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1년 만에 부활한 전국 대학입시 고고(高考)를 치르러 모여든 수험생들/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9회>

20세기 사회주의 정권들은 왜 하나같이 처참한 몰락의 길을 갔는가? 이윤동기, 인정욕구, 경쟁의식 등등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죄악시했기 때문이었다. 이윤동기를 부정하는 사회에서 대다수 인민은 나태의 늪에 빠져 절망할 수밖에 없다. 열심히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한다면 누가 왜 자발적으로 일하겠는가? 경쟁의 기회가 막혀버린 사회는 최악의 인간소외를 초래한다.

경쟁을 통한 삶의 향상을 도모할 수 없었기에 사회주의 정권의 다수 인민은 국가의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면 인민들 개개인의 상호 경쟁을 원천적으로 금지한 소수의 권력자들은 모든 기회를 독점해서 ‘노멘클라투라'가 되었다.

문화혁명 시기, 중국의 청소년들은 경쟁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1952년부터 실시돼 왔던 고고(高考, 고등고시, 전국 대학입학시험)가 전면적으로 폐지됐기 때문이었다. 학교성적이나 시험점수는 더 이상 대학입학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고고의 폐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실력 대신 출신성분이, 재능보다 “관시”(關係, 관계)가 중시되는 두터운 부패 구조를 낳았다.

마오 “농작물에 대해선 안 배우는...사람 해치는 교육”

문혁의 도화선에 이제 막 불이 붙어 날마다 언론에서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의 희곡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둘러싼 논쟁이 보도되던 시점이었다. 1965년 12월 21일 항저우에서 마오쩌둥은 당시 교육제도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현재 교육제도에 대해선 많은 회의가 생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16, 7년 혹은 20년 동안, 학생들은 벼, 콩, 보리, 기장 등 농작물에 대해선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노동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농민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상품이 어떻게 교환되는지 전혀 배우지 아니 한다. 또 공부만 한다고 몸까지 망가지니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교육이다.”

마오쩌둥은 문과대학은 아무 쓸모가 없다면서 학생들을 생산 현장에 보내서 공업, 농업,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공계생 역시 현장에 가서 실무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오는 대학의 전면 폐기를 주장하진 않았지만, 그 과정을 2년으로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오쩌둥의 파격적 제안에 따라 중공중앙의 고등교육부는 본격적으로 입시제도의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문혁의 광풍이 점점 거세지던 1966년 4-6월 사이 교육제도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 일었다. 지덕체(智德體)의 균형 발전을 해치는 재래식 교육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자는 당론이 일었다. 문혁이 공식화된 5월 중순 이후, 중고생 및 대학생들은 모두 교실 밖에서 혁명투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입시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죄악시되는 분위기였다.

<1967년 베이징 거리에서 행진하는 홍위병들/ 공공부문>

대학입시 제도 폐지...”개인 이익을 우선하면 안 된다”

마오쩌둥 사상은 인간의 이기심을 죄악시한다. <<마오주석 어록>>엔 개인적 입신영달을 추구하는 이기적 존재에 대한 모멸감이 가득하다. 가령 1938년 10월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당원은 그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의 이익을 앞에 둬선 아니 된다. 반드시 개인의 이익을 민족과 인민군중의 이익에 종속시켜야 한다. 따라서 자사(自私) 자리(自利), 소극적 태업, 탐욕과 부패, 봉두주의(鳳頭主義, 봉의 머리가 되겠다는 생각) 등등이 가장 경멸스럽다.”

이런 구절을 날마다 졸졸 암송하던 학생들은 언제나 마오쩌둥의 마음을 먼저 읽고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기민함을 발휘했다. 때론 모심(毛心)을 잘못 읽어 철퇴를 맞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들은 마오쩌둥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1966년 6월 6일 입시를 코앞에 둔 베이징 제1 여자 중등학교 “고3” 학생들이 마오주석 앞으로 “낡은 입시제도”를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 서신은 중공중앙이 고고 제도를 철폐할 수 있도록 학생들이 미리 쳐놓은 밑밥과도 같았다.

학생들은 당시의 입시제도가 “중국 봉건사회 과거제도의 연속이며, 낙후되고 반동적인 교육제도”라 비판했다. “청년들이 혁명을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입시를 위해 책 더미에 파묻혀 있고,” “이름을 날리고 집안을 이루는 착취계급의 반동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요지의 입시 폐지 요청서였다.

문혁이 막 시작돼서 베이징 전역이 술렁이는 시점이었다. 입시를 앞둔 학생들이 앞 다퉈 입시제도 자체를 비판하고 나서자 뜨거운 호응이 일었다. 최초의 공개서한을 읽은 다른 학교 학생들도 질세라 더 과격한 언사의 지지성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1966년 6월 13일 중공중앙과 국무원은 그해 대학입시를 반 년 연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1952년부터 전국에서 통일적으로 시행된 고고(高考) 제도는 폐지됐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4개년 동안 중국 전국의 대학들은 신입생 선발을 하지 않았다.

<“주석어록을 위하여”의 악보를 들고 어코디언을 연주하며 군중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악대. 가사 내용: “마르크스주의는 수천 갈래로 갈라져도 결국 ‘조반유리(造反有理)’ 한 마디어라!’ / 공공부문>

“현장 노동자를 대학으로 보내라!”

1970년에야 일부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다시 받기 시작했는데, 과거처럼 입시 성적에 따른 선발이 아니라 “군중 추천, 지도자 비준, 학교 심사” 3단계의 추천제가 도입됐다. 중학교 이상 학력과 2년 이상의 실천 경험을 가진 공인(工人, 노동자), 농민, 군인에게만 입학의 자격이 부여됐다. 2년 이상 농촌의 현장에서 노동을 한 “지식청년”들은 이미 공인이나 농민과 같은 신분이었으므로 지원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공·농·병 학원(工農兵學員)”이라 불렸다. 학생요원으로서 이들은 “대학에 가서 대학을 관리하고 대학을 마오쩌둥 사상으로 개조하는”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공·농·병 학원”은 마오쩌둥의 고안물이었다. 1968년 7월 21일, 마오쩌둥은 상하이 선반 공장을 방문했다. 그 현장에서 그는 공장 노동자 중에서 직접 기술인원을 선발하는 이른바 마오쩌둥의 “7.21 비시(批示)”를 발표했다. 이 비시에 따라 “7.21 공인 대학”의 모델이 만들어졌다. 공장 노동자 중에서 인재를 발탁하여 2년 간 대학에서 위탁교육을 시킨 후 다시 공장에 돌려보내는 방식이었다.

1970년 6월,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은 “7.21비시”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정치사상이 좋고, 신체가 건강하고, 3년 이상의 실천 경험을 갖고, 중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공인 및 빈하중농(貧下中農)” 중에서 신입생을 선발했다. 이 제도는 1977년 고고가 부활할 때까지 지속됐다.

입시 폐지, 새로운 부패 구조를 낳다

고고 폐지는 교육의 황폐화를 몰고 왔다. 첨단의 지식을 탐구해야 할 대학은 직업양성소의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추천제의 폐단이었다. 시험 점수라는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사라지자 뒷문이 활짝 열린 형국이었다. 신화사 기자로 그 시대를 직접 취재했던 칭화대 출신의 저명한 문혁사가 양지성(楊繼繩, 1941- )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추천을 받아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 중에서 소수의 특출한 인물들을 제외하면 상당수가 아버지의 권세를 이용했다. 아버지의 관직이 높으면 명문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관직이 한미할 경우 일반 대학에 들어갔다. 권력도 세력도 없는 경우엔 대학 진학의 추천을 받기는 지난했다.”(楊繼繩, <<天地飜覆>>하 577)

1973년 중공중앙의 내부 문건엔 다음 내용이 등장한다.

“뒷문으로 들어가는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 상당히 널리 퍼져있다. 고급간부 중급간부의 경우, 직권을 이용해서 자식들을 뒷문으로 넣는 경우가 더 많다. 위에서 행하니 아래서 본받는다. 노동자를 뽑든 학생을 뽑든 모두가 정치세력의 쟁탈전이다. ‘관직이 높으면 관기(官氣, 관의 기세)에 의지하고, 관직이 낮으면 관시(關係)에 의존하고, 관직이 없으면 완력에 의지한다.”

결국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곧이어 사인방이 체포돼서 투옥된 이듬해 1977년부터 다시 전국 고고 제도가 부활했다. 경쟁의 기회가 주어지자 억눌렸던 청년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바로 그해 고고를 치고 베이징 대학에 입학한 리커창(李克强, 1955- )은 현재 중국 국무원 총리이고, 베이징 제2외국어 학원에 입학한 왕이(王毅, 1953- )는 현재 중국 외교부 장관으로 재임하고 있다. 대학 입학 전 리커창은 안후이성의 펑양(鳳陽)현에 하방되어 지식청년으로서 당지부 서기직을 수행했다. 왕이는 1969년부터 헤룽장성 생산건설병단에서 8년 간 군 생활을 했다.

<문혁 당시 “반당분자”로 몰려 고초를 겪는 시중쉰의 모습/ 공공부문>

고고의 부활로 시험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한 두 사람과는 달리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은 1975년 군중의 추천을 받고 영도의 비준을 받아 칭화 대학에 입학했다. 일반적으로 시진핑은 흑방(黑幇)의 자제로 분류되어 많은 불이익을 당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고난을 극복한 “황토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勛, 1913-2002)은 1950년대 중공중앙위원으로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했던 인물이지만, 1962년부터 반당행위의 혐의를 쓰고 박해를 받았으며, 문혁 기간 격리되는 고초를 겪었다. 1975년 5월 시중쉰은 격리 해제되어 뤄양의 공장에 배속되었다. 시진핑의 자서전에 따르면, 바로 그해 그의 부친 시중쉰은 7-9월 다수의 우파 인사들과 함께 복권됐고, 덕분에 그는 군중의 추천을 받고 지방 지도자의 비준을 받아 칭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계속>