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 사람들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못할 지경이 아닌가 싶어요.”
전윤철(田允喆·82) 전 경제부총리는 인터뷰 첫머리에 이런 말을 꺼냈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자신이 내놓은 자영업자 손실보상제를 기획재정부가 반대한다며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고 공격하고, 대선 주자로 꼽히는 이재명 경기지사는 “기재부는 머슴임을 기억하라. 대통령 지시에 무한 충성하라”고 하는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공정거래위원장, 경제부총리, 청와대 비서실장, 감사원장을 지내면서 43년 관료 생활을 했던 그는 “경제 관료들을 적군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공무원은 공복이라고 한다. 그럼 머슴이라는 말이 맞는 것 아닌가.
“맞는다. 그런데 누구의 나라인가. 국민의 나라다. 선출직 의원들도 머슴이다. 선출직은 국민이 직접 선거해 뽑은 것이라면, 전문 기술 관료는 국가 시스템이 선출한 것이다. 자격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선출직 공무원이 직업 공무원을 자신들의 머슴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잘못이다.”
-기재부의 나라라는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총리 말대로 코로나 방역으로 손실 본 자영업자에게 보상하는 정책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해야 한다. 그런데 총리는 경제 부처와 충분히 토론해 보고 정책을 추진했는가. 그러지도 않고 ‘이게 기재부의 나라냐’고 얘기했다면 참담하고 불쾌하고 섭섭하다. 기재부 장관 할 때는 걱정으로 밤잠이 안 온다. 그런 기재부가 반대하면 얘기를 먼저 들어 봤어야 한다. 총리는 반대하는 기재부와 토론을 해 봤나. 토론하고 나서도 정책이 서로 맞지 않았다면 사표를 받았어야 한다. 그게 맞는 방법이다.”
-토론이 없는 정부라고 보는 것인가.
“손실보상제를 두고 당정이 토론했다면 당에서도 당의 입장을 얘기했을 것이고, 기획재정부는 곳간지기 입장에서 얘기했을 것이다. 치열한 토론을 했다면, 토론 끝에 결론을 냈다면 기재부도 군소리가 없었을 것이다.”
-관료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고 보나.
“그렇다. 중요한 것이 대통령의 역할이다. 예전에 단체 수의계약 제도라는 게 있었다. 정부 어느 부처든 책상을 구입하려면 중소기업 조합과 일괄 계약하도록 했다. 예컨대 책상 500개를 계약하면 기업별로 품질에 상관없이 순서 정해서 납품하는 거다. 그러니 경쟁이 되겠나. 없애자는 의견이 많았다. 문제는 이 제도를 대통령이 자신의 저서 ‘대중경제론’에서 중소기업을 보호하는 넘버원 시책이라고 써 놓았다는 거다. 그런 정책인데도 김대중 대통령은 없앴다. 그래야 관료들이 일할 수 있다.”
-경제 관료들의 기백이 사라졌다는 말도 많다.
“경제 관료들의 자존심이 깨지고 있는 거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안 되면 사표 내야 하는 것 아닌가. 타협의 여지가 있는 상황이면 타협해야 하지만, 소신에 맞지 않으면 본인 스스로 사직하는 것이 맞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부총리들은 그와 함께 일한 적이 있다. 청와대 비서실장일 때 김동연 보좌관과 일했고, 부총리였을 때 홍남기 과장이 근무했다. 두 사람의 평가를 부탁했더니 ‘노 코멘트'라고 했다.
-경제부총리는 어떤 자리인가.
“대통령은 경제부총리를 정말 잘 활용해야 한다. 사회의 여러 갈등 중에 경제 갈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부총리에게 전권을 줘야 대통령이 편하다. 직업이라는 단어가 독일어로 베르푸(Beruf)다. 신에게서 받은 ‘소명(召命)’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자기 직업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자기 인생 실현의 과정이다. 경제부총리는 상머슴이다. 상머슴 역할을 해야 하고, 상머슴으로서의 영혼과 기백이 있어야 한다.”
-경제 관료의 역할이 작아지는 시대가 된 것 아닌가.
“테크노크라트, 전문 기술 관료라는 말이 1919년쯤에 생겼다. 서구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빈부 갈등이 엄청나게 커지고 갈등이 폭발할 때였다. 당시에 그런 갈등 때문에 볼셰비키 혁명이 난 것 아닌가. 그렇게 혼란스러울 때 전문적인 판단과 전문적인 추진력으로 키를 잡지 않으면 사회가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 그래서 공동체가 전문가를 인정하게 됐고 테크노크라트라는 말이 자리 잡았다. 지금 테크노크라트 역할이 사라졌겠나. 아니다. 더 커졌다. 빈부 갈등, 도농 갈등, 계층 갈등, 여기에 디지털 디바이드라고 하는 갈등이 더 보태졌다. 관료들의 말이 다 맞는 건 아닐 진 몰라도, 테크노크라트를 홀대하면 나라가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경제 부처 사무관들의 어깨가 처져간다는 말이 나온다.
“중앙 부처 정책의 70~80%는 사무관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기 진작이 필요하다. 젊은 공직자들이 나태해졌다고들 하는데, 그들의 자긍심을 북돋아주지 않아 힘이 빠졌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분명한 것은 인간은 보람을 느끼면 최선을 다한다는 거다. 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경험도 쌓은 이들이 왜 안일한 것처럼 보이는지 고민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제도를 바꿔야 하는가.
“인사 발탁 아니겠는가. 우선 낙하산을 없애야 한다. 그리고 일 열심히 하고 소신과 능력이 있으면 결과가 잘 나오는 사회라면 공직자들이 나태하겠는가.”
-국회의 힘이 세진 영향도 있을 것 같다.
“경제 정책은 항상 명암이 엇갈리고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가 과제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은 여기저기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법률안을 낸다. 그렇게 되면 일부 계층 이익만 대변하는 법안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표심을 먹고 사는 의원들이 혼란스럽게 의원입법을 쏟아내는데 관료들이 중심을 잃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나.”
-174석 거대 여당을 관료들이 거스를 수 있을까.
“정책 판단에 여당 의원의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여당도 의원 숫자가 많다, 적다에 매몰되면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 무리한 일을 무리하다고 하는 관료들의 조언에 귀를 열어야 한다.”
그는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선거 캠프의 공동선대위원장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감사원장을 4년 이상 했으니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과 비서실장을 했던 문재인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일 수밖에 없다. 그는 문 대통령을 ‘호인(好人)’이라고 표현했다.
-관료들의 판단으로 대선 공약을 수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사회가 커지고 근대화되면 고쳐야 할 부분이 생긴다. 나이가 들면 골다공증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회의 골다공증을 치료하기 위해 공약을 내놓고 심판받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설사 대통령이 국민에게 공약했다고 하더라도 결단할 때는 결단해야 한다. 우리는 개방 경제이고 수출해서 먹고사는 나라다. 우리 정책을 우리 내부 생각만으로 할 수 없는 운명이다. 또 사회가 너무 빨리 변한다. 대통령이 선거 때 국민에게 한 약속이 얼마 지나서 보면 안 맞을 수도 있다. 이때 국민한테 솔직히 얘기하고 바꾸겠다고 해야 한다. 그게 더 낫다.”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다른 말 필요없다. 이 정부에서 규제 푼 거 있나. AI 혁명이 됐든 정보통신혁명이 됐든 간에 혁신하겠다고 하면서 과연 뭘 했나. 공기업 문제도 그렇다. 역사적인 책임을 다한 공기업은 없어져야 한다. 예를 들자면 광물자원공사가 있다. 자원 개발은 민간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국제적으로 이젠 진보와 보수의 경제정책에 큰 차이가 없다. 큰 목표는 국가 경쟁력 강화다. 그걸 위해 경제 정책의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
-최근에 대통령을 만난 적 있나
“2019년 4월 청와대에 들어갔다. 경제 원로들을 모아 놓고 얘기를 듣는 자리였다. 그때 내가 이런 얘기를 했다. 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경제정책이 소득 주도 성장, 혁신 성장, 공정 경제 세 가지다. 공정경제는 절차에 대한 문제고, 어떤 정책을 쓰든 간에 페어플레이는 해야 하니 논외로 하자. 근데 소득 주도 성장과 혁신 성장을 보자. 소득 주도 성장은 뭐냐. 임금 인상→유효 수요 증대→투자 증대→일자리 증가처럼 이상적인 선순환 모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업 내부 유보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혁신 성장은 뭐냐. 기업은 무한 경쟁을 해야 하니까 기술 개발을 해서 블루오션을 찾으라는 얘기다. 소득을 늘려주기 위해 임금으로 돌릴 거냐, 아니면 혁신 성장 하기 위해 내부 유보 투자로 돌릴 거냐.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 이 때문에 소득 주도 성장과 혁신 성장은 상충된다. 이렇게 설명을 했다.”
-대통령이 뭐라고 하던가.
“아무 답변이 없더라.”
-재정 건전성이 악화된다는 걱정이 많다.
“재정은 국가 경제의 최후의 보루다. 한국처럼 자연자원이 없는 나라는 재정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지금 상태로는 상대적으로 낮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국제통화기금이 한국 국가채무비율이 2025년에 65%까지 뛴다고 전망했다고 한다. 코로나 상황이라 재정을 풀어야 한다지만, 문제는 어떤 기준으로 풀 거냐다. 재난지원금 등으로 돈을 풀면 소비가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전윤철 전 부총리는 현역 시절 ‘전핏대’로 불렸다. 이날 인터뷰 중에도 열을 낼 때는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는 “나한테 ‘핏대’라는 별명을 조선일보가 처음 붙였는데, 마음에는 안 든다”고 했지만, 관료는 제 목소리를 내야 하니 핏대도 좀 올려야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그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수산청장이 됐을 때 “직설적이고 속마음을 숨기지 못해 핏대로 불린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