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쯤 국민의힘 청년위원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나라’ ‘땅개 알보병’ 등 자기소개 포스터 문구가 물의를 빚었다. 이 사안으로 박결(35) 중앙청년위원장이 직책 사퇴와 정치 활동 중단을 선언했을 때, 나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요즘처럼 철면피가 득세하는 세태에 이 젊은 친구는 책임질 줄 아는구나 하는 대견함, 다른 하나는 사명감을 갖고 정치에 뛰어든 젊은이가 그만둬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는 작년에 우파 청년 정당인 ‘자유의새벽당’을 창당했던 젊은이다. 확실한 자유 우파 정치를 세련되게 선보이겠다고 했다. 작은 정부, 낮은 세금, 힘의 외교, 반중친미 등을 내걸었다. 당원 수가 3만5000명쯤 됐다고 한다.
‘육군땅개 알보병’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그는 범보수 통합을 위해 미래통합당에 참여했다. 하지만 지역구 공천은 받진 못했다. 총선 뒤 김종인 비대위 체제가 들어서자 당 중앙청년위원장에 임명됐다. 이번 포스터 사건은 당 청년 조직을 정비 확대하는 과정에서 터진 것이다.
“새로 임명된 청년위원들이 재미있게 ‘B급 코드’로 자기소개 포스터를 만든 겁니다. ‘육군땅개 알보병’ ‘한강 갈 뻔함’ 같은 문구는 청년 세대 감성에 맞춘 것이지, 수준이 낮아 그랬던 게 아닙니다. 이들은 배울 만큼 배운 직장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나라' 같은 문구는 대놓고 종교적 색채를 드러냈는데?
“정당 공식 홍보물이 아니라 자기 포부를 담은 개인 포스터였습니다. 그 포스터를 만든 여성 위원은 독실한 기독교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했고 영미권에서는 기독교보수주의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 점을 드러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물론 표현이 미숙하고 정제되지 못했습니다.”
―논란이 될 것으로 예상 못 했나요?
“얼마간 예상은 했지만 청년들이니 시도해볼 만하다고 봤습니다. 민주당원처럼 욕설이나 성추행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줄 몰랐습니다. 좌파 진영의 공격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당 내부에서도 동조해 총을 쏴댔습니다.”
―당으로서는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하니까요.
“매스컴에 보도된 다음 날 아침, 김종인 위원장이 전화를 걸어와 ‘극우 메시지가 왜 나왔나?’ 하고 질책했습니다.”
―품위와 종교색 논란은 있겠지만, 그게 극우 메시지였나요?
“당에 피해가 되면 모두 극우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날 오후 당 긴급비대위에서 해당 청년위원 3명에 대해 면직 및 내정 취소를 발표했습니다. 소명 기회조차 안 줬습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죽었다’는 뜻으로 검은색 바탕의 국화 사진을 올렸습니다.”
―당에 피해를 주고서 뭐 잘났다고 반발하느냐는 소리를 들었을 법한데?
“청년중앙위원회는 당 상설기구이지만 재정 지원도 사무실도 없습니다. 각자 직업이 있는 청년들이 자기 시간과 비용을 들어 우파 정당을 위해 헌신해왔습니다. 우리끼리 으싸으싸 하며 만든 그 포스터가 그렇게 지탄받아야 할 사안입니까. 당사자들은 비난과 인신공격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해나가기 어려웠는데, 당은 징계만 했지 보호할 생각은 전혀 안 했습니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취재진 앞에서 “청년이 더 진취적이지 못하고 옛날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당에 별로 도움 안 된다”고 촌평했는데?
“무엇이 진취적인가요. 청년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을 쫄지 않고 자신 있게 하는 것이 진취적 아닌가요. 당 지지율에 목매니까,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도발적인 일을 벌이면 안 된다는 식이 됐습니다. 잘 길들여지는 청년만 당에 남게 해 꼭두각시로 만듭니다. 옛날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는데, 저희는 외국 생활을 훨씬 더 경험해본 세대입니다.”
―본인의 포스터는 논란이 안 됐나요?
“제 포스터 문구는 ‘저항이 없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여서 논란이 안 됐습니다.”
―그런데 왜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나요?
“해당 친구들 사진이 마치 범죄자 몽타주처럼 온라인에 돌아다녔습니다. 이들은 아직 정치인이 아니라 직장인 신분입니다. 이들을 보호하려면 제가 사퇴해 매스컴의 관심을 돌리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청년이 할 말도 못하는 이런 상황이면 굳이 남아 있을 필요가 있나, 약간 논란만 생겨도 내치는 이런 분위기라면 청년 정치는 허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인은 지난 총선에서 극우 이미지 때문에 공천 탈락한 걸로 들었는데?
“김세연 공천위원이 직접 ‘극우 색깔이 너무 세 내가 공천을 반대했다.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경험을 더 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쩌다가 본인이 ‘극우’로 찍혔을까요?
“저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 작은 정부, 공무원 수 감축, 낮은 세금 등이 옳다고 보는 우파가 맞습니다. 프랑스의 마크롱 좌파 정부도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데, 제게는 ‘극우’ 딱지를 붙입니다. ‘반일’이 아닌 ‘친미반중’을 표방해서 그런지…. 제가 우파 본류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온 점은 인정합니다. 가령 청와대 앞에서 공수처법 제정과 선거법 개정에 반대해 황교안 전 대표가 단식했을 때 저도 동반 단식을 했습니다.”
―입장을 선명하게 드러내면 ‘극우’인가요?
“왼쪽으로 너무 기울어진 정치 지형에서 우파 본류를 내세우는 게 극우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제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파 정체성 포기
―우리 사회에는 우파 가치를 마치 극단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퇴행적 가치로 덮어씌워 버리지요.
“국민의힘 구성원의 가장 큰 문제는 그런 프레임에 갇혀 우파 정체성을 포기하려는 것입니다. 우파 가치가 구시대적이라면 어떻게 미국 공화당과 영국 보수당, 일본 자민당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지금 야당은 우파 가치에 기반을 두고 외연을 확장하는 대신, 거점을 아예 왼쪽으로 옮겨버렸습니다. 우파의 가치가 옳다는 걸 국민에게 어떻게 세련되게 설득할지 그런 고민을 포기한 것 같아요.
“국가가 흔들흔들한데 우파 정당도 흔들흔들하고 있습니다. 좌파 전체주의로 몰아가는 현 정권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는 우파 본류 가치라고 봅니다. 문제는 우파적 메시지에 있는 게 아니라 이를 전달하는 메신저에 있습니다. 우파 메신저가 오염됐기 때문에 그 메시지가 힘을 잃은 겁니다.”
―영국 골드스미스 런던대학에서 문화산업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어떻게 정치판에 들어오게 됐지요?
“석사를 마쳤을 때인 2017년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이 당선됐습니다. 영국 등 유럽 언론에서는 탄핵 촛불집회를 ‘몹 저스티스(mob justice·군중재판)’라고 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었지요. 문재인 후보 공약집을 보고서 사회주의로 가겠다는 걸 알았습니다. 뭔가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귀국했습니다.”
그는 귀국 후 서울 신촌에서 ‘라운지 리버티(liberty)’라는 카페를 열었다. 실내에 이승만·박정희·대처·레이건 사진을 걸어놓았다. 우파 진영에서 행사하면 무료나 할인을 해줬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청년들은 자신을 우파라고 커밍아웃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출근하니 가게 바닥이 똥물로 넘쳐났습니다. 제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누군가가 정화조를 비닐로 틀어막아서 역류케 했던 겁니다.”
―어떻게 카페를 운영할 발상을 했지요?
“제가 학교 다닐 때 꿈이 가수였습니다.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복학생 시절 홍대 거리의 라이브 카페에서 3년간 인디밴드를 했습니다. 수입은 거의 없었지요. 그때 작곡해 부른 두 곡은 음원 등록이 돼 있습니다. 그 뒤 문화산업을 공부하러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우파 진영은 문화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합니다.”
―우파가 좌파에 밀리게 된 것은 문화 영향력을 모두 내주면서였는데?
“우파는 문화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식으로 해왔습니다. 문화 운동은 자발적인 팬덤 층이 형성돼 동참하고 따라오게 해야 성공합니다. 우파는 그런 걸 해내지 못해 좌파에 패배했습니다. 지금 국민의힘이 하는 행태도 10년 전 김제동이 하던 ‘힐링 문화’의 답습에 그치고 있습니다.”
―청년 세대를 치유한다는 그 ‘힐링 문화’를 말하나요?
“예. 당시 좌파가 ‘헬조선’과 함께 힐링 문화를 만들어 10년간 청년을 장악해왔습니다. TV만 틀면 ‘기성세대의 책임이지 너희는 잘못 없다. 우리가 위해 주마’라고 나왔습니다. 그걸로 청년들이 위안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청년들은 ‘너희가 뭔데 우리를 위안하느냐’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우파 정당이 이런 흐름을 못 읽고 과거 좌파가 다 써먹었던 ‘약자와의 동행’ 같은 힐링을 들고나왔습니다.”
한철 장사 끝낸 레시피
―'약자와의 동행'은 대중 공감을 얻어낼 슬로건 아닌가요?
“한철 장사를 다 끝낸 레시피를 뒤늦게 갖고 온 겁니다. 청년 눈에는 만날 보던 지겨운 짓을 저쪽에서 또 시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좌파 정부처럼 복지 재정을 퍼부겠다는 것 아닙니까. 현 정권처럼 청년들에게 고작 몇십 만원 쥐여주며 입막음을 하려는 것이지요. 우파 정당이라면 세금을 낮춰 국민 고통을 덜어 주고 세금으로 유지되는 공무원 등 공공부문을 감축하는 쪽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선거에서 표를 의식하면 퍼주기 경쟁은 불가피한 선택인데?
“음악도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드러내야 언젠가 팬덤이 형성됩니다. 시류에 영합해 자기 색깔을 버리는 가수는 결국 사라집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우파 정당은 자기 가치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대중의 호감과 신뢰를 지닌 우파 메신저가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우파는 좌파 전체주의자들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당의 얼굴로 그와 같은 젊은이를 내세웠으면 국민의힘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됐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현실적인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