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1절 기념식에서 김대중 정부를 “첫 민주정부”라고 규정했다. 김대중 정부가 첫 민주정부라면 1997년 이전의 한국 헌정사 모든 정권은 반민주 정권이라는 말이 된다. 3.1절은 103년 전 나라를 빼앗긴 애국 선열이 태극기를 흔들며 한마음 한뜻으로 대한민국의 자주국임을 선포했던 날이다. 그 중요한 국민 통합의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은 왜 국민을 ‘민주 진영’과 ‘반민주 진영’으로 갈라치는 분열의 정치를 하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서울 서대문구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에서 열린 제103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다. 중앙선관위 자료에 따르면, 5월 10일 총선거는 전국 만 21세 이상 남녀 총유권자 813만여 명 중에서 785만명(96.4%)이 선거인 등록을 했고, 그중 95.5%가 투표를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선거는 그렇게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나라 세우기’의 열망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명실공히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였다. 그날 선출된 198명의 국회의원은 5월 31일 제헌의회를 개원했으며, 7월 17일에는 드디어 대한민국 헌법이 공표됐다. 그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의 간접선거로 제1대 대통령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요컨대 한국 헌정사 최초의 ‘민주 정권’은 1948년 수립된 바로 그 정부였다.

세계사를 돌아보면, 냉전 시기 급조된 신생 민주 정권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출범 초기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밀약에 따른 공산 전체주의 세력의 침략을 받아 절멸의 위기에 내몰렸던 나라다.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유’와 ‘민주’는 무섭고도 놀라운 정신적 탄성(彈性)을 발휘했다. 전후의 빈곤과 혼란이 이어졌지만, 젊은 학생들은 늘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우며 자랐다. 그 결과 3·15 부정선거가 드러났을 때, 깨어 있는 학생과 시민들은 자유를 외치며 피 흘려 싸웠고, 이승만 대통령은 그들의 용기를 칭찬하며 스스로 하야했다.

그 후 26년의 세월 초고속 경제성장으로 산업화를 이뤘지만, 한국 민주주의는 암흑기를 겪었다. 일자리가 늘어나고 소득이 증가해도 깨어 있는 다수 시민은 권위주의 개발독재를 거부했다. 파란만장한 1980년대 지속적 민주화 투쟁과 시민 총궐기로 궁지에 몰린 제5공화국의 수뇌부는 직선제 개헌으로 출로를 찾았다. 그 결과 1987년 이후 탄생한 7인의 대통령은 모두 다수 국민의 투표에 의해 민주적으로 선출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평화적 정권 교체가 무려 세 차례나 이뤄졌다.

돌이켜보면, 한국 헌정사는 제헌의회가 최고의 가치로 선양했던 바로 그 자유와 민주의 이념이 지속적으로 실현되어간 역동적인 자유화, 적극적인 민주화의 과정이었다. 이는 전 세계가 알고 있는 교과서적 진실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왜 김대중 정권만을 콕 집어 “첫 민주정부”라 칭송해야만 할까? 집권 세력의 다급한 위기의식이 감지된다. 잇단 여론조사에서 소위 ‘진보 진영’의 후보가 계속 밀리자 현 집권세력은 다시금 이번 대선이 ‘민주 대 반민주’의 싸움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듯하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는 군부 종식을 외치던 1980년대의 선거 전술이었지만, 이제 더는 통할 수가 없다. 한국은 직선제 개헌 후 35년에 걸쳐 전 세계에 모범이 되는 선거 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를 확립해 왔기 때문이다. 선거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따르면, 실정과 난정(亂政)으로 국민의 분노와 원망을 산 정권이라면 마땅히 선거를 통한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내로남불’의 권력형 부정부패, 엉터리 경제정책, 형편없는 일자리 성적, 재앙적 탈원전 추진, 외교·안보 정책의 참담한 실패, 부동산 양극화, 소통 부재의 무능한 리더십, 권력의 사유화 등등, 수많은 국민은 정권이 바뀌어야 할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다. 정권교체 여론이 정권 유지 여론을 압도할 때,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게 순리(順理)이고 천명(天命)이다.

불과 200여 년 전까지도 전 인류는 왕정의 신민(臣民)이었다. 이제 인류의 다수는 직접 국민의 대표를 뽑는 민주 시민이다. 인류의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은 그 이유가 자명하다.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이 경제를 망치고 법치를 파괴할 때, 총칼 들고 싸울 필요 없이 평화적인 선거로 권력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이 타락하면, 정권교체가 민주적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