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몸집이 작았다. 목소리도 가늘었다. 2년 전 행정부처에 대한 청와대 외압을 격한 목소리로 폭로했던 신재민(35)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을 20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그는 “그땐 큰 사고 쳤지 싶다”라며 웃었다. 그는 폭로 당시 스트레스로 평소보다 15㎏이 찐 상태였다. 기재부는 그를 고발했고 그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지난해 초 책을 낸 후엔 정치나 정부에 대해 말을 아껴온 신씨는 “그렇게 일을 벌였는데 잘 살진 못해도 남들 못지않게 산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고려대 대학원(행정학 전공)에 입학했다. 창업에도 도전 중이다. 예비 창업자에게 1억원을 지원해주는 정부 프로그램엔 신청했다가 떨어졌다. “내년에 다시 도전할 계획”이라며 깔깔 웃는 ‘가장 유명한 사무관 신재민’은 유쾌한 청년이었지만 2년 전 폭로 사건을 이야기하자 좀 어두워졌다. “제가 사회에 끼친 득보다는 폐가 많다고 생각해요. 바뀐 게 없으니까요.”
◇“그 난리를 쳤지만 바뀐 게 없다”
–후회한다는 건가요.
“사회에 기여를 못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았으니까요. 문제 제기를 좀 더 효율적으로 했으면 좋았겠다 싶죠. 그 정도로 난리를 쳤으면 뭔가는 나아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요. 제 목소리는 그저 하나의 분쟁거리로 끝나버렸어요. 안타깝죠.”
–왜 나아지지가 않았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한 공무원 형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날마다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라고. 청와대에서 정한 ‘목표’를 뒷받침할 무리한 수치를 만들어내라는 지시가 시도때도없이 내려온다는 거예요. 그런 요청이 장관·국장·과장을 지나 그 누구에게도 저지당하지 않고 사무관인 본인한테까지 내려온다고 너무 괴롭다고 해요. 저는 (폭로 당시) 적자 국채 발행이 타당한지도 논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이런 시스템, 즉 정권이 자신의 목표를 세워놓고 공무원에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만들어내라고 시키는 부당한 관행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국채 발행 관련 시시비비 가리기가 시작되고 정쟁만 싸움만 커졌어요. 그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현명하게 전달했다면 뭐라도 좋아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답답하죠.”
–공무원에게 어떤 ‘거짓말’을 만들라고 한다는 건가요.
“그 형이 피해를 당할까 봐 부처를 밝히긴 조심스럽지만, 이미 공개돼 뉴스에 나오는 사례만 봐도 너무 많아요.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이 대표적이죠. 정권이 ‘원전 폐쇄’라는 목표를 대놓고 정해놓았잖아요. 그러고는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에겐 이를 합리화할 수단을 내놓으라고 무리수를 두었고요. 결국 공무원이 구속까지 됐죠. 또 대통령이 ‘나쁜 사람'이라고 정해버린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은 검찰이 절차를 무시하면서 출국금지를 시켰죠.(문 대통령은 김학의 건에 대해 “검경의 명운을 걸고 책임지라”고 지시했었다.) 지난해 총선 전 전 국민 재난지원금은 어떤가요? 그거 어차피 다 주겠다고, 정권은 결정해놓고 기재부를 동원한 거잖아요.”
–재난지원금은 당시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반대 목소리를 냈다가 결국 물러섰죠. 그 탓에 ‘홍두사미’란 별명도 얻었고요.
“그나마 기재부쯤 되니깐 (부정적) 의견을 냈겠죠. 기재부에서 일할 때 보면 정말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고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도 대단했어요. 또 예전 선배들은 정치권이 밀어붙이는 얼토당토않은 일을 막았단 얘기를 무용담처럼 많이 했어요. 그런 자부심이 아직 약간은 남아있는 곳이 기재부라고 생각해요.”
문재인 대통령은 폭로 사건 직후 그에게 “젊은 공무원의 소신과 자부심은 필요하다”면서도 “신 전 사무관은 본인이 경험한 좁은 세계 속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정책은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고 했다. 신씨는 “대통령이 보기엔 ‘좁은 세계’일지언정, 공무원은 담당하는 그 업무에서만큼은 전문가다. 그 좁은 세계까지 자신들의 ‘목적’에 동원하는 정권은 정당할까”라고 했다. “연말에 만난 한 친구는 술 마시고 이런 말을 하더군요. ‘공무원은 정치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한 조직이 되어버렸어’라고요.”
그는 서울대 게시판에 한 공무원이 최근 올린 글이 공무원 사이에서 많이 공유되고 있다며 보여주었다. ‘죽고 싶습니다’란 제목의 글엔 이렇게 써 있었다. ‘구조가 잘못됐습니다. 시민단체의 사적인 요구가 상부(청와대)를 통해 행정부에 지시로 내려옵니다. 국가를 위해서 일할 줄 알았는데, 시민단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소모되는 저 자신이 싫습니다.’
–청와대가 공무원을 압박하는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전에 그랬다 치더라도 문재인 대통령만큼은 그러면 안 되죠. 직전 정권이 부당하게 공무원을 동원해 외압을 행사했던 일을 문제 삼아서, 자기들은 그렇게는 안 하겠다고 약속하고 선출됐으니까요. 지금 정권 잡은 분들은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내걸지 않았었나요. 왜 본인들에겐 그 말을 적용하지 않죠?”
◇“기재부의 나라? 그럼 여긴 청와대 나라입니까”
–떠나온 기재부를 요즘 보면 어떤가요?(그는 인터뷰하며 기재부를 언급할 때면 ‘우리 부’라고 했다.)
“정권이 밀어붙이는 일에 대해서 그나마 ‘안 되는데…’ 정도라도 목소리 낸 부처는 기재부, 그리고 감사원 정도밖에 없지 않았나요? 할 일을 하는 건데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의견을 내면 바로 화부터 내더라고요.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홍남기 부총리가 재정 문제를 언급하자 ‘무소불위 기재부의 나라냐’라고 버럭 했죠.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반대 의견을 낸 감사원장도 마찬가지에요. 감사원이 감사를 한다는 건데, 민주당은 ‘정치 감사’라고 몰아세우고요.”
그는 “‘우리는 선출된 절대선(善)’이라 여기는 정권에 화가 난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는 견제와 균형이라고 배웠습니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그분들이 내세우는 목적이 절대적 지고지순함을 부여받고 공무원은 무조건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동원되어야 합니까. 권력을 위임받았다 해서 그 권력을 무한대로 사용하면 독재와 무엇이 다른가요.”
신씨와 인터뷰한 다음날 자영업자의 손실 보전을 법제화하는 문제가 정세균 총리를 통해 공론화됐다. 김용범 기재부 차관은 “해외 사례를 찾기 어렵다”라고 반대 의견을 냈다가 총리에게 “이게 기재부의 나라냐”, “개혁 저항 세력”이라는 질책을 당했다. 의견을 들으려 24일 신씨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기재부의 나라냐'라는 말, 갑자기 유행어처럼 쓰이네요.
“제가 되묻고 싶네요. 이 나라는 그럼 누구의 나라일까요. 청와대의 나라입니까?”
◇“잘 사는 내부고발자 모습 보여주고 싶다”
기재부는 당시 신씨를 ‘공무상 비밀 누설’ 및 ‘공공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고소·고발했다. 기재부에서 청사 신축 업무를 담당하기도 해 구치소 시설에 대해 잘 알았던 신씨는 “이왕이면 새로 지은 동부구치소에 가야 하는데”라는 생각마저 들더라고 했다. 스트레스가 커져 극단적 시도까지 했고 이후 두 달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지난해엔 책 ‘왜 정권이 바뀌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가’를 냈다. 애초 “10개를 올리겠다”라고 예고했던 폭로 영상은 2개만 올린 상태다.
–유튜브 영상은 왜 올리다 말았나요.
“아, 그게… 제가 극단적 생각을 했을 때 휴대폰 번호를 없애버리고 전화기는 버렸어요. 그 후 치료를 받고 돌아와 계정에 접속하려고 하니 휴대폰으로 이중인증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번호가 사라져 로그인을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쓰던 번호로 최근 전화를 걸어서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어린이가 받아서는 끊어버리더라고요.”
–당장 생계는 어떻게 하게요.
“일단 대학원은 장학금을 받고 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 창업을 준비 중이고요. 전자책에 비디오를 결합한 이른바 ‘비디오북’ 플랫폼을 만들려고 해요. 책 쓰면서 그와 관련한 영상도 쉽게 접목할 수 있는 ‘판’을 깔고 싶어요. 일단 제가 먼저 해보려고 공무원 시험 준비 관련 콘텐츠를 올리고 동영상 강의도 하고 있어요. 월 9만9000원씩 받는 유료 서비스인데 한 달만에 매출을 500만원 가까이 올렸고 비용 빼니 300만원 정도 남았어요. ‘되는구나’ 싶어서 기뻤어요. 정부에 예비창업자 지원 신청도 했고요.”
–담당 공무원이 ‘신재민’ 이름 보면 놀라지 않겠어요?
“예비 창업자에게 1억원씩 주는 프로그램인데요, 일단 지난해엔 떨어졌어요. 아는 친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너 제정신이냐. 정권 바뀌기 전엔 나랏돈 타 먹을 꿈도 꾸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전 그래도 우리 공무원들이 그 정도는 아니리라고 믿고 싶어요. 게다가 심사하시는 분들은 외부 전문가들이고요. 이번엔 제가 500만원 매출을 올렸다는 점을 부각해서 재도전하려고요.”
–정부 돈 타내려는 입장이 되니 어떻던가요.
“공무원 식으로 말하면 ‘현장의 고충을 이해하겠다’랄까요. 이렇게 나가는 돈 하나하나마다 선발된 사람이 얼마나 적합한지, 그리고 꼭 필요한 곳으로 돈이 흘러들어서 ‘창업’이라는 목표까지 얼마나 잘 이어지는지 평가하려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돈을 노리는 ‘지원금 헌터(사냥꾼)’까지 있다고 하더라고요. 일할 때는 전혀 몰랐는데 현장에 오니 보이네요.”
–공무원과 창업, 극과 극을 오가는군요.
“일종의 내부 고발자로서 제가 잘사는 모습을 많은 분께 보여 드리고 싶어요. 많은 내부 고발자들이 그 일에만 함몰되어서 분을 못 삭이고 어렵게 지내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살도 다시 뺐는데, 또 너무 과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요즘은 다시 좀 찌웠어요. 한 친구는 ‘너 다이어트 책 쓰면 훨씬 잘 팔릴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앞으로도 ‘보기 좋은 모습’으로 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