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던 달빛이 그 시작이었다. 100년 전 볼셰비키 군대에 체포돼 강제수용소로 향하던 독립군들이 달빛에 흠뻑 젖은 이 철길을 서럽게 달렸을 것이다.
그중에 김경천이 있었다. 1920년대 ‘백마 탄 김장군’ ‘군신’으로 추앙받으며 만주와 연해주를 누빈 항일 투사였으나 소비에트 혁명의 반역자, 일본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악명 높은 우랄산맥 수용소 군도에서 죽어간 비운의 인물이다.
지난 17일 김경천의 위패가 서울 현충원에 봉안됐다. 순국 82년 만이다. 잊힌 독립투사 김경천을 소설 ‘연해주’로 되살려낸 사회학자 송호근은, “100년 전 이념과 노선을 좇아 사분오열했던 독립운동에 실망한 김경천이 분열과 혐오를 반복하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보며 ‘제발 좀 그만 싸우라’ ‘우리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라’ 외칠 것 같다”고 말했다.
◇ 왜 연해주인가?
-어쩌다 김경천에게 매료됐나?
“이념적 편 가르기와 분열이 지속되는 이 시대에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버린 그에게서 위로받고 싶었다.”
-대중에겐 생소한 이름이다.
“구당 유길준의 사상과 행적을 연구하던 중 이기동 교수의 ‘비극의 군인들’이란 책을 접했다. 보기 드문 비록(祕錄)인데, 거기 수록된 ‘김광서의 꿈과 모험’을 읽고 소설을 구상하게 됐다. 김광서는 김경천의 본명이다.”
-김경천은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였던데.
“1905년 고종 밀서 사건과 연루된 혐의로 살해된 김성은 부령(중령)이 김경천의 친형이다. 경천은 천황의 군대에 충성을 맹세한 군인이었지만 식민 통치에 신음하는 조선을 보며 괴로워하다 3·1 만세 운동 직후 망명해 항일 투쟁에 나선다.”
-투쟁의 무대가 만주나 북간도가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라는 게 새로웠다.
“연해주는 항일 운동의 발상지였다. 조선인이 연해주로 이주한 게 1863년부터라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최재형 등 재력이 있는 조선인들이 있었고, 이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대면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생겨났다. 안창호도 중국보다 연해주가 더 중요한 근거지가 될 거라 판단하고 정재관과 이상설을 연해주로 보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게 했다.”
-그런데 연해주에선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같은 큰 승리가 없었다.
“1910년대부터 1922년 말까지 연해주에서 벌어진 항일 투쟁은 당시 독립운동의 모순과 딜레마를 극단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러시아, 일본, 중국 등 강대국에 둘러싸인 채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로 노선 투쟁 하며 분열했던 연해주 독립군은 대부분 좌절하고 실패했다.”
-주로 볼셰비키 군대와 연대해 싸웠더라.
“연해주 독립군들은 러시아만이 조선의 독립을 도울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혁명군은 일본이 퇴각하자 조선 독립군을 무장해제 시킨 뒤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 말만 무성했던 지식인들
-볼셰비키와 연대했다는 이유로 김경천 등 연해주 독립군들이 항일운동사에서 소외된 걸까.
“일단 이들을 연구할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소비에트가 1925년 이후 우리의 항일 운동사 자료를 다 폐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짜 김일성’으로도 알려진 김경천은 볼셰비키 당원이었나?
“그의 일기 ‘경천아일록’을 보면 ‘나는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는 자유주의자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러시아 적군이 독립군을 참살한 사건(자유시 참변)을 보며 일본 군국주의에 못지않은 러시아의 광기와 폭력성에 치를 떨기도 한다. 훗날 김경천이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혀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간 이유다.”
-’경천아일록’엔 명문(名文)이 많더라.
“카자흐스탄에 살던 김경천의 유족이 2005년 까라간다 정보국 문서보관소에 신청해 구입한 그 일기장은 연해주 항일 운동사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자신의 유년기와, 연해주 항일 투쟁 시기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는데, 일본에서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은 경천의 문장력이 뛰어난 데다 곳곳에 자신이 지은 시문과 지도를 곁들여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읽힌다.”
-어느 대목이 인상 깊었나?
“1922년 러시아에 의해 무장해제된 독립군들이 ‘겨울을 당하여 각지에서 걸인같이 방황하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고 쓴 대목들.”
-지청천처럼 김경천도 상해로 가면 되지 않았을까?
“지청천의 권유로 상해를 방문했지만 김경천이 마주한 건 분열과 분파였다. 총·칼 들고 한번 싸워본 적 없는 사람들이 모여 말만 무성하게 해대는 모습에 실망한 채 연해주로 돌아온다. 15만 조선인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도 컸을 것이다.”
-소설 속 다 같이 ‘독립군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뭉클했다.
“재력가 최재형은 체코 군인들에게 사들인 무기를 숨겨뒀다가 독립군 부대에 나눠줬다. 그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서는 병사들 나이가 열아홉, 스물이었다. 변변히 먹지도 입지도 못한 채 나라를 되찾겠다는 각오로 싸우는 전투 장면을 묘사할 땐 며칠씩 몸살을 앓았다. 동시에 입만 나불대는 지식인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도 총과 칼을 들고 싸울 수 있었을까.”
-우연인지, 소설이 8·15 경축식이 둘로 쪼개져 열린 시기에 나왔다.
“서로 다른 길이지만 같은 목적을 향해 걸어갔던 사람들, 대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그분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이념·정파 싸움에 몰두하는 우리가 부끄럽다. 연대해도 모자랄 판에 이승만이냐 김구냐를 다투는 우리가 부끄럽다.”
◇ ‘아버지 죽이기’서 ‘아버지 찾기’로
-사회학자가 왜 소설을 쓰시나?
“사회과학은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려 하지만 ‘이해’는 못 한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과학자가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인문학자 혹은 문학인은 그 길을 가는 사람이다.”
-’강화도’ ‘다시, 빛 속으로’ ‘연해주’까지 소설을 세 편 발표했는데, 한국인의 역사적 정체성의 변화를 탐구해 온 송호근의 역작 ‘인민의 탄생’ ‘시민의 탄생’ ‘국민의 탄생’ 3부작의 소설 버전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더라.
“세 작품이 탄생 3부작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봉건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를 탐구하면서 인민, 시민 국민의 삶에 눈 떠가는 과정을 소설로 형상화해 보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탄생 3부작에 몰두한 이유가 ‘아버지 죽이기’에서 아버지를 찾아야 하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우리 70년대 세대는 한국의 못난 과거가 폭압적인 현재를 낳았다고 믿었다. 우리의 과거는 결핍과 열등감의 수원지라 믿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아버지, 할아버지의 시대를 알아야 현재 우리 사회가 부닥쳐 있는 난제들을 풀 수 있는 거였다. 20세기 한국의 기원을 찾아 역사의 미로를 헤매기 시작한 이유다.”
-무엇을 찾았나?
“이를테면 한국 사회에서 타협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조선 시대 500년을 이어온 과거 시험에 있었다. 1년에 세 번 과거를 봤고, 한 번 볼 때마다 1만5000명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채점 기준은 누가 사서삼경의 원문에 맞게 쓰고 해석했느냐였다. 거기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만 있지, 변증법이라는 게 없다. 정당성 투쟁이 DNA인 사회에 정의는 없다. 그것은 타협을 통해 도달하는 개념이다. 시비를 가리고 정답을 찾는 데만 몰두해 온 것이 오늘의 경쟁 사회, 경쟁 교육을 낳았다.”
-’나는 시민인가?’ 하는 화두도 던졌다.
“대한민국이 생기고 80년이 돼가는데 변한 건 딱 한 가지, 잘살게 된 것뿐이다. 우리의 시민 의식이 형성된 과정은 왜곡의 연속이었다. 시민의 핵심은 권리와 책임인데 우리는 권리 주장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나마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라는 훈화를 들었는데 요즘엔 종교인들도 그런 얘기 잘 안 한다. 자유만 있고 책임은 실종됐다.”
-정치는 더 나빠지고 있는데.
“586세대가 물러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이념과 진영을 사수하는 것이 인생의 신념으로 굳어져 있는 이 세대는 민주주의를 출산했지만 육아하는 데는 실패했다. 민주주의를 죽일 수도 있다.”
◇ 100년 전 유길준의 관복
-가수 조용필에게 ‘어느 날 귀로에서’라는 노랫말을 써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요즘도 작사를 하시나?
“2년 전인가, 한번 더 써준 적이 있는데 퇴짜 맞았다(웃음).”
-조용필의 오랜 팬이라고 했더라.
“유학 시절 힘들 때마다 테이프가 닳도록 들은 노래가 ‘창밖의 여자’다. 그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창밖의 여자’는 시대를 담은 노래였다. 우리는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를 ‘누가 민주주의를 아름답다 했는가’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웃음).”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의 저자로 송호근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50대 인생 보고서였는데 지금은 60대가 된 그들이 현재에도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연령층으로 최근 보고됐다.
“곧 손녀가 태어난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부모를 부양한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식에게는 부양받지 못하는 우리 세대는 이제 손자들 돌볼 준비를 하고 있다. 전 연령대에서 일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는 건 노후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슬프다.”
-다음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김경천을 우회해 다시 유길준이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20대에 한 박물관에서 유길준의 관복을 보고 울컥했다. 유길준이 1856년생, 내가 1956년생으로 100년 차이인데, 그는 왜 100년 전 이곳에 왔을까 하는 질문을 27세였던 그때 처음 가슴에 품게 됐다. ‘서유견문’을 읽을 땐 눈물이 났다. 그가 왜 제1장에 ‘세계 지리’부터 소개했는지 이제는 안다. 갑오개혁의 실패로 망명한 뒤 도쿄서 1000킬로 떨어진 절해고도로 유배 간 유길준의 심경에서 소설을 시작해 볼까 한다.”
☞송호근
1956년 경북 영주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포스텍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한림대 석좌교수 겸 도헌학술원 원장이다. ‘인민의 탄생’ ‘시민의 탄생’ ‘국민의 탄생’ 등 여러 저술이 있으며, 장편소설 ‘강화도’ ‘다시, 빛 속으로’를 발표했다. 이병주국제문학상, 지훈학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