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평화회의가 열흘째 열리고 있던 1907년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고종이 보낸 밀사 3명이 나타났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한성재판소 검사 이준, 그리고 전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장남 이위종이다. 이위종은 7개 국어에 능했고 다른 두 사람은 못했다. 그래서 만 스무 살인 이위종이 실질적인 대표로 활약했다. 회담 관계자들은 이위종을 왕자(Prince)라고 불렀다. 그 왕자가 취재기자들 앞에서 연설했다. 제목은 ‘조선을 위한 호소(Plea for Korea)’다. 국사교과서에도 실린 명문이다.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부당함, 일본의 잔학함과 폭력성을 낱낱이 폭로한 글이다. 그 연설문 이야기다.
234.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③/끝 헤이그 밀사 이위종의 연설
메가타가 던진 떡밥 150만엔
1905년 8월 27일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가 고종을 알현했다. 일본공사 하야시와 동행한 메가타는 고종에게 궁중 재정 개선책을 건의했다. 고종은 이에 “일본인 고문에게 재정을 위임하는 건은 아직 이견이 많다”며 거부했다. 그런데 메가타가 “궁중의 용돈 증가를 도모하기 위하여 150만엔을 무이자로 일본 정부로부터 차입하는 방법에 관하여” 건의하자 황제는 깊이 후의를 감사하며 계획을 받아들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6권 1.본성왕전1~4 (216)'한국 총세무사 브라운 사임과 황실비 대출에 관한 상주 건')
을사조약 체결 석 달 전에 이미 일본은 고종을 돈으로 매수할 계획을 세웠고, 고종은 ‘용돈 150만엔’을 깊이 감사하며 승낙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약 1주일 전 고종은 하야시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접대비’ 명목으로 2만원(현 시가 25억원)을 받았다.(2020년 10월 21일 자 ‘땅의 역사’ 233. 을사조약을 둘러싼 고종의 수상한 행적 ② 뇌물받은 황제' 참조)
그런데 150만엔은 떡밥에 불과했다.
조약 체결 한 달 뒤인 1905년 12월 15일 하야시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황실비 대여 150만엔’은 진행을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다음 날 재정고문 메가타는 그때까지 황실이 직접 세금을 거두던 제도를 없애고 모든 조세는 황실이 아닌 대한제국 정부 수납기관에서 징수하겠다고 선언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6권 11.잡찬(雜纂) (1)황실비에 관한 건) 이미 그 전해 일본 천황으로부터 30만엔을 선물받은 고종에게 황실비 150만엔 무이자 대출은 솔깃한 제안이었으나, 거꾸로 돈줄이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러시아의 변심과 밀사 파견
고종은 이후 경운궁(덕수궁)에 유폐된 채 ‘메가타가 주는 공식 황실비’로 살았다. 을사조약 체결 한 달 전인 1905년 10월 9일 러시아 정부는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에게 헤이그 평화회의 초청 각서를 전달했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지만, 고종은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해주리라고 믿었다. 러시아 또한 회의를 통해 조선에 대해 외교적인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딱 1년 뒤인 1906년 10월 9일 일본 주재 러시아공사 바흐메치예프는 외상(外相)으로 영전한 전 주한 공사 하야시에게 “대한제국은 참가 불가”라고 통보했다. 이미 그해 러시아와 일본은 ‘몽골과 한반도에 대한 상호 이익을 인정한다’는 러일협약을 진행 중인 상태였다.
그 급변한 국제 정세를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밀사가 파견된 것이다. 밀사들은 회의장 입장은 물론 각국 대표 개별 면담조차 거부됐다.
기획 헐버트, 자금 콜브란의 15만엔
구중궁궐에 유폐돼 있으니, 고종이 국제 정세를 알 도리는 없었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런데 돈은 어디서 났을까. 그때 이상설은 간도에서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운영 중이었고 이준은 서울에서, 이위종은 러시아에서 활동 중이었다. 고종은 ‘내탕금이 궁핍해’ 일본 특사 접대비 명목으로 2만원을 받고, 용돈 150만엔 제안을 깊은 후의로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은 밀사 파견 자금이 고종이 외국 은행에 예치해둔 비자금에서 나왔다고 추정한다. 또 황실비인 내탕금을 밀사 외교를 위해 사용했으리라는 추정도 있다. 사실일까. 당시 통감부 외사국장인 고마쓰 미도리는 밀사 자금 수사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해놓았다.
‘밀사 파견 사실이 공개되면서 통감부는 난리가 터졌다. 통감 이토는 대신들을 불러 전모를 밝히라고 닦달했다. 그 사이 “유폐 중인 황제에게는 자금이 있을 리 없다”고 판단한 고마쓰는 한성전기회사 사장인 미국인 콜브란을 만났다. 고마쓰가 물었다. “요즘도 황제에게 용돈을 주시는가.” 콜브란이 대답했다. “15만엔을 달라고 해서 영수증을 받고 황제 조카뻘인 조남승에게 돈을 줬다.”’
‘그러고 보니 조남승이 수입이 없을 텐데 요즘 갑자기 씀씀이가 헤퍼졌다. 조남승을 불러 따졌더니 15만엔은 미국인 헐버트와 이준, 이상설과 본인이 나눠 가졌다고 자백했다. 또 고종이 헐버트가 마련한 친서 초안과 위임장을 밀사들에게 줬다고 자백했다. 자백에 따라 한 프랑스 교회를 수색하니 각종 비밀 서류와 함께 위임장과 친서 초안이 나왔다.’(고마쓰 미도리, ‘명치외교비화(明治外交秘話)’, 原書房, 1976, p244~246)
또 다른 일본 측 기록인 ‘일한합방비사’에는 금액이 20만엔으로 적혀 있다. 어찌 됐건 밀사는 당시 반일 운동을 하던 미국인 헐버트가 기획하고 미국인 기업가 콜브란이 자금을 댔다는 게 통감부 조사 결과였다.
교민들의 의연금 1만8000원
서울을 출발한 이준은 그해 5월 중국 용정에 있던 이상설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다(이위종은 6월에 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했다). 한국교민회장 김학만과 정순만 등이 한교(韓僑)에게서 모금하여 이들에게 1만8000원을 전달하였다.(윤병석, ‘이상설전: 헤이그특사 이상설의 독립운동론’, 일조각, 1998, p64)
고종에게 15만엔(혹은 20만엔)을 받은 밀사들이 왜 동포들에게서 또 의연금을 받았을까. 콜브란이 준 15만엔에 배달 사고가 난 건 아닐까. 고종이 이준에게 자금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닐까. 어느 쪽이 됐든, 불쾌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몰랐던 이위종의 연설
풍찬노숙 끝에 헤이그에 도착한 밀사들은 회의장 입장을 거부당했다. 그리하여 7월 8일 밀사들은 취재기자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프랑스어가 유창한 이위종이 대표를 맡았다. 시작은 이러했다. ‘러일전쟁 때 일본은 조선의 독립이 목적이라고 공언했다. 일본 정치인들은 거듭해서 모든 문명을 위해 싸운다고 했다.’ 그리고 이위종은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강압에 의한 조약임을 기자들에게 웅변했다.
그런데 연설 앞쪽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우리 조선인들은 옛 정권의 잔인한 행정과 탐학과 부패에 지쳐 있던 터라, 일본인들을 기대를 가지고 맞이했다(We, the people of Korea, who had been tired of the corruption, exaction and cruel administration of the old Government, received the Japanese with sympathy and hope)’. 황제의 위임장과 친서를 소지한 황제의 밀사 입에서, 그 황제가 경영한 정권이 부패하고 탐학하며 잔인하다는 고백이 튀어나온 것이다. 이위종은 ‘우리는 일본이 부패한 관리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백성에게 정의를 구현해주리라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그런 신뢰를 배반하고 조선을 불법 병탄한 일본을 탄핵한다는 게 이위종 연설의 요지다.
이 모든 것이 대중적으로 공개된 자료들이니, 관련 학자들은 틀림없이 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을사조약을 전후해 고종에게 거액의 뇌물이 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헤이그 밀사 연설에 부패 정권을 비판한 내용이 있음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반쪽짜리 역사다.
7월 14일 일요일 이위종이 잠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사이 이준이 호텔에서 죽었다. 이틀 뒤 이준은 현지 공동묘지에 가매장됐다. 임시 장례식에는 이상설과 호텔 사장이 참석했다.
고종은 강제 퇴위 당했다. 7월 20일 대한제국 황제 순종은 “거짓 밀사들을 사법처리하라”고 명했다. 8월 8일 법부대신 조중응이 평리원 선고문을 순종에게 보고했다. 정사 이상설은 교수형, 부사 이위종과 이준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형은 이들을 체포한 후 집행하기로 결정했다.(1907년 8월 8일 ‘순종실록’)
여기까지 필리핀과 조선을 나눠먹기로 밀약한 미국에 기대려 한 황제와, 망국 조약 후 ‘매국노들’ 처단을 끝내 거부한 황제와, 그 황제가 보낸 밀사 입에서 나온 ‘부패하고 탐학한 정권’에 대한 짧은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