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처럼 파묻혀 있던 운동부 학교 폭력이 프로배구 이재영·다영(25) 쌍둥이 자매를 향한 폭로를 계기로 일파만파 터지고 있다. 지난해엔 故 최숙현 선수 사건이 스포츠계 사제지간 폭력 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아직도 왜 이렇게 때릴까. 한국 스포츠는 정말 매 맞는 짐승들의 세계인가. 익명을 전제로 취재한 이야기들을 모으면 이 지면 전체를 피멍으로 물들이고도 남는다.
체육계 감투를 쓴 인사들에게 인터뷰를 청했지만 다들 “이 바닥이 좁다”면서 손사래 쳤다. 이에리사(67)씨는 “체육계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내가 뭘 물려준 것인지 미안하고 가슴 아파서 목소리를 내겠다”며 고심 끝에 인터뷰를 승낙했다. 한국 여자 탁구의 전설인 그는 선수, 감독, 교수, 태릉 선수촌장, 국회의원 등을 두루 거쳤다. 18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해 출간하신 자서전 ‘페어플레이’를 뵙기 전 다시 읽어봤습니다. 340쪽 분량 책에서 “맞았다”는 얘긴 단 한 번도 없던데, 폭력을 경험 안 하신 겁니까.
“저도 중·고교 시절엔 맞았죠. 대신 운동에 집중 못 할 때 받는 단체 기합만 있었고 개별 폭행은 없었어요. 선생님이 긴 나무 막대기로 때렸는데 저는 ‘사랑의 매’라고 생각했어요. 평소에 내게 애정과 관심을 쏟아주시는 선생님이 그러는 거니까 납득이 된달까. 그래서 상처로 남지도 않았고요. 지도자 생활할 때도 선수들 때린 적 없다고 자부해요. 훈련에 의욕 잃은 선수가 있으면 제가 밥 안 먹고 매달리며 그 선수 마음을 움직이는 식이었죠. 하지만 그게 때리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든 일입니다.”
-도대체 왜 때리는 겁니까.
“선수는 맞으면 아프니까 안 맞으려고 열심히 하게 되잖아요. 지도자는 때리면 금방 효과가 나타나니 편하고요. 말보다 손찌검으로 운동 배운 아이들이 나중에 지도자가 돼 똑같이 가르치는 게 비극의 씨앗이죠. 아이들끼리 의사소통도 주먹이 앞서게 되고요. 1986 서울 아시안게임-1988 서울 올림픽을 거치며 한국 스포츠는 비약적으로 커졌고 사회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체육계는 변화가 턱없이 더딘, 고인 물입니다. 선수들은 인권에 눈을 떴는데, 옛날에 머물러 있는 지도자들은 여전히 말보다 주먹부터 나가는 경우가 많아요.”
◇학교 폭력, 어쩌다 이 지경까지
-체육계 폭력 양상은 크게 코치-선수 간, 선배-후배 간으로 나뉩니다. 우선 여자 배구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로 촉발된 학교 폭력 문제부터 짚죠.
“어른들 잘못이 90%입니다. 초·중·고 운동 선수들은 인격을 형성하는 시기라 지도자들 역할이 매우 중요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실력이 있을수록 그 자리를 기피합니다. 체육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 프로·실업 팀이나 국가대표 지도자예요. 명예와 돈이 따르죠. 요즘엔 돈 되는 생활체육 쪽으로도 많이 빠집니다. 반면 학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에요. 월급이 박한 데다 그 돈도 사실상 학부모 지갑에서 나오는 구조라 학부모에게 끌려다닙니다. 쌍둥이 엄마처럼 극성 학부모가 있어도 제어가 어려워요. 지도자가 의욕이 꺾여 있는데, 그 밑 선수들 관리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스카우트 시스템도 한몫했을까요. 고교 선수가 프로·실업 팀을 가면 ‘지원금’ 명목으로 학교에 돈을 주고, 고교 코치는 그 돈으로 중학생을 데려오고, 중학교 코치는 초등학생을 돈 들고 물색한다던데요. 그래서 성적 내주는 에이스 선수가 기고만장하게 굴어도 속수무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학부모와 코치가 짜고 아이들을 거래하는 셈인데 정말 잘못됐죠. 학교 지원금이 계속 좋은 선수를 키워내라는 뜻에서 생겨난 것인데 변질된 부분이 있어요. 코치들은 당장 성적을 내야 일자리가 보장되니까 유망주를 사오고, 교원들도 소년체전에서 학생이 메달 따면 승진 가산점 받는 식으로 혜택이 있다 보니 묵인했고요. 체육 현장이 기형적으로 변해서, 부모가 밥상머리 교육을 제대로 안 시키면 아이들이 비뚤어지기 쉽습니다.”
-합숙소 문화가 선후배 간 폭력을 조장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서구권처럼 클럽 스포츠가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주장이 있는데요.
“그렇게 되려면 일단 전국 동네방네 체육관이 있어야겠죠. 우리가 그런가요? 지방 학부모들이 아이 운동 뒷바라지 결심하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수도권에 방 얻는 일입니다. 웬만한 시설이나 코치가 수도권에 몰려 있으니까요. 생활체육 모범 국가인 독일은 동네 어디든 체육 시설이 있으니까 클럽 시스템이 운영이 가능한 겁니다. 인프라 투자 없이 제도만 따라 하면 소용 없어요.”
-배구계에서 유독 폭로가 잇따르는 이유가 뭘까요.
“시작이 배구계여서 그럴 뿐 이 논란에서 자유로운 종목은 없다고 봅니다. 체육인으로서 이번 사태가 어디로 퍼질지 걱정되고 두려워요. 여론 뭇매 맞더라도 하나씩 들춰내 뿌리 뽑아 가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쌍둥이를 비롯한 가해 선수들은 사과문 쓰고 말게 아니라 피해자에게 제대로 사죄했으면 좋겠어요. 본인들이 용기를 못 낸다면 주변 어른들이 도와줬으면 합니다.”
◇엉덩이에 김 붙은 것처럼 피멍들어
-사제지간 폭행 문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때리는 지도자를 부모가 용납하는 게 신기합니다.
“학생들이 경기 도중 공개적으로 뺨 맞거나, 정강이 차이는 일이 아직도 비일비재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걸 항의하는 학부모는 드물어요. 부모 입장에서 아이를 엘리트 운동 선수로 키운다는 건 1년에 최소 몇천만원씩 써야 하는 투자입니다. 어떻게든 결과를 빨리 내는 지도자를 찾다 보니 손찌검이나 폭행에 눈 감는 거죠.”
-단체 종목일수록 폭행 강도가 심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한 사람의 실수가 팀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더 와일드한 편이에요. 제가 태릉선수촌장(2005~2008년) 할 때도 몇몇 단체 구기 종목 감독들이 감시 대상이었어요. 이미 ‘폭행 기술자’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라 제 감시망에 포착된 적은 없지만요.”
-지금도 이러는데, 1970~80년대엔 얼마나 때렸을지 짐작도 안 됩니다.
“아무래도 ‘깨어있지 않은 시대’였다 보니…. 여자 선수들 목욕탕에서 만나면 엉덩이에 김 붙인 것처럼 시커먼 피멍이 있었어요. 제가 선수였을 땐 여자 배구와 여자 농구가 선수촌 통틀어 군기 세기로 유명했는데 말투나 눈빛이 정말 살벌했어요. 제가 촌장 할 땐 하키나 핸드볼이 군기가 셌고요.”
-유도, 태권도 등 격투 종목은 훈련장이 핏빛 아비규환일 것 같습니다. 촌장 시절 목격하신 폭행은 없습니까.
“제가 여러 각도로 감시하고 선수들에게 다가가 물어봤지만 실제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 곳은 침묵의 카르텔이 엄청나요. 그 종목 관계자들만이 내부 상황을 통솔할 수 있죠. 저는 탁구 출신이다 보니, 개입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어요.”
-심석희 사건, 故 최숙현 사건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심석희 선수가 대단한 용기를 냈죠. 저도 당시 그 뉴스를 보고 매우 놀랐고, 어떻게 아직도 이런 일이 있나 망연자실했어요. 가해자인 조재범 코치가 여자 선수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건 애초에 지도자 자격이 없는 겁니다. 최숙현 선수도 너무 안타까워요. 그 힘든 와중에 똑 부러지게 녹취며 제보며 본인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다했더군요. 그런 희생이 났는데도 책임자들은 근본적 해결은커녕 그 팀(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을 해체시키는 방식으로 일을 해요. 학교에서도 요새 운동부가 급감하는 추세인데 혹시나 골치 아픈 일 생길까 봐 아예 없애버려요. 이건 옳지 않아요.”
◇책임지는 어른, 이번엔 반드시 있어야 된다
-폭력을 뿌리 뽑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기적으론 책임자 처벌, 장기적으론 유소년 지도자 처우 개선을 꼽겠습니다. 한국 체육계에서 폭력이 근절 안 되는 이유는 처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도 맞으면서 운동했다’는 일갈 속에서 가해자는 계속 활개 치고 피해자가 벌벌 떨죠. 그래서 제가 국회의원 시절 범죄 경력이 있으면 지도자나 협회 임원으로 활동 못 하게끔 대한체육회 내규를 정했는데, 요즘엔 다시 흐지부지됐어요. 대한체육회부터가 로비만 잘 하면 살아남는 조직입니다. 폭행·횡령·승부조작·판정비리 등을 저질러 징계받아도 슬그머니 복귀해 활동하는데 누가 겁내겠습니까.”
-외국은 어떤가요?
“2016년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가 30년간 선수들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밝혀졌을 때, 본인은 징역 175년형 받고 미국 체조협회장과 이사진도 관리·감독 소홀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습니다. 협회는 개인 보상금을 감당 못 해 파산했고요.”
-유소년 지도자 처우 개선은 왜 필요합니까?
“먹고살 길이 어느 정도 안정돼야, 그들에게 참고 또 참는 인내를 요구할 수 있지 않겠어요? 초·중·고 무기계약직 코치가 되는 길만 열려도 한결 나아질 겁니다. 열악한 상황에서 혈기왕성한 아이들과 씨름하는데, 무조건 너그럽기를 기대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품격 있는 지도자 밑에서 어릴 적부터 상처 없이 운동한 아이들이 주류가 되어야 한국 체육계가 뿌리부터 바뀔 거고요.”
-성적 지상주의가 문제라는 비판이 끊이질 않습니다.
“한국이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24년 만에 3등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줄사표감인데, 다들 아무렇지도 않아요.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이 종합순위 10위 안에 못 들어가도 별말 없을 테고요. 이미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서 운동하는 시대예요.”
-성격 좋은 에이스 선수는 드물더군요.
“무난하게 이기는 경기란 없습니다. 숨이 깔딱깔딱하는 사점(死點)을 수 없이 넘으며 단련한 선수만이 승리의 쾌감을 누리죠. 잡초처럼 강인해야 살아남고, 그게 성격에도 반영되겠죠. 엘리트 체육을 폄하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선수들이 전인적(全人的) 성장을 하도록 환경부터 바꾸는 게 급선무입니다.”
-스포츠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최선을 다하고 결과엔 승복하는 페어 플레이 정신이죠. 스포츠인은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들인데, 정작 운동장 밖에선 안 그러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번 만큼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는 교훈을 책임자 처벌로 확실히 알려야해요. 폭력을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로 쫓아내야 이 비극 뿌리뽑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