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는 유럽과 아프리카, 서아시아의 문명 세계 대부분을 정복하고 세 대륙을 망라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호전적 게르만족이 거주하던 유럽 북부 지역은 험한 불모지라 정복할 가치도 여력도 없어 미정복 지역으로 방치한 채, 거대한 방벽을 건설해 문명 세계의 외곽 경계선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로마는 서기 1세기경 라인강과 다뉴브강의 자연 경계선을 연결하는 550km 길이의 ‘게르만 방벽’을 건설했고, 로마가 지배하던 브리타니아섬 북부에도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라 불리는 118km의 방어벽을 건설해 북방 스코틀랜드 부족의 침입을 막았다.

중국도 같은 이유로 강성한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을 막으려 기원전 7세기부터 명대에 이르기까지 2,000년간 무려 21,000km에 달하는 거대한 만리장성을 건설했다. 로마와 중국이 건설한 방벽은 당시로서는 호전적 이민족의 침략에서 최소의 희생으로 문명 세계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 방벽들은 문명 세계가 비문명 세계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차단벽이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 문명 세계와 비문명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이 고대 방벽들과 정반대 목적을 가진 방벽이 등장했다. 동서 냉전 시대인 1961년 동독은 자국민이 서독 영토인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고자 총연장 172km, 높이 3.6미터의 장벽과 감시 타워 300개로 서베를린 전체를 에워싸는 베를린장벽을 건설했고, 센서가 부착된 자동사격 장치까지 설치했다. 불법 월경자를 사살하는 동독 정부의 강경 조치로 약 200명에 달하는 동독인이 베를린장벽 월경 중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 1990년 동·서독 통일 때까지 29년간 5,000명 이상의 동독인이 목숨 걸고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했는데, 놀랍게도 그중 1,300명 이상이 베를린장벽의 감시 타워를 지키던 동독 경비병들이었다 한다.

냉전 체제의 상징이던 베를린장벽은 1989년 독일 통일과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신냉전 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그와 동일한 목적을 가진 비문명의 장벽이 한반도에 건설되고 있다. 북한은 주민의 탈북을 막고자 2010년대부터 북·중 국경에 철조망을 설치하기 시작하더니, 2020년대에 들어서는 전기 철조망이 추가된 이중 철조망을 국경 전역에 건설 중이다. 이에 더하여 중국이 탈북자의 진입을 막기 위해 별도의 철조망을 국경에 설치함에 따라, 북·중 국경에는 휴전선 못지않은 삼엄한 3중 철조망 장벽이 조성되고 있다. 북한은 이에 그치지 않고 2024년 들어 휴전선 전역에 콘크리트 장벽과 지뢰밭을 설치하고 있어, 북한 영토 전체가 남북으로 철조망과 콘크리트 장벽에 갇힌 거대한 감옥으로 변해가고 있다.

지난해 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선언한 이래 북한은 통일전선부 등 대남 기관 명칭에서 ‘통일’ 단어를 삭제했고, 통일 관련 제도, 기념물, 서적까지 폐기했다. 북한이 휴전선에 건설 중인 콘크리트 장벽과 지뢰밭은 그러한 남북 관계 차단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물리적 장벽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보이나, 안보적 차원에서 대남 방어 태세를 강화하기보다는 국내 정치적 차원에서 북한 병사와 주민의 대남 접근을 원천 차단하고 미래의 대량 탈북 사태를 예방하려는 의도가 훨씬 큰 것으로 보인다. 과거 동독 주민의 베를린장벽 월경을 감시하던 동독 감시병이 1,300여 명이나 탈출 대열에 합류했던 사례를 상기해 본다면 이는 북한 당국의 단순한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장벽을 연상시키는 제2의 베를린장벽으로 부상하고 있는 김정은 정권의 휴전선 콘크리트 장벽은 체제 경쟁 패배를 인정하는 북한 당국의 자술서와도 같다. 북한이 구축하려는 두 국가 체제와 콘크리트 장벽은 과연 북한 체제의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 역사상 아무리 견고한 장벽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베를린장벽은 동독 주민의 목숨을 건 월경 의지를 막지 못해 무너졌다. 로마는 게르만 장벽을 넘어 침공한 게르만족에게 멸망했고, 중국도 만리장성을 넘어온 몽골족과 여진족에게 멸망했다. 지난 6월 북한의 콘크리트 장벽 너머로 대북 확성기 방송이 재개되자 휴전선 인근 지역 북한 군인과 주민의 귀순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의 생존 의지는 핵무기로도 콘크리트 장벽으로도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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