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본관에 정식 집무실을 두고서도 일상적 업무는 비서들이 근무하는 건물 내 사무실에서 처리한다. 권위주의 대통령 시대의 흔적을 지우는 의미라고 한다. 그 사무실 이름이 아픔은 ‘국민보다 먼저’, 기쁨은 ‘국민과 더불어’라는 뜻의 여민관(與民館)이다. 여민관 복도에는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김구 선생의 사진과 글씨 액자가 걸려 있다. 임란(壬亂) 시절의 고승(高僧) 서산대사 문장이라는 이 한문의 한글 풀이는 이렇다. ‘눈 내리는 벌판 가운데를 걷더라도/어지럽게 걷지 말라/오늘 걸어간 이 발자국이/뒤에 오는 이들의 이정표(里程標)가 되리니.’ 뜻이 좋아 대통령이 직접 골라 걸었다고 한다.
대통령은 11일 신년사에서 ‘주거 문제의 어려움으로 낙심이 큰 국민들께 매우 송구한 마음’이라고 했다. 이어 “‘빠르게’ 효과를 볼 수 있는 다양한 주택 공급 방안을 ‘신속히’ 마련하겠다”고 했다. 현 정권은 들어서고 한 달 가량 지난 2017년 6월 19일 첫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그 후 23번의 대책을 추가로 내놓았다. 어지러운 발자국 사이에 대통령 발언이 찍혀 있다. “더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주머니에 많이 넣어두고 있다”(2017년 8월 17일), “부동산 문제는 자신 있다고 장담하고 싶다”(2019년 11월 19일), ‘송구한 마음’으로 “빠르고 신속하게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신년사가 나오기까지 3년 7개월이 걸렸다.
환자는 가슴 통증(痛症)을 호소하는데 실제 원인은 등 쪽에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그래도 좋은 의사는 참을성 있게 경청(傾聽)한다. 그런 의사를 만나면 마음이 열리고 믿음이 자란다. 나쁜 의사는 어디가 아픈지 묻지도 않고 처방전을 끊는다. ’내 집을 갖고 싶다'는데 ‘임대주택이 더 좋은 집’이라고 우기고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나기 시작했다’는 뜬금없는 말로 속을 뒤집는다. 나쁜 의사의 대표 증상이다.
위정자(爲政者)는 국민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현 정권은 ‘소득 주도 성장’을 비롯한 갖가지 정책 실험을 실시했다. 그 실험은 국민의 고통으로 돌아왔다. 그걸 보고 이웃 나라들은 그런 정책은 도입해선 안 되겠다는 교훈을 공짜로 얻었을 것이다. 코로나 백신 늦장 확보 이유를 ‘백신의 심각한 부작용을 걱정해 국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최저임금을 급격히 인상해 비 오는 날 자영업자들의 우산을 빼앗기도 했다.
‘사법(司法)의 정치화’는 정치 권력이 인사권을 통해 법원과 검찰을 수족(手足)으로 만들고 ‘정치의 사법화(司法化)’는 정치권·정부·국회가 내부에서 풀어야 할 문제 해결을 법원·검찰에 떠넘기는 걸 말한다. 둘 모두 권력 분립의 원칙을 허물어 민주주의를 유명무실하게 만든다. 이런 시대 역행(逆行)이 동시에 진행됐다.
권력자가 아무 때나 솥뚜껑을 열면 국민에게 선밥을 먹인다. 북한 문제만 나오면 분별(分別)을 잃고, 김정은의 여동생 호령에 꼼짝 못 하는 국가라는 오명(汚名)을 얻어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때로는 대국(大國)의 횡포에 힘과 기백으로 맞서고, 때로는 그들과 더불어 지낼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하지 않으면 험한 세계를 건널 수 없다. 그 구분을 못해 한국은 동북아에서 북한 다음으로 고단(孤單)한 나라가 돼버렸다.
공무원 조직은 국가 자산이다. 그 공무원들이 원전 폐쇄 경제성 평가조작, 문서를 위조한 불법 출국 금지 사건 등에서 범죄의 하수인(下手人)으로 대거 등장했다. 가장 많은 공무원들을 범죄자로 만든 정권일 것이다. 정권과 색깔을 맞추라고 공무원 조직에 너무 자주 손찌검을 해온 탓이다. 이 상처는 쉬 아물지 않는다.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 시절인 2015년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해 재·보궐 선거를 실시하면 후보자를 내지 않는다’는 당헌 96조를 만들었다. 민주당이 그 당헌을 바꿔 서울·부산 보궐선거에 후보자를 낸다는데 대통령은 한마디 말이 없다. 이 침묵은 동조(同調)한다는 뜻이다.
대통령은 기세등등하게 출발해 허둥지둥하며 끝나는 5년 궤도를 돈다. 한국형 대통령제는 자리에 앉는 순간 뒤 철문(鐵門)이 내려와 닫히는 쥐덫 구조다. 임기가 끝나갈 무렵에야 이 사실을 깨닫는다. 현재 대통령과 전임(前任) 대통령들은 그런 뜻에서 서로가 서로의 과거이자 미래다. ‘오늘 걸어간 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들의 이정표가 되리니’라는 액자 속 백범(白凡) 글씨가 그래서 더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