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이정현(62) 전 새누리당 대표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왜 할 말이 없겠나. 그 상황에서 아마 박 대통령 다음으로 내가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말하기 좋아하는 다변가(多辯家)이지만, 지금까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서는 침묵해왔다.
―박근혜가 구속되는 날 친박계 핵심 정치인들은 서울 삼성동 자택에 모였으나 당신의 모습은 안 보였다. 탄핵 반대 태극기 집회 등에도 나타난 적 없었는데?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져있었다. 박 대통령을 저렇게 만들어놓고 무얼 떠들겠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참았다. 말해봐야 박 전 대통령에게 이득이나 면죄부가 안 되는데 부질없다 싶었다. 지지 세력을 등에 업고 나서는 것도 솔직히 싫었다. 상황을 바꿀 수 없고 해결책도 아니라고 봤다. 내가 피하고 도망갔다고 하겠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어쩌면 더 힘들었다.”
어떻게 赦免 구걸하나
그는 박근혜 곁에서 14년을 지냈다. ‘박근혜의 입’ 혹은 ‘복심(腹心)’으로 통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청와대 정무수석·홍보수석을 지냈다. 새누리당 대표까지 됐지만, 넉 달 반 만에 사퇴와 함께 탈당했다.
―호남 출신에다 당 사무처 하급직으로 시작했기에, 당대표로 뽑힐 때만 해도 ’17단계 상승'이라며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국정 농단 쓰나미가 몰아닥치자, 가장 앞에 있던 당신이 먼저 휩쓸려 떠내려갔다. 이를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당대표로 선출되지 않았으면 지금 어떠했을까?
“생각지도 못한 태풍이었다. 내 말을 안 믿겠지만, ‘최순실’ 이름을 그때 처음 들었다. 당내에서 사퇴 압박에 몰렸지만 탄핵만은 막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나는 해명도 변명도 책임 회피도 하지 않겠다. 그 불이익을 그대로 감당하겠다.”
―최순실의 존재를 감춰온 박근혜에 대해 배신감은 들지 않았나?
“박근혜의 삶과 생각, 정치 철학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감정은 없었다. 그분에게 씌워진 숱한 혐의가 모두 진실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이란 없다.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정치인·권력자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현 정권에서는 훨씬 더 심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
―탄핵된 뒤로 당신의 입장은 불분명했다. 박근혜와 절연한 것처럼 비쳤는데?
“나는 배은망덕하게 살아오지 않았다. 수감 중인 박 대통령의 전갈을 받았기에 조용히 있어온 것이다. 내가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박근혜를 팔거나 부인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촛불 탄핵에 대한 입장은?
“대중을 동원한 ‘정권 찬탈’로 봤다. 우리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국민이 준 권력을 지키지 못하고 빼앗겼고, 이로 인해 국가와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줬다는 점에서 큰 잘못을 범했다.”
―새누리당의 동조로 이뤄졌는데?
“당(黨)이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하는 무리다. 자기 당에서 뽑은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천인공노할 짓을 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워하지 않겠다. 대통령을 끌어내렸으면 그 공백을 메우는 보수 지도자를 세워놓든지, 아니면 그 역할을 맡는 이가 있어야 했다. 전혀 준비 없이 끌어내리고 그 스스로 대안 세력이 못 됐다.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박근혜는 3년 반 넘게 수감 중이다. 감옥에 갇혔던 역대 대통령 중 최장 기록이다. 야권 인사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박근혜 사면을 요청한 사람도 있는데?
“조심스럽지만 내 입장은 무섭다. 권력을 찬탈한 사람에게 어떻게 사면을 구걸하나. 감옥 생활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박 대통령도 그런 걸 원치 않을 것이다. 정권을 되찾아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당신의 입장은 이해되지만, 탄핵을 찬성했던 대다수 국민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박근혜 정부에서 해왔던 일들이 다 옳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옳은 일도 많았다. 그런 옳았던 일들마저 왜곡됐다. 탄핵으로 정권을 찬탈한 문재인 정부가 잘 이끌어왔는가. 탄핵을 주도한 정권이라면 결단코 비리와 부도덕· 부정부패· 반민주와 결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의 앞날이 캄캄해질 정도로 훨씬 더 심해졌다.”
―당신은 지난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다. 앞으로 계속 정치를 할 건가?
“나는 선거 현장· 호남 지역구· 정당· 국회· 청와대 등에서 정치 경험을 갖고 있다. 이제 내가 무대에 설 생각은 없다. 다만 정권 교체를 위해 골프백을 메는 캐디가 되려고 한다.”
―지금 국민의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야당은 작은 사안에 매몰돼있다. 가령 조국·윤미향·추미애 등 이슈가 터지면 쫓아가기 바쁘다. 곳곳에 난 작은 들불을 끄기 위해 뛰어다니지만, 정작 동네를 비워놓아 도둑에게 다 털린 격이다.”
―우리가 살아온 가치나 상식 기준으로 현 정권 인사들의 뻔뻔한 모습에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반복되는 비판과 공격의 늪에 빠져든 것인데?
“그게 고도의 전술처럼 보인다. 가령 검찰·야당·언론을 추미애 문제에만 매달리게 해놓고, 현 정권은 다른 모든 것에 농간을 부리고 있다. 정말 우려해야 할 점은 현 정권이 국가기관과 헌법기관을 사조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낙연은 ‘불쏘시개’
―이대로 가면 야권의 정권 탈환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여권에는 대권 후보가 넘치고 야권에는 없다고들 하지만, 정반대다. 우선 이낙연을 보자. 호남에서도 ‘이낙연은 안 될 것 같다’는 말이 나온다. 현 정권이 적극적으로 미는 게 안 보인다는 거다. 내가 봐도 이낙연은 ‘불쏘시개’였다.”
―현 정권이 호남 출신 이낙연 대표를 버리는 것으로 비칠 경우 역풍이 만만찮을 텐데.
“호남 사람들의 이념 성향은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우리 지역 출신 대통령을 갖는 것이다. 김대중 이후로 없다가 이낙연이 나오자, 지방선거·총선 등에서 싹쓸이할 정도로 뭉쳐줬다. 현 정권에서 잘 이용한 셈이다.”
―이낙연은 후보로 완주하지 못할 것으로 보는가?
“이낙연은 자기 캐릭터가 없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도 아니다. 한때 높은 지지율은 문재인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총리에서 물러나자 지지율이 뚝 떨어졌다. 총리 출신에 집권당 대표를 하는 사람이 도지사(이재명)에게 밀리고 있지 않나.”
―이낙연은 친문 진영의 지지를 받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친문 진영은 주사파 운동권이 주축이다. 이들은 자기가 저질러놓은 일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민주화 투사도 주사파 운동권도 아닌 이낙연이 정권을 잡으면 과연 자기들을 보호해줄까. 쿠데타 동지인 노태우도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다. 이낙연이 버려지면 호남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정세균 총리도 대권 준비를 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정세균은 거의 안 뜨고 있다. 전북 출신이라 광주·전남에서는 아예 지지율이 안 나온다. 보수 진영이 대선에서 이기려면 딜레마에 빠진 호남을 잡아야 한다. JP를 붙잡아 충청도 표를 얻은 DJ처럼 해야 한다는 거다.”
―지난 총선에서 호남의 득표율은 약 5 % 선이었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요즘 해보이는 호남 구애(求愛)가 얼마나 효과 있을까. 오히려 국민의힘에 대한 영남 쪽 지지율이 떨어지는데?
“국토의 한 부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픈 콩팥이 작은 부분이라고 내버려두면 몸 전체에 병이 든다. 나는 호남에서 숱하게 떨어졌지만 결국 두 번 당선됐다. 진심을 보이고 죽도록 노력하면 불가능한 게 아니다. 지금 야당에서 그렇게 하는 이들이 과연 있나. 이벤트성 쇼로 그치면 안 된다.”
―여권 대권 후보 가능성은 이재명 경기지사가 가장 높지 않을까?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은 ‘혜경궁 김씨’ 등으로 친문 세력과 거의 원수처럼 됐다. 여전히 그런 감정이 깔려있다.”
―친문이 전략적으로 이재명을 지지할 가능성은?
“이재명은 과격하고 그동안 쌓인 감정이 있는데 과연 자기들을 보호해줄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드루킹 댓글 사건 항소심에서 유죄를 받기 전만 해도 김경수 경남지사가 차기 후보가 될 것이라는 말이 여권에서 돌았는데?
“문재인의 최측근이고 코드가 맞는 실세라서? 정말 웃기는 얘기다. 대체 김경수의 경력이나 활동, 성과 어느 면에서 대선 주자 감인가. 어느 정권에서도 호랑이가 뒤에 서있으면 여우한테 고개 숙이는 것이다. 김경수는 그런 부류다.”
―'친노·친문 적자'인데, 키우면 또 커질 수 있지 않겠나?
“이 나라가 ‘친노·친문 왕조’인가, 국민에게 무슨 ‘적자(嫡子)’인가. 김경수가 나서면 고만고만한 김두관·임종석 등도 나설 것이다. 그 과정에서 후보 간 갈등이 빚어진다. 청와대의 장악력이 갈수록 떨어져 누굴 주저앉히고 후보로 정리하는 게 쉽지 않다.”
떡고물이 안 떨어지면
―반면에 보수 정당에는 내세울 만한 후보가 없는 인물난을 겪고 있는데?
“후보가 없는 벌판이어서 집 짓기가 더 유리하다. 내년에 다섯 달 동안 전국을 돌며 ‘미스터트롯 방식’으로 치열한 토론을 벌여 승자를 고르면 가망이 있다고 본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말로 가고 있지만 여전히 40~50%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데?
“현 정권에서 여론조사를 별로 믿지 않는다. 어느 정권도 임기 말에는 레임덕이 오게 돼있다. 대통령 힘이 셀 때는 괜찮지만 힘이 빠지면 예측 못 하는 비리가 터져 나온다. 돈을 주고 뭔가 이득을 기다렸는데 정권이 끝나도록 떡고물이 안 떨어지면 준 쪽에서 불어대기 시작한다. 이 정권은 계속 덮어왔기 때문에 더 많이 터져 나올 것이다.”
―현 정권은 검경, 법원, 헌법재판소 등을 거의 다 장악해간다. 공수처까지 만들어지면 그런 상황을 덮을 수 있지 않겠나?
“경제나 의식 수준이 여기까지 와있는 대한민국을 모두 무력화할 수는 없다고 본다. 자기 사람들을 정무직이나 핵심 자리에 심고 맹종하는 몇몇 사람으로 갈아 끼웠다고 해서 조직 전체가 다 따르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