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크루즈에서 잔다니! 얼마 전 울릉도 출장에는 이런 기대가 있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야장(夜場)과 뜨끈한 국물이면 밤을 보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자정에 가까운 시간, 크루즈가 출항하며 예기치 못한 어둠이 깔렸다. 야장과 식당이 문을 닫고, 휴대폰 통신은 거의 먹통이 됐다. 몸 크기만 한 침대 위, 못다 한 일들을 생각하며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 찾아간 편의점엔 라면조차 없었다.

잠이 개인의 경험만은 아니라는 걸 그날 깨달았다. 여러 얼굴을 한 사람들이 크루즈 편의점 앞에 모였다. 술에 취해 빨간 얼굴, 잠을 포기한 채 일하는 얼굴. 비록 편의점 문은 닫았지만, 그 앞 의자는 가득 찼다. 술 냄새가 섞인 듯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적막을 깼다. 동시에 잠도 깼다. 어느새 시간은 두 시, 눈은 감기질 않았다. 잠은 오롯이 혼자가 될 때 가능한 행위이지만, 잠을 자는 시간에도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잊고 지냈던 것이다.

좁은 공간에 모여 살아가는 우리의 거주 특성상, 한 사람의 불면은 다른 이에게 전염되기 쉽다. 잠을 자야 하는 시간, 층간 소음으로 잠들지 못한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같은 행동이라도 ‘잠’과 관련되면 더욱 예민해진다. 고속버스나 비행기에서 의자를 심하게 젖혀서 큰 다툼으로 이어지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제는 잠과 관련된 논란에 명확한 잣대를 들이대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윗집에 “내 잠을 깨웠다”며 감정적으로 대응한다면, “저 아닌데요” 내지는 “그래서요?”라는 답을 듣기 십상이다. 잠은 각자 개인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행동인 만큼,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로 여겨지는 탓이다. 그사이 잠 못 드는 이들은 늘어나고 있다. 작년 수면 장애로 병원에서 진료받은 사람은 약 110만명. 4년 사이 24만여 명이 늘었다. 타인과의 관계나 성장 강박 등 불면의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잠에 예민한 사회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에 가깝다.

최근 의외의 지점에 해답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잘 오지 않을 때, 비가 내리거나, 장작이 타는 등 자연 소리를 담은 영상을 듣는 것에 빠졌다. 단순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소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수백만을 넘는 조회 수보다 놀라운 점은 댓글에 있다. “오늘도 잠 못 들고 이곳에 온 당신, 걱정 말아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오늘 하루는 푹 자고 행복하길요.” 많은 이가 ‘나 혼자 잠에 못 드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댓글에서 공유하고 있었다. 타인의 잠을 방해하는 이들도, 언젠가 이런 댓글을 보며 비슷한 경험을 하지는 않을까.

타인과 단절돼 있다는 감각은 잠만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많은 이가 자신이 사회에 홀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 사회는 초라해진다. 누군가에게 잠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가장 개인적이라고 여겨지는 ‘잠’부터 존중돼야 하는 이유다. 참고 기다리면 아침이 온다? 아니, 누군가와 함께 아침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