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사이드 아웃2'에 등장하는 캐릭터 '불안'/뉴시스

오랜만에 영화를 보며 조금 울었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2′ 이야기다. 눈물샘을 자극한 범인은 이번 편에 새로 등장하는 캐릭터 ‘불안(anxiety)’. 사춘기를 맞은 주인공 라일리의 마음에 새로 찾아온 감정이다.

‘불안’은 등장과 동시에 다른 감정들을 억압하고 라일리의 마음을 장악한다. 처음엔 나쁜 상황을 피해가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며 라일리를 더 나은 선택지로 이끄는 듯했다. 그러나 지나친 걱정은 결국 독이 되는 법. 불안에 잠식당한 라일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뇐다. “나는 부족해(I’m not good enough)”.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후에야 상영관을 나선 이 중 상당수는 또래로 보였다. 대부분 눈가가 벌게진 채였다. 실제로 영화는 2030 관객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다. 개봉 한 달여 만에 7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전편(497만명)을 넘어서는 흥행을 기록 중이다. 극장가에 따르면 관람객 절반 이상이 2030세대라고 한다. 이유를 알 것 같다.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여온, ‘불안’에게 마음의 조종간을 내어준 스스로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을 테다.

흔히 한국인의 DNA에는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고들 한다. 수백년간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고, 식민 지배를 당하고, 분단을 겪었다. 선배 세대들은 생때같은 자식을 굶길까 봐, 부모를 부양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런 불안이 한때는 국가 성장의 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진 자원이라곤 사람밖에 없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온 국민이 불안을 동력 삼아 스스로를 채찍질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먹고살 만해진 후에도 우리는 불안을 내버려뒀다. 방치하는 것을 넘어 증식하게 했다. 몸집을 불린 불안이 만든 절대 명제가 한국 사회를 잠식했다. ‘남들에게 뒤처져선 안 된다’. ‘7세 고시’라는 단어만 봐도 그렇다. 초등학교 입학 전 대치동 유명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보는 레벨 테스트를 그렇게 부른단다. 어쩌면 기억조차 희미한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불안에게 삶의 컨트롤 타워를 넘겨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아(自我)보다 빨리 자란 불안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강은 ‘기적’ 아닌 ‘투신’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저출생 현상을 경제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집값이나 물가 같은 이유도 분명 있다. 그러나 진짜 핵심은 ‘내 대에서 불안의 대물림을 끊겠다’는 것이다. 무한 경쟁이 기본 값인 사회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불안을 2배로 짊어지는 일이다. 나도 뒤처지지 않으면서 아이도 낙오되지 않도록 끝없이 발을 굴러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부모의 불안이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전이된다. 그렇게 불안의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출산을 포기하는 것은, 그 고리를 끊고 싶은 청년 세대의 발버둥이다.

정책을 만드는 이들이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청년들은 왜 ‘인사이드 아웃 2′를 보고 우는 걸까. 그 마음을 들여다볼 생각이 없다면, 앞으로 이 나라엔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불안의 숙주로 사는 것이 당연한 사회를 굳이 새로운 세대에게 물려줄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