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파라면 공감할 것이다. 새로에 이어, 최근 참이슬 후레쉬마저 알코올 도수가 16도로 낮아졌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참이슬 라벨을 확인했다. 16.5도. 다행히 재고였다. 누군가는 0.5도가 대수냐고 묻겠지만, 소주파로선 위기다. 술자리를 지배하는 소맥(소주+맥주)파 사이에서 소주를 고집할 수 있던 건 쓴맛 덕분이었다. 함께 취할 수 있을 정도론 써야 하는데, 소주는 꾸준히 도수가 낮아지고 가격은 상승해 왔다. 지금 추세라면 소주파는 머지않아 고집쟁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이해는 된다. 낮은 도수의 술을 찾는 소비자 선호를 반영한 결정이었다. 16.5도는 2006년 출시된 참이슬 후레쉬의 도수(19.8도)에 비하면 낮지만, 하이볼 등 지금 인기를 끄는 술보다는 높다. 소주와 어울리는 음식에 가볍게 한잔하고, 소셜미디어에 사진을 올릴 목적으로 16.5도는 적당하지 않았던 셈이다.

소주만 그럴까. 많은 결정이 타인을 기준으로 이뤄지는 요즘, 남들과 다른 삶을 고집하기가 쉽지 않다. 젊은 세대에선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이나 ‘갓생’(God+生)을 인증하지 않는 삶은 뒤떨어졌다고 여겨지곤 한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할 때 행복한 사람도, 취미를 물어보면 적당히 둘러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그 ‘적당히’에 익숙해지고 있다. 서점 소설 매대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사진관, 세탁소 등 비슷한 장소가 제목에 포함된 소설 여럿이 수년째 상위권에 있다. 우연히 찾은 장소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 내용. 행복이 사고파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처럼 쉽게 얻은 행복은 불행을 덮으려는 기만에 가깝다. 많은 이가 여가 시간을 보내고 독서 인증을 하기에 적당한 책을 선호한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운 이유다.

최근 한 문장에 목이 막혔다.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이란 어쩌면 생각보다 지나치게 허술하거나 혹은 실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곧 넷플릭스 영화로 개봉하는 조해진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의 일부다. 화자는 탈북인 로기완의 사연에 끌림을 느껴 벨기에로 향한다. 허술한 기록으로 남은 그의 흔적을 쫓는 소설은, 삶의 이유를 온몸으로 찾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비록 실패할지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후에야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알코올 도수 역시 생각보다 허술한 기록은 아닐까 위안해 본다. 며칠 전 밤 10시, 술집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건배를 한 적이 있다. 가게 주인이 정체 불명의 칵테일을 만들어 모든 손님에게 나눠줬다. 일행과 대화의 흐름이 끊겨 심기가 불편한 상황, ‘가게 홍보를 이런 식으로…’라고 생각했다. 가게 주인은 고집스럽게 모두의 주의를 끌곤, 건배를 제안하며 말했다. “코로나 땐 밤 10시에 가게 문을 닫아서, 가시는 손님들께 드리던 술이에요. 오늘은 더 머무르며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요.” 도수는 모르지만, 시큼했던 술맛이 기억난다. 가게 주인의 사연, 미소와 함께. 술에 그런 미소를 담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