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의 월성 원전 1호기 조기 폐쇄에 대한 감사 발표엔 절충의 흔적이 있다. 경제성 평가의 부당성을 확인했지만 조기 폐쇄 자체에 대한 판단은 유보했다. 정책을 강행하고 감사를 방해한 관료의 징계를 요구했지만 정책을 생산한 청와대를 직접 겨냥하지 않았다. 감사원은 385일에 이르는 기간에 “처음 보는 심각한 저항”을 경험했다. 거대 여당의 공격을 받았다. 한계를 완전히 넘지 못했지만 여러 측면에서 의미를 남겼다.

지금 대한민국은 검찰이 “전화번호는 줬지만 전화를 지시하지 않았다”고 불기소하는 나라다. 대법원은 “거짓말은 했지만 허위 사실 공표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한다. 권력자 사건 때마다 팩트와 결과가 엇갈린다. 최재형이 아니라 김명수나 추미애가 감사원장이었다면 “조작했지만 부당하지 않았다”는 발표가 나왔을지 모른다. 감사원은 결정 과정의 부당성을 분명히 밝혔고 청와대 책임을 알려주는 ‘행간(行間)’을 남겼다. 사법부·입법부·검찰이 대통령의 번견(番犬)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헌법기관 역할을 했다. 감사의 존재 가치를 증명했다.

감사원은 기업의 감사처럼 정권이 썩지 않도록 소금 역할을 하는 조직이다. 늘 그렇듯 이 문제에서도 문재인 정권은 자신보다 남에게 수백 배 엄격했다. ‘공정경제’ 간판 아래 최대주주가 쥔 감사 인사권을 다른 주주에게 옮기는 법안을 만들었다. 최대주주의 전횡을 막겠다는 명목이다.

전횡은 누군가 권력을 독점하고 마음대로 행동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기업의 최대주주는 본질적으로 기업의 가장 강력한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다. 기업이 잘못되면 가장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최대주주 대부분은 기업을 해치는 행위를 피한다. 두 가지 예외가 있다. 먼저 승계다. 그것도 자본주의 성숙과 혹독한 사법 단죄로 이제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다시 일어난다 해도 한 세대(世代) 한 번이다. 다음은 경영자가 개인적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기업을 엉뚱한 길로 몰고 가는 경우다. 이 역시 준법 경영과 감시 체제가 정착되면서 기업에선 옛일이 되고 있다.

문 정권의 소위 ‘공정경제 개혁’은 성년이 된 사람에게 기저귀를 채우는 것이다. 사실 그 기저귀는 문 정권이 차야 한다. 사익을 위해 공익을 축내는 두 가지 사례, 정권의 승계와 대통령의 환상을 위해 국익을 축내는 것은 그 어떤 막장 재벌도 이 정권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월성 1호기는 2022년까지 가동될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7000억원을 들여 개보수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2018년 조기폐쇄됐다./연합뉴스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은 세대는 빚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돈이 씨가 말랐을 때 칼이 되어 돌아오는 빚의 위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재정이 건전해 나라가 살았다. 이것은 40대 이상의 공통 기억이다. 그래서 어떤 정권도 내놓고 나랏빚을 불리지 못했다. 문 정권은 거리낌이 없다. 빚 400조원을 더 쓰고, 그 씀씀이가 좋은 것이라고 재정 건전성의 기준까지 끌어올렸다. 정권 연장을 위해 외부 충격에 맞설 수 있는 나라 경제의 기둥 하나를 간단히 무너뜨렸다. 대통령의 이익과 국가 이익이 상시로 충돌하고 있다.

월성 1호기 조기 중단은 환상을 위해 국익을 희생시킨 황당한 사례다. 동의하지 않지만 정치인이 탈원전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집권 후 국정 철학으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제도와 절차, 원칙의 범위 안에 있다. 대통령이 범위를 벗어나면 먼저 관료가 방어해야 한다. 국가가 공무원 신분과 정년을 보장하고 연금을 주는 이유다. 그런 관료가 청와대가 정해준 답을 도출하기 위해 문제를 조작했다. 감사를 방해하기 위해 일요일 심야 사무실에서 파일 444개를 삭제했다. 지금 한국 대기업 중 컴플라이언스(법률과 절차 준수)가 이처럼 엉망진창인 조직은 없다.

이번 감사 과정에서 한때 “대통령이 시킨다고 다 하느냐”는 말이 화제였다. 감사 대상이었던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이 “최재형 원장이 감사원 내부에서 말했다”며 그를 비판하기 위해 공개했다. 여당 의원들은 이 말을 무기로 “대통령 우롱” “대선 불복” “반헌법적 발상”이라고 공격했다. 최 원장은 발언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잘못된 말이 아니다. 누가 시킨다고 다 하는 것을 전횡이라고 한다. 대통령과 공무원이 한통속으로 그럴 땐 ‘국정 농단’이라고 한다. 전횡과 농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업을 향해 공정경제와 감사 개혁을 외치고 있다.

최재형 원장은 “대선 공약이라고 국민적 합의냐”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받은 41% 지지를 과연 국민의 대다수라 할 수 있느냐”고도 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국민 대다수가 승인하고 합의한다고 해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법과 제도, 원칙과 절차에 따라야 한다. 아무리 소수라도 다른 견해를 경청해야 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이것이 민주와 공화의 원칙이다. 최재형의 감사원은 대한민국에 아직 그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