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동고 졸업식은 별나다. ‘개근상’ 수상자를 가장 먼저 호명해 축하한 뒤, 욕하지 않은 학생에게 주는 ‘바른언어상’, 친구를 돕고 배려한 학생에게 주는 ‘미스터 중동인상’ 순으로 시상한다. ‘성적 우수상’은 ‘다독상’에 이어 맨 마지막에 준다. 4년 전 이명학 교장이 부임하면서 새로 정한 순서다.
입시 전장(戰場) 강남 8학군에서 성적보다 인성 좋은 아이들을 길러내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된 이명학 교장이 오는 2월 퇴임한다. “서울대 많이 보내는 학교가 아니라, 사회에 선한 영향력 미치는 동문이 많은 학교가 명문”이라 못 박았던 그는, ‘꼴찌도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무수한 실험을 했다. 이명학의 도전은 성공했을까?
◇ ‘깨진 계란’의 흔적은 남을 것
-4년간 숱한 화제를 낳고 퇴임한다.
“퇴임으로 제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게 돼 다행이지만, ‘학교다운 학교’를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를 모두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실패했다고 생각하나?
“현실의 벽을 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나의 도전은 실험에 그쳤지만, 입시만이 전부인 이곳에 ‘학교의 존재 이유’를 화두로 던진 건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공고한 입시 철벽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될 거란 예상도 했을 텐데.
“계란은 바위에서 무참히 깨졌지만, 그 흔적은 남을 것이다(웃음).”
-’개혁’의 여정에 가장 큰 걸림돌은 뭐였나?
“학부모님들이 가장 힘들었다. 자녀의 명문대 입학이 최대 목표인 일부 부모님들은 공부만이 모든 평가의 기준이라 안타까웠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면 42.195km 여정에서 겨우 1km를 죽기 살기로 달리는 셈인데, 나머지 거리는 무슨 힘으로 뛰게 하려는지 모르겠다. 대학 입학 후 정신적 문제로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이유다.”
-학부모도 여러 부류일 텐데.
“부모가 어려서부터 사교육을 강제해 아이가 주눅 들어 있는 그룹이 전체의 20~30%다. 이분들은 입시와 관련 없는 학교 프로그램에는 관심조차 없다. 당연히 나에게 불만도 가장 많다(웃음). 아이 성적은 좋은 편이지만 자존감은 낮고 불안·우울 등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는 아이가 많다. 그래서 아침에 ‘3분 명상’을 시작했다.”
-자녀를 ‘분재’하듯 키우는 게 문제라고 했다.
“자기 눈에 이뻐 보이도록 아이를 쇠줄로 묶어 분재하는 것만큼 잔인한 일은 없다. 아이 스스로 가지를 쭉쭉 뻗으며 자라야 하는데, 이걸 꺾고 억누르니 병이 드는 것이다.”
-입시지옥,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에서 부모만 탓할 수 있을까?
“교육 문제는 기업, 지역, 계급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행복이란, 성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의식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어떤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행복과 성공의 기준이 달라져야 한다는 뜻인가?
“양양고속도로를 타고 속초에서 서울로 올 때 우리 옆에 포르셰가 달리고 있었다. 길이 막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는데 결국 서울에는 비슷하게 도착했다. 인생과 뭐가 다른가 싶더라. 돈과 권력이 있어도 종착점에 이르는 건 누구나 같다. 그러나 어떤 차 안에서는 가족이 웃고 떠들며 즐겁게 도착하고, 어떤 차 안에서는 싸우고 욕하고 얼굴 붉히며 도착한다. 누가 더 행복할까? 행복에 대한 기준이 바뀌면 무조건 의대 가서 돈 많이 벌라는 부모도 줄어들 것이다.”
◇ 느껴야 변화한다
-’꼴찌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성공했나?
“나는 공부 못하는 게 큰 죄인 것처럼 여기는 사회 풍토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게 왜 죄인가? ‘자존감 향상 프로젝트’는 그래서 시작했다. 성적 낮은 학생들에게 자기주도학습 계획서를 받고 매일 실천하는 과정을 살펴봤다. 놀랍게도 수학 성적이 200등 언저리에 있던 학생이 100등으로 치고 올라오더라. 성적이 오른 것보다 아이가 자존감과 자신감을 되찾은 것이 매우 기뻤다. 이 학생이 쓴 후기에 ‘예전의 나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이 가슴을 울렸다.”
-성적 하위권 학생들에게도 장학금을 주더라.
“무슨 일이든 창의적 발상으로 꾸준히 도전하는 학생들에게 줬다. 성적은 낮지만 민물고기에 관한한 전문가급 실력을 갖춰 어류학회에서 발표도 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줬더니 어머님이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 학생은 미래에 최고의 어류 전문가가 돼 있을 것이다.”
-욕을 안 하면 ‘話(화)’ 자가 새겨진 배지를 준다.
“요즘 아이들에게 욕은 말의 일부, 조사 정도로 여겨질 만큼 일상화돼 있다. 욕이 왜 나쁜지 여러 번 얘기했지만 소용 없더라. 그래서 발상을 바꿨다. 한 학기 동안 욕을 한 번도 하지 않는 학생에게 배지와 선물을 줬다. 첫 학기엔 전교생 1000명 중 120명, 다음 학기엔 160명으로 늘어났다.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손편지 쓰는 행사도 부임 직후 시작했다.
“부모 자녀 관계 회복에 특효약이다(웃음). 부모에게 손편지를 태어나 처음 받아본 아이들이 많더라.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눈물 범벅이 됐다는 어머니도 있고, 편지를 받고 엄마를 끌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한 아이도 있었다. 편지를 받고 아버지와 아들이 처음 깊은 대화를 나눴다고도 한다. 잔소리는 백날 해봐야 소용없다. 아이는 ‘느껴야’ 변화한다. 학교가 그런 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재직 중 학부모에게 쓴 편지를 모아 ‘부모, 쉼표’라는 책을 냈다. ‘구절비이성의(九折臂而成醫)’를 인용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
“팔뚝이 여러 번 부러져 봐야 의사가 된다는 뜻이다. 부모는 ‘아이가 실패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하나에서 열까지 돌봐주지만, 아이는 넘어져서 상처가 생기고 굳은살이 박이듯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마음이 짠해도 일찍 손을 놔줘야 아이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생긴다.”
-비교하지 말라고도 했다.
“노자에 ‘장단상교(長短相較)’라는 말이 있다. 모든 길고 짧음은 비교하는 데서 생긴다는 뜻이다. 다른 집 아이와 비교하지 말고 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장점을 찾아 칭찬해라. 먼 훗날 내 아이가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 한다.”
◇ 학부모에겐 ‘악명’ 높은 교장
-교사에게 욕설한 학부모에게 사과를 받아내고, 여교사를 희롱한 학생들에겐 중징계를 내린 ‘강성 교장’이었다.
“아이 교육을 맡기고 선생님께 욕을 하는 게 말이 되나. 교장이 나서지 않으면 교사가 느꼈을 충격, 무너진 자존감은 누가 지켜주나. 여교사 희롱은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남학교라 일벌백계의 심정으로 처리했다. 교권은 학교장이 앞장서서 지켜야 한다.”
-학부모들에겐 ‘악명’이 높겠다.
“선생님들에게 모든 책임은 내가 질테니, 학부모가 소리 지르면 같이 지르라고 한다. 교육청과 언론에 알리겠다고 협박하는 학부모에겐 꼭 그렇게 하시라고 한다. 몇몇 학부모들에게 나는 ‘악질 교장’일 것이다(웃음)”
-교권 추락의 가장 큰 원인이 뭘까?
“어느 소설가 표현대로 ‘내 새끼 지상주의’가 빚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못 참는 것이다.”
-교사에겐 문제가 없을까?
“학생인권조례로 교사가 교육 현장에서 의지를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수업 시간 잠자는 아이를 깨울 수도 없고, 말썽 일으킨 아이를 큰소리로 혼낼 수도 없다. 폭력·폭언 교사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학생인권조례가 교사의 정상적 교육 활동까지 막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교권 추락은 공교육의 붕괴를 방증한다.
“학교가 학교답지 않기 때문에 힘을 잃었다. 사람을 키우지 않고 성적으로 줄 세우는 학교로 전락한 탓이다. 교권 확립없이 교육은 없다.”
-현행 입시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공교육의 부활은 요원한데.
“갈 길이 멀지만 올해부터 시행하는 고교학점제가 변곡점이 되길 기대한다. 학점제가 정착하려면 대학이 학생 선발 기준을 고교학점제 취지에 맞게 새로 만들고 면밀히 관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누굴 원망하고 누굴 탓하랴
-대입 결과를 받아들었을 학생들에게.
“한 번의 시험 결과로 낙담하지 말 것, 10대에 본 한 번의 성적으로 평생을 사는 게 아니니 고개 숙이지 말고 당당하게 맞설 것. 길고 긴 인생살이에 생기는 수많은 변수에 대응하는 능력은 수능 성적과 아무 관련이 없다.”
-’명문대 진학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은 검증되지 않은 것이라고도 했다.
“살면서 내가 만난 훌륭한 사람들은 스카이(SKY) 대학 출신이 아니라, 정직과 배려, 공감력과 성실함 등 삶을 대하는 자세가 남다른 사람들이었다. 모교에 장학금을 기부하는 동문도 전교 1, 2등을 다투던 학생들이 아니다. 품성만 좋으면 뭘 해도 한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시절부터 형편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 ‘키다리 아저씨’로 불렸다.
“나 혼자 한 일이 아니다. 돈 많이 버는 친구와 선후배에게 ‘천국 가는 티켓을 구하는 일’이라고 설득해 십시일반 모아서 도운 것이다(웃음).”
-선친 이상목은 두 아들이 다닌 중동고에 10억원의 장학금을 기부했다.
“열일곱 살에 평양에서 내려와 자수성가한 분인데, 어려운 사람들을 늘 돕고 싶어 하셨다. 두 아들보다 신문 배달하는 아이의 운동화를 먼저 사주셨던 분이다.”
-10억원은 큰돈인데 집에서 반대하지 않았나?
“어머니는 찬밥 한덩이 구걸하는 거지에게 늘 따뜻한 밥을 내주시던 분이다. 누구에게도 하대하지 않으셨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삶으로 보여주셨다.”
-가장 좋아하는 한자 성어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했던데.
“공감하고 배려하는 삶. 이것만 잘 지키고 살면 평생 욕먹을 일 없다(웃음).”
-초유의 정치 소용돌이에 갇힌 한국 사회에 주고 싶은 한자 성어가 있다면.
“수원수구(誰怨誰咎). 누굴 원망하고 누굴 탓하겠는가? 정치인도 국민도 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
☞이명학
1955년 서울 출생. 중동고, 성균관대 한문교육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했다. 성균관대 교육대학원장, 한국한문교육학회장, 한국고전번역원장을 역임한 뒤 2021년부터 중동고 교장으로 재직했다. ‘대한민국 스승상’, ‘SBS 100대 좋은 대학 강의상’을 받았다. 저서로 ‘한문의 세계’ ‘옛 문헌 속 고구려 사람들’ ‘어른이 되어 처음 만나는 한자’ ‘부모, 쉼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