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7회>
노회한 권력자는 순진한 청소년을 이용해서 권력의 영속을 꾀한다. 열광적 팬덤을 거느린 문화계의 슈퍼스타처럼 권력자는 맹목적 추종세력과 열광적 지지층을 규합해 권력의 기반을 다진다. 전체주의 정권의 독재자들은 더더욱 필사적으로 교육기관을 독점하고, 매스컴을 장악하고, 문화예술계를 점령한다. 여릿한 청소년의 뇌수에 획일적 이념을 주입해야만 그들을 좀비처럼, 병정처럼, 포로처럼 사로잡고 부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는 어김없이 청소년의 정신을 이념적으로 지배하려들며, 정교한 감시망을 구축해서 그들의 모든 행동을 통제한다.
홍위병, 마오 숭배하며 ‘상상의 혁명'
문혁 당시 중국의 홍위병들은 이미 17년 이상 중공 선전부의 강력한 “아지프로”(agitprop)에 세뇌당한 혁명의 신세대였다. 홍위병의 정신세계를 깊이 탐구한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궈빈 양(Guobin Yang) 교수는 1966년-1968년 문혁 초기 청소년들은 경쟁적으로 폭력을 통해 혁명성을 드러내야만 하는 “상상의 혁명”(imaginary revolution)에 빠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1950-60년대 중국사회를 휩쓸었던 전쟁영화, 혁명가극, 혁명가곡, 혁명신화와 전쟁영웅들의 전기를 일상적으로 접하며 자라났다. 또한 그들은 “마오쩌둥 어록”을 졸졸 암송하며 마오쩌둥을 태양처럼 숭배했다. 바로 그러한 이념적 세뇌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공산혁명의 동화” 속에서 계급전쟁에 헌신하는 혁명적 낭만주의자들(revolutionary romantics)로 길러졌다.
철저한 감시와 이념 압박 받은 홍위병
꽤 설득력이 있지만, 선전선동과 세뇌교육만으로 홍위병의 광적인 행동을 다 설명할 순 없다. 철학자이자 문혁연구가인 중국사회과학원의 쉬요우위(徐友漁, 1947- ) 교수는 홍위병의 정신을 구속하는 중공정부의 당안(檔案) 시스템에 주목한다. 당안이란 개개인의 가정출신, 사회관계, 정치활동, 주변 사람의 밀고 내용까지 적힌 신상정보의 기록부였다. 평생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개개인의 이력을 결정하지만, 완벽히 비밀에 부쳐져서 정작 본인은 절대로 그 내용을 볼 수 없었다. 결국 정치적 표적이 되는 순간, 당안의 기록은 인격 살해의 위력을 발휘했다. 학교를 점령한 홍위병들은 가장 먼저 당안의 기록을 모두 불태웠다는 증언도 있다. 결국 전체주의적 감시와 정치적, 이념적 압박 때문에 다수 청소년들은 피치 못해 홍위병이 됐다는 설명이다.
교과 과목 수업은 뒷전, 마오 사상 교육
1967년 10월은 문혁의 분기점이었다. 마오쩌둥은 질서회복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강구했다. 그해 가을 마오쩌둥은 이른바 “5.16 병단”이라는 가공의 검은 세력을 향해 숙청의 산탄(散彈)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암 도려내듯 최측근을 축출한 마오의 단호한 조치에 관·정·군은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마오는 혁명위원회의 조속한 설립을 촉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29개 성급(省級) 행정구 중 불과 7개 지역에만 혁명위원회가 건립돼 있었다. 참여 세력들 사이의 마찰과 알력이 심해서 그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마오쩌둥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음에도 1968년 9월이 되어서야 신장을 마지막으로 전국에 혁명위원회가 들어섰다.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 혁명간부, 혁명군중의 3결합을 원칙으로 제시했지만, 결국 혁명위원회의 실권은 군부가 장악했다. 질서회복의 명분하에 사실상의 군부독재가 실시되었다.
1967넌 10월 마오쩌둥은 또한 문혁의 첨병으로 맹활약을 벌여왔던 홍위병들을 교실로 돌려보내는 계획을 세웠다. 1967년 10월 14일, 중공중앙은 “중발(中發) [1967] 316호” 문건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전국의 초·중·고 및 대학의 수업 재개를 명령했다. 덕분에 학생들은 실로 1년 반 만에야 교실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는데, 신설된 커리큘럼은 온통 마오쩌둥 사상을 고양하는 이념교육이었다. 수학, 과학, 외국어 등의 교과목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중공중앙은 각 학교 측에 “사심(私心)을 물리치고 수정주의를 비판하라”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견결히 수행하라!” 지시했다.
마오는 질서회복을 위해 교실 밖의 무력투쟁을 교실 안의 이념투쟁으로 전환시키려 했지만, 홍위병의 폭력투쟁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결국 1968년 7월 27일 칭화대학의 캠퍼스에서 발생한 대규모 유혈사태는 홍위병 운동의 종언을 고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홍위병 운동의 종말...마오 “내가 배후다”
1968년 봄, 칭화대학의 캠퍼스는 급진 조반파 “징강산(井岡山) 병단 총부”와 온건 조반파 징강산 병단 4.14 총부” 두 진영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4월 23일에 시작된 전교 규모의 대규모 무장투쟁은 7월 말까지 100일 지속됐다. 사태를 관망하던 마오쩌둥은 마침내 7월 27일 칭화대 캠퍼스에 “공인(工人) 해방군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약칭 공선대)를 투입시켰다. 바로 그날 급진파와 공선대 사이에 격심한 충돌이 일어나 결국 공선대원 5명과 칭화대 소속 6명이 사망하고, 400여명의 부상자가 속출하는 참사가 터졌다.
28일 새벽 2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침실에 전화를 걸어 칭화 대학의 상황을 소상히 알렸다. 격분한 마오쩌둥은 “조반파가 진짜로 반란을 일으켰나!” 소리치며 일어났다. 그는 바로 그날 아침 일찍 인민대회당에서 홍위병 대표들에 급전을 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다섯 명 중 네 명은 제 시간에 도착했는데, 폭력 시위의 현장에서 분투하던 칭화대학 급진 조반파 대표 콰이다푸는 뒤늦게 연락이 닿았다.
콰이다푸야 말로 대표적인 “마오 키드”였다. 1966년 여름 칭화대학 캠퍼스에서 류샤오치가 파견한 공작조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1967년 4월엔 30만이 운집한 비투대회에서 왕광메이를 공격했던 조반파의 대표였다. 일개 대학생 콰이다푸가 국가주석 류샤오치에 맞서 놀랍도록 대담한 투쟁을 전개할 때, 그 배후에는 마오쩌둥이 떡 버티고 있었다. 정치적 리더로서 콰이의 지위는 100%로 마오쩌둥의 권위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마오에 의한, 마오를 위한, 마오의 괴뢰(傀儡)일 뿐이었다.
헐떡이며 회의장에 달려 온 콰이다푸는 마오쩌둥을 직접 알현(謁見)하는 순간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울먹이면서 “칭화의 학생들이 흑수(黑手)의 조정을 받는 공인들에게 공격을 당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라며 하소연을 했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은 “배후의 흑수가 바로 나”라며 콰이다푸의 면전에 말의 폭탄을 터뜨렸다. 홍위병 운동이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도시 홍위병들 농촌으로 내쫓기다
곧 이어 마오쩌둥은 도시 홍위병들의 농촌 파송(派送)을 결정했다. 하방(下放) 혹은 지청(知靑, 지식청년)의 상산하향(上山下鄕, 산으로 오르고 마을로 내려감)이라 미화됐으나 실은 청소년의 인권을 짓밟는 집체적 유형(流刑)의 시작이었다. 학생들은 학업의 권리를 빼앗기고, 지적 연마의 시간을 잃고, 진학의 기회를 상실했다. 의료혜택도, 최저생계비도, 진로 선택의 자유도 없었다. 그들은 낯선 오지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1965년 문혁이 개시되기 직전 중등학교(중·고교) 재학생은 모두 1천 만 정도였다. 1965년 당시 소학교(초등학교) 재학생들은 직접 홍위병 운동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이들 역시 문혁의 세례를 받았다. 그 인원수를 모두 합하면 1억 2천만 명까지 늘어난다.
1966-68년 당시 67만 4천여 명에 달했던 대학 재학생들은 운 좋게도 하방의 광풍을 슬그머니 비껴갔다. 반면 1966-68년 당시 중학생과 고교생은 홍위병 운동을 참여한 후, 하방까지 당했던 불운한 세대였다. 1966년에서 1968년 사이 고교 졸업생들을 흔히 노삼계(老三屆), 중학교 졸업생들을 신삼계(新三屆)라 부른다.
1968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대규모 홍위병의 하방이 시작됐다. 이후 7년에 걸쳐 1천 2백만 명(전체 도시인구의 10% 정도)의 청소년들이 전국 각지의 농촌에 파송됐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농촌에 하방된 청년 인구는 1천 6백 47만 명에 달했다. 운이 좋으면 도시 변두리의 농촌에 배속됐지만, 베이징, 톈진, 항저우, 난징, 우한, 청두, 충칭 등 무장투쟁이 극심했던 대도시의 학생들은 네이멍구, 신장, 윈난, 헤이룽장 등 더 멀고, 더 힘든 오지에 던져졌다.
격리와 중노동의 고통 속에서 그들은 일기장에 깨알같이 기록을 남겼다. 실개울처럼 흘러 모인 지청들의 기록은 마침내 대하(大河)의 강줄기로 흘렀다. 문혁 이후 이들의 비망록이 수도 없이 출판되어 상흔문학(傷痕文學)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겨났다. 이제 그들의 체험담에 귀 기울여 보자.<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