결정을 내리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김수환 추기경이 말년에 강조한 ‘내 탓이오’ 정신이 분열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권이 가장 문제 아닌가?

“집안끼리 싸우면 바깥을 보지 못한다. 시대적 대전환기에 글로벌 시야와 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국가도 기업도 망한다. 낡은 규제, 정체된 산업구조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혁신해야 한다.”

-청년 기업인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위험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것’이라는 마그 저커버그의 말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모험에 올인 해서는 안 된다. 최악의 경우에 대비한 플랜B를 항상 준비해야 한다.”

2024년 10월 15일 풍산 역사관에서 만난 류진 한경협 회장은 '재계의 선비' '은둔의 경영인'이라는 별명에 "기업인은 회사의 경영실적으로 평가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인터뷰를 고사해왔다"고 말했다. / 장련성 기자

☞류진

1958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다트머스대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82년 풍산금속공업에 입사,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2000년 풍산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2001년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다 2023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으로 추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