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8회>
어느 나라 역사든 비참하게 희생당한 세대가 있다. 전체주의 정권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세대도 있고, 반독재 정치혁명의 과정에서 서글프게 산화(散花)한 세대도 있다. 무능한 정권의 허튼 정책 때문에 앞길이 막혀버린 세대도 있고, 교활한 권력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몸과 마음을 다치고 만신창이로 살아가는 세대도 있다.
그 중엔 “잃어버린 세대”의 주인공을 자처하면서 그 시절의 상처를 훈장처럼 과시하며 권력을 거머쥐고 치부하는 세력도 있다. 그들과 달리 “잃어버린 세대”의 참된 주인공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치명적 내상을 딛고 일어나 가까스로 입을 연다. 문화혁명이 끝난 후, 과거의 홍위병들이 남긴 기록의 산더미는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과도 같다. 그 거울 속을 보면, 시대의 미망과 집단적 광기, 이성의 한계와 파괴적 본능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인다. 아울러 쉽게 변하지 않는 인간의 선한 본성도 엿볼 수가 있다.
상흔 문학, 잃어버린 세대의 기록
1967년에서 1980년까지 이른바 상산하향(上山下鄕)의 하방(下放)에 투입된 도시 청소년들은 1600만에서 1700만명에 달했다. 대부분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들이었다. 당시 매체들은 하방을 일제히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자발적인 실천 투쟁이라 미화했다.
실제로 이후 홍위병들의 체험담을 읽어보면, 하방 길에 오른 많은 홍위병들은 뜨거운 혁명의 열정과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컨대 1968년 12월 “지식청년(知識靑年, 이하 지청) 왕칭이(王慶一)는 지원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청년입니다. 도시에 있어봐야 할 일도 없고, 농촌은 노동력이 매우 필요하므로 저는 농촌에 가서 노동에 참여하고 저의 사상을 개조하고 사회주의 신(新)농촌을 건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방”은 이처럼 겉으론 자원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과연 그 수많은 학생들이 진학을 포기한 채 낯선 농촌을 향해 자발적으로 떠났을까?
1968년 12월 22일 <<인민일보>> 제 1면 오른쪽 상단 박스 “마오쩌둥 어록”란엔 마오쩌둥의 최신 발언이 실렸다.
“지식 청년들이 농촌에 가서 빈·하·중농에게 재교육을 받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도시의 간부 및 다른 사람들에게 초, 중, 고, 대학을 졸업한 그들의 자녀들을 향촌에 보내도록 설득해서 한번 다 동원해보라. 각지의 농촌 동지들은 마땅히 그들을 환영해야 한다.”
마오쩌둥의 이 발언에서 “한번 다 동원해보라(來一個動員)”는 평상적인 구어체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정부의 모든 상관 기관이 지청의 총동원에 나서라는 구체적인 주문이었다. 마오쩌둥이 직접 전국의 홍위병들에게 하방을 종용했음이 명백하다. 그 분위기는 실제로 전시의 총동원령을 방불케 했다.
개개인은 하방 지원서에 직접 서명을 했다지만, 실제로 당시의 분위기에서 어린 학생들이 하방의 압박을 견디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지청들의 실제 체험담에 등장하는 다음 두 사례를 살펴보자.
자원 노동인가, 강제징용인가
1969년 15세의 어린 소녀가 헤룽장(黑龍江)성 “북부의 거대한 황무지” 베이다황(北大荒)의 궁벽한 농촌마을에 왔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그 소녀는 “원숭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소녀의 집엔 동생 세 명까지 모두 여섯 식구가 살았는데, 부친은 박봉의 노동자였고, 모친은 병약한데다 정신이상증세까지 겹쳐서 일을 할 수 없었다. 집안일을 도맡았던 소녀는 중학 졸업 후 곧장 하향의 압박을 받았다. 부친은 학교에 달려가 집안 사정을 소상히 설명하며 혜량을 구했지만, 간부가 일언지하에 그 부탁을 거절하며 말했다. “올해부터 인력 배분에 통일된 정책이 시행됐어요! 이 정책에 따르면, 집안의 장남, 장녀는 무조건 하향을 해야 하고, 막내만 도시에 남아 있을 수 있어요. 일명 전국 산하 일편홍(一片紅)이라는 정책입니다.” (양뤠이 [楊瑞, 1950- ], <<거미를 먹는 사람들 Spider Eaters>> 중에서)
역시 같은 마을에 온 상하이 출신 리야는 음악, 미술, 문예 등 다방면에 재능이 뛰어났고, 큼직한 반달모양의 눈망울이 매력적인 미모의 여성이었다. 밝고 구김살 없는 모습과는 달리 리야의 부모는 해방 전 부유한 자산계급 출신이었다. 리야는 친구들과 함께 “지식청년”에 지원했는데, 부모의 출신성분 때문에 자격을 박탈당했다. 격분한 리야는 부모에게 편지를 써서 절연을 선언했고, 나아가 대자보를 써서 집안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럼에도 리야에겐 하방의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친구들을 배웅하러 기차역에 갔던 리야는 몰래 기차를 훔쳐 타고 화장실에서 3박 4일을 꼬박 숨어 있었다. 기차가 종착지 헤룽장성 북부의 후린(虎林)역에 당도하자 리야는 미리 써온 혈서를 꺼내들고 베이다황에 “안가낙호”(安家落戶, 영구정착)하겠다고 맹세했고, 그때서야 지도부는 감동을 받아 그녀의 하방을 허락했다.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하방의 자청했던 꿈 많은 소녀 리야는 11년이 지나서야 늦게 온 지청들의 틈에 섞여 상하이로 돌아갔지만, 고된 노동과 영양부족으로 이미 암 진단을 받았다. 수차례의 대수술을 받고 투병하다가 리야는 1993년 고통스럽게 사망했다. (같은 책)
하방 거부하면 반혁명분자로 낙인
1968년 12월 22일 마오쩌둥은 인민일보를 통해서 실제적으로 농촌에 지청들을 파견하는 전국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 과정을 보면, 군대를 소집하듯 강제적인 징발령을 공포하지도 않았고, 경제적 반대급부로 젊은이들을 유인하지도 않았다. 형식적으로 마오쩌둥은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혁명참여를 고무했을 뿐이지만, 그 효과는 대단했다. 문혁의 사회분위기에서 하방을 거부하면 곧 반혁명분자의 멍에를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교묘하고 강력한 대중동원의 전술이었다.
마오가 하방의 카드를 제시했을 때, 그는 의외로 쉽게 범사회적 암묵적 동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하방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지청들이 저항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오히려 많은 중국의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하방을 자청했다. 과연 어떻게 그 수많은 젊은이들을 오지에 추방할 수 있었을까? 마오의 계산속과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고려하면, 가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중국 사회 각 분야의 기성세대가 질서 회복의 현실적 필요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사료된다. <47회>에서 보았듯, 1968년 7월 말까지 칭화 대학에선 둘로 나뉜 조반파가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홍위병들이 도시에 남아서 계속 소요를 일으킨다면, “천하대란”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시민들로선 일상생활이 무너지는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바로 그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천하대치”를 모토로 내세워서 스스로 질서의 회복을 자임하고 나섰다.
둘째, 하방의 과정을 보면, 계급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마르크시즘의 도식적 인간관이 큼 힘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역사적 유물론의 제1명제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언행은 계급이익을 반영할 뿐이다. 아무리 입으로 혁명을 외쳐도 인텔리 집단의 혁명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노동자·농민과 달리 그들은 영원히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결국 지식인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극심한 계급적 열등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그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스스로 오랜 시간 노동자·농민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바로 그 논리 위에서 마오쩌둥은 지청들에게 직접 농촌에 가서 고된 노동을 통해 가난한 농민들에게 혁명의 정신을 배우라고 주문했고,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장기 정착을 맹세하고 오지로 들어갔다. 젊어서 혁명의 점수를 따야지만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게 또한 그 시대의 조건이었다.
셋째, 또한 하방은 도시 실업률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문혁의 광풍 속에서 중국의 국민경제는 다시금 거대한 위기에 봉착했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이끌던 신경제의 활기는 순식간에 이미 사라진 후였다. 중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겐 취업의 기회가 막혀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하방이란 결국 교묘한 방법으로 도시의 학생들을 낙후된 농촌의 오지에 취업시키는 속임수였다.
오지로 하방된 청년 “우리는 함정에 빠졌다”
1970년 17세의 나이로 헤룽장성의 오지에서 청춘을 바쳤던 한 지청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마오쩌둥의 의도를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1970년 나라의 경제는 파산지경이었다. 2천만 지청들에게 정부는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었다. 젊은이들이 직업도 없이 도시에 체류하면 큰 소요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는 ‘농촌은 광활한 가능성의 세계!’라는 구호 아래 전국의 각지로 유배되었다. 결국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진 함정에 빠졌음을 알게 됐다. 비록 우리는 비참하게 많은 곤경을 겪었지만, 국가도 감당 못 할 무거운 짐을 우리가 스스로 짊어져야 했다. 우리 지청들은 무너지는 나라의 기둥을 붙들어 전면 붕괴를 막았다. 진정 우리는 위대한 세대가 아닌가? 우리가 영웅이 아닌가? 물론 긴 세월이 흐른 후에야 우리는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Feng Jicai, <<십년의 광기 Ten Years of Madness>>에서)
“잃어버린 세대”의 상흔문학(傷痕文學)을 살펴보지 않고선, 문화혁명의 실상을 파악할 수 없다. 실체험자의 증언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역사 탐구의 1차 사료(史料)이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