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다닐 때 중간·기말고사 시험 당일에만 얼굴을 볼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 이름만 알 뿐 얼굴도 모르니 친구보다는 ‘같은 반 학생’ 정도가 더 맞는 관계다. 시험 시작 직전 흙 묻은 유니폼을 입고 교실로 들어와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답안지를 몇십초 만에 채우고, 나머지 시간은 책상에 엎드려 단잠을 자다가 나가는 야구부원이었다. 훈련을 피해 쉴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 같아 안쓰럽기도 했다.

그중 몇 명은 한 살 나이가 많은 형들이었다. 졸업을 앞둔 3학년, 야구부의 전국대회 성적이 좋지 않으면 몇 명은 유급을 택했다. 프로야구 드래프트(신인 선수 선발), 야구부가 있는 대학 진학 가능성이 떨어져, 재도전을 택한 것이다.

같은 반에서 시험을 쳤던 상대적으로 평범한 학생들이 수능 시험을 다시 보는 재수, 삼수처럼 재도전이라는 건 같지만, 현실적으로 하늘과 땅 차이다. 부원 숫자가 제한되는 야구부에서 후배들과 포지션 경쟁을 다시 해야 하고, 2년 유급은 사실상 불가능해 다시 주어진 한 번 기회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고등학교 졸업 전, 4학년 야구부원을 포함해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선발된 야구부원은 단 1명으로 기억한다.

11일 2025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가 열렸다. 고등학교 졸업 예정자 840명, 대학 졸업 예정자 286명, 얼리 드래프트 신청 56명, 해외 아마추어 등 기타 선수 15명까지 더해 1197명이 대상이었다. 프로야구 10구단이 총 11번씩 선수 지명권을 모두 사용해 뽑을 수 있는 최대 인원인 110명을 뽑았다. 그래도 10%에 미치지 못한다.

프로 무대는 현실이고 그 가능성에 도전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비정규직’인 육성 선수로 프로 구단과 계약해 최저 연봉을 받으며 연습생 신화를 쓰는 선수도 드물게 있다. 반면, 한때 주목받았지만 부상 여파로 지명을 받지 못하거나, 구단 사정이 어려워 예상보다 선수 지명 규모가 줄어드는 경우도 있다. 그런 뉴스를 볼 땐 고등학교 시절 야구부가 떠올랐다.

프로야구 지명을 받지 못했지만 10여 년 뒤 새로운 진로에서 성공한 인물을 인터뷰한 적 있다. 프로 진출 실패 후 재수 학원에 등록했지만, 모의고사 성적은 400점 만점에 70점. 그는 “스무 살 때까지 알파벳 소문자 피(p)와 큐(q)도 구별 못 했다”고 했다. 대신 야구 할 때 생긴 규칙적인 생활 습관과 집중력이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돌아가면 야구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엘리트 운동 선수, 자격 시험, 창업, 학문 연구 어느 분야든 성공하려면 한 우물만 파야 하는 건 현실이다. 유급뿐 아니라 중학생 때 자퇴를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20대 초반에 ‘은퇴 선수’가 된 이들의 불안과 진로를 연구한 논문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야구 대신 새 진로의 출발점에 섰던 그때 인터뷰이는 많은 사람이 부러워할 직업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내내 담담했다. 성공 비결을 이야기하는 대신 “야구를 하는 10년 동안 다른 삶에 대해서 알려준 사람도, 경험할 기회도 없었다. 엘리트 스포츠를 하는 어린 운동 선수들이 다른 적성도 알아볼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