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경제 부총리의 사표를 반려하며 밝힌 재신임 사유가 말문을 막히게 했다. 문 대통령은 홍남기 부총리가 “코로나 경제 위기 극복에 큰 성과를 냈다”고 했다. 홍 부총리가 도대체 무얼 했는지, 세금 풀고 현금 뿌린 것 말고 생각 나는 게 없다. 아마도 문 대통령은 4차례 추경과 전 국민 재난 지원금, 세금 일자리 사업 같은 일련의 재정 확장 정책을 지칭한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성과가 아니라 해임 사유다. 재정 방어에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 경제 부총리가 정치적 압력에 번번이 굴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홍 부총리를 칭찬하며 신임한다고 한다. 나라 살림이야 어찌되든 곳간을 활짝 열어준 것이 잘했다는 것이다.
홍 부총리는 작금의 전세 대란에도 책임이 큰 사람이다. ‘임대차 2법’을 주도해 이 난리를 만들어놓고도 “확실한 대책이 있다면 벌써 다 했겠죠”라며 무책임의 극치를 드러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그가 “적임자”라 한다. 하는 족족 실패해 별명이 ’23전 23패'인 국토부 장관도 경질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두 장관은 집값을 천정부지로 급등시켜 무주택자 서민들을 절망시킨 장본인이다. 이들을 신임한다는 문 대통령 말은 집값은 못 잡아도 좋으니 ‘부동산 정치’를 계속하라는 지시나 마찬가지다. 부동산 참사의 꼭대기에 대통령이 있다는 자기 고백에 다름 아니었다.
경제 망치고 민생 피폐하게 하는 정책 실패가 반복돼도 대통령의 진심은 그게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국민을 못살게 하려는 대통령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능한 청와대 참모진과 장·차관들이 문제라고 여겼다. 이들이 잘못된 진단과 왜곡된 보고로 대통령의 눈·귀를 가렸기 때문이라 믿고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경제 파이를 쪼그라트리고, 못사는 사람을 더 못살게 만들고, 사사건건 편 갈라 싸움 붙이는 국정 자해의 정점에 대통령이 있었다. 법치를 흔들고 삼권분립을 훼손하는 민주주의 파괴도 대통령의 뜻과 무관치 않았다. 이 모든 ‘처음 경험하는 현상’의 기획자이자 연출자가 대통령이란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배후의 대통령’을 드러낸 대표적 사안이 탈원전 자해극이다.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근거 자료가 왜곡·조작됐음이 감사원 감사에서 확인됐다. 애초 회계법인은 월성 1호기의 경제성이 있다고 판정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되느냐”라고 묻자 놀란 산업부 장관이 주도해 ‘경제성 없음’으로 뒤바꾼 사실이 드러났다. 대통령 발언 이후 산업부·한수원은 일사천리로 가동 중단 절차를 밀어붙였고 두 달 만에 결정이 내려졌다. 산업부 공무원들은 감사원 감사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증거 자료를 무더기 파기했다. 간이 콩알만 하다는 공무원들이 대놓고 범죄를 저질렀다. 대통령이 뒤에 있으니 겁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검찰이 수사에 나서자 여권은 “정책 판단에 검찰이 끼어든다”며 펄펄 뛰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정책 결정 과정에서 저지른 수치 조작과 직권 남용, 증거 인멸 등이다. 명백한 범죄 행위가 있는데 검찰이 방관하면 그것이야 말로 범죄다.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국가의 기간 정책이 국민을 속인 채 밀실 안에서 조작되고 왜곡됐다. 그 배후에 대통령이 있었다. 여권이 검찰 수사에 저토록 필사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검찰총장 가족 사건을 끄집어 내고, 특활비 운운하면서 치졸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대통령까지 번지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의 그림자는 울산 선거 개입 사건에도 어른거리고 있다. 문 대통령의 30년 지기를 당선시키려 청와대가 총동원돼 공작을 벌였다. 정무·민정수석실을 포함한 8개 조직이 나서 여당 후보 공약을 만들어주고, 야당 후보의 비위 첩보를 경찰에 넘겼으며, 경선 상대방을 매수하려 했다. 모든 사실과 증거들이 참모들의 상급자인 그 한 사람을 지목하고 있다. 검찰이 정권을 겨냥하자 여권은 윤석열 총장을 거세하려 혈안이 됐다. 추미애 장관이 선봉에 서서 폭주하고 있지만 그 역시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자의 뜻을 너무나도 충실하게 이행한 것이 추 장관의 죄라면 죄일 것이다.
탈원전을 감사한 감사원 보고서는 200쪽 분량에 달한다. 이 중 문 대통령을 지칭한 ‘대통령’이란 단어는 109쪽, 161쪽에 딱 두 번 등장한다. 그 두 번의 ‘대통령’은 죽어가는 사람이 범인을 알리려 남긴다는 ‘다잉(dying) 메시지’와도 같다. 정권의 갖은 압박에 죽을 지경이 된 최재형의 감사원이 혼신의 힘을 다해 진실의 조각을 새겨 넣었다. 작지만 분명한 그 단서가 출발점이 되어 탈원전 자해극의 실체를 드러내 줄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아무리 권력의 힘으로 눌러도 영원히 진실을 숨길 수는 없다. 임기 말이 다가올수록 국정 폭주의 진짜 배후를 알리는 진실의 ‘다잉 메시지’는 온갖 곳에서 터져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