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남문 입구에 비석 숲이 있다. 산성 안팎에 서 있던 각종 선정비(善政碑)를 모아놓은 곳이다. 디귿 자로 도열해 있는 비석은 모두 30기다. 조용하다. 방문객 동선에서 살짝 비켜나 있다. 선정비는 선정(善政)을 베푼 수령에게 백성이 주는 선물이다. 그럴까. 이제 알아보자.
공무원 체크리스트 수령칠사(守令七事)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이 문명계로 진입하면 사회를 다스리는 규율이 생기고 규율을 집행하는 국가 조직이 운영된다. 집행하는 자는 공무원이다.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 국가가 필요한 세금을 거두려면 그 공무원이 기강이 서 있고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문명국가라면 응당 공무원계를 감찰하는 제도 또한 운영했고 운영한다. 예컨대 이런 것.
‘매년 말 관찰사는 수령칠사(守令七事)의 실적을 왕에게 보고한다. 칠사는 논밭과 뽕밭을 성하게 하고(農桑盛·농상성), 인구를 늘리고(戶口增·호구증), 학교를 일으키고(學校興·학교흥), 군정을 바르게 하고(軍政修·군정수), 부역을 고르게 하고(賦役均·부역균), 송사를 간명하게 하고(詞訟簡·사송간), 간사하고 교활한 풍속을 그치게 하는 것(奸猾息·간활식)이다.(’대전통편' 이전(吏典) ‘고과·考課’)'
수령칠사(守令七事)는 수령이 해야 할 일곱 가지 업무 고과 체크리스트다. 이 고과에 합격한 수령은 더 기름진 마을로 영전하거나 포상을 받았다. 주민은 선정비를 세워 그들을 기렸다. 선정비 이름은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떠나도 생각하겠다는 ‘거사비(去思碑)’, 자기네를 아끼고 사랑해줬다는 ‘애휼비(愛恤碑)’ 등이다. 매우 큰 업을 쌓아 이별하기 싫어 곡을 한다는 ‘타루비(墮淚碑)’도 있다. 전남 여수 진남관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타루비가 그 예다. 그런데-.
분기탱천한 영조
박문수가 아뢰었다. “평양에서 보니 앞뒤로 살아 있는 감사 사당과 선정비가 부지기수였습니다. 오로지 습관처럼 아첨하고 기쁘게 하려고 백성에게 건립 비용을 거둬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마땅히 대동강에 비석을 던져버려야 합니다(必沈其碑於大同江·필침기비어대동강).” 영조가 말했다. “상원군수 이화 생사당은 내가 일찌감치 없애라 했거늘! 위가 탁하니 아래도 맑지가 않구나(上濁下不淨 상탁하부정). 저 따위 감사가 어찌 아랫것에게 선정비를 금하랴. 현직 감사를 엄히 감찰하라.”(1735년 영조 11년 1월 3일 ‘승정원일기’)
이후 영조는 온갖 분야에 추상같은 규율을 잡아나갔다.(영조가 벌인 상상을 초월한 규율 잡기는 ‘땅의 역사 223. 무법천하 막장정치 영조-노론 연합정권’편 참조) 결국 영조 42년에 선정비를 세운 사또는 물론 숨어있던 선정비를 발견한 사또까지 왕명 위반으로 규정해 중형을 내리도록 규정했다.(1766년 6월 5일 ‘영조실록’)
난세 때마다 급증한 선정비
안 그런 선정비도 물론 많지만, 선정비는 학정의 상징이다. 2007년 충북대 교수 임용한이 경기도 안성, 죽산 역대 수령 305명 가운데 현존하는 선정비 주인공 57명을 분석해보니 8%만이 ‘수령칠사’에 의해 우수 수령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임용한, ‘조선 후기 수령 선정비의 분석’, 한국사학보 26집, 고려사학회, 2007) 조선 정부 조정에서도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처음 선정비 문제가 공론화된 때는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인조 때였다. 인조 9년 “요즘 조금도 공이 없는 지방관들이 나무로 돌로 비석을 세우고 있어 문제”라는 보고가 올라왔다.(1631년 12월 12일 ‘인조실록’) 그전까지는 드문드문 세웠던 선정비가 곳곳에 서고 있다는 보고였다. 인조 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현종 때인 1663년 처음으로 왕명으로 선정비 건립 금지령이 떨어졌다. 1664년에도 또 금지령을 내렸다. 그래서인지 현종 대 선정비는 이전에 비해 그 수가 급감했다. 경기도 과천, 안성, 죽산 세 고을은 현종 재위 기간에 세운 선정비는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 누가 자기 치적 과시를 솔선수범해서 멈추겠는가. 숙종 10년인 1684년 또 선정비가 즐비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숙종은 “금한 일이 이어지니 해괴하다”며 1663년 이후 세운 선정비들을 모조리 없애라고 명했다.(1684년 8월 3일 ‘숙종실록’) 막강 권력자 숙종이 칼을 갈자 또 선정비는 자취를 감췄다. 영조가 아예 왕명 위반죄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그 숫자는 더 줄어들었다.
민란(民亂)의 시대, 19세기가 왔다. 조선왕국 기저질환인 삼정문란이 극에 달하던 시대였다. 헌종 때 늘어나기 시작한 선정비는 1863년 고종 즉위와 함께 급증했다. 심지어 한 사람이 여러 개 선정비를 세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재위 기간이 비슷한 숙종 때의 7배, 영조 때의 8배다.(임용한, 앞 논문) 폭력적으로 정권을 교체한 인조 때, 그리고 혼탁한 국정이 극에 달했던 고종 때 이 선정비들이 팔도에 출몰한 것이다. 갑자기 선량한 목민관이 출현했을 리 만무하니, ‘수령칠사’가 수령 본인 혹은 주변에 달라붙은 모리배에 의해 농단당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그 시대 땅에 꽂힌 비석들이다.
각양각색 선정비
대표적인 증거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운 아비 조규순 영세불망비다. 멀쩡하게 있던 비석을 없애고 값비싼 오석(烏石)으로 새 비석을 만든 뒤 비각(碑閣) 건립 명목으로 군민에게 1000냥을 뜯어낸 비석이다. 이는 이듬해 동학혁명의 불씨가 됐다.
문경새재에는 문경현감 이인면(李寅冕) 애휼비(1889년)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보기 드문 마애비(磨崖碑)다. 이인면은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고 벌금을 적게 부과해 칭송받은’ 수령이었다.(1886년 4월 29일 ‘승정원일기’)
충북 보은에 있는 선영홍(宣永鴻) 선정비(1922년)는 대한제국 비서경이었던 선영홍이 고향 고흥 소작민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세금을 스스로 부담한 덕으로 소작민들이 세운 공덕비다. 철로 만들었다. 그 옆에는 그 아들 선정훈이 자기 집에 학교를 짓고 흥학(興學)을 한 공덕비가 서 있다. 관선정(觀善亭)이라는 이 학교에서 한학 대가 임창순이 공부를 했다. 이렇게 선정비는 쇠, 바위, 비석 등등 모양도 재질도 다양하고 새겨 넣은 진의(眞意)도 다양하다.
다시 남한산성 비석 숲에서
남한산성 비석 숲에는 무슨 사연이 숨어 있다는 말인가.
입구 왼쪽 맨 처음 서 있는 비석은 흥선대원군 영세불망비다. 세운 날짜는 청나라 연호로 동치 3년, 1864년이다. 고종이 등극한 이듬해다. 세도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할 때인지라 ‘대원군’이 아니라 극존칭 ‘대원위 대감’이라 새겨져 있다. 매천 황현은 대원군 시대를 일러 ‘위세가 우레와 불 같아서 모든 관리와 백성이 두려움에 휩싸여 항시 법을 두려워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실각하고 왕비 민씨 세력이 권력을 잡은 뒤로는 ‘백성이 민씨들 착취를 견디다 못해 한탄하며 대원군 정치를 그리워했다’고 했다.(황현, ‘매천야록’ 대원군의 위세)
그 민씨 성을 가진 광주유수 겸 수어청 수어사 민영소(閔泳韶) 영세불망비가 대원군 선정비 대각선 방향 끝자락에 서 있다. 민태호·민영목·민영익·민응식과 함께 ‘단군 이래 최악의 부패 정권’이라 낙인찍힌 민씨 정권 실력자였다. 임오군란(1882년) 때 왕십리 군인들이 그 집을 불태웠을 정도다. 또 1894년 홍종우를 사주해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을 암살한 사람이기도 했다. 경술국치 직후 총독부에서 조선 귀족 작위를 받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장인 민치구 선정비도 보인다. 고종을 차기 왕으로 적극 밀었던 영의정 조두순도 보인다. 그 역사를 저 비석이 품고 있다. 나라가 격동하던 그 시대 사람들이 몇 걸음 거리 숲 속에 모여 있다.
세월은 가고, 공화국이 되었다. ‘수령칠사’는 완수되고 있는가. 비석들에게 입이 있다고 치고, 가서 물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